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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의 목소리에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
백정의 머릿속에 자신이 잡았던 돼지들의 비명이 울렸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소리다.
백정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돼지가 죽어 가며 지르는 비명을 듣고 자랐다.
피냄새와 함께 들려 오는 그 소리가 어렸던 그에게는 공포였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그 소리는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간간이 그를 괴롭혔다.
지금 왜 그 소리가 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자기도 모르게 몸이 오싹했다.
‘저놈이야말로 도살자다.’
백정은 무심한 강소군의 표정에서 전율을 느꼈다.
방금 사람을 죽였는데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다. 널브러진 시신을 앞에 두고도 마치 죽은 돼지를 보듯 자연스럽다.
한 번 두려움이 들자 백정은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자신이 아무 거리낌 없이 돼지를 잡듯 강소군이 자신의 목을 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대로 있다간 반드시 자신의 목이 떨어질 것 같아 오히려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놈이 감히 천주님을 모욕해?”
난폭한 성정의 백정은 오래전 사소한 일로 다투다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그 때문에 도주하다 천황성에 들었다.
무공을 모르던 그는 천주의 대법을 통해 엄청난 기를 얻었다.
전신의 기를 운용하게 되자 무지몽매했던 머리까지 트였다.
돼지를 잡던 칼질을 도법으로 만들어 살저도법(殺猪刀法)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이후 여전히 천황성에서 소돼지를 잡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돼지만 잡던 그에게 야망이 생겼다.
천주는 그야말로 공평무사하였다. 능력이 되는 자는 제후와 왕으로 칭해지고 더 뛰어난 자는 황위를 하사하고 그에 걸맞게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종국에는 장생불사의 길에 들 수 있다고 했다.
촌마을에서 돼지를 잡던 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삶이다.
그런 길을 열어 준 천주는 그에게 신이나 마찬가지다.
백정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그러나 막상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그때,
짧은 검을 등에 매고 있던 중년 사내가 피식, 웃었다.
“백정, 너는 정말 우둔하군. 저자가 지금 시간을 벌고자 하는 걸 정말 모르나?”
순간, 사내가 등에 맨 검집에서 검이 절로 튕겨 올랐다. 기운만으로 검을 뽑은 것이다.
검이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아 사내의 머리 위에 섰다.
검은 끝이 부러져 있었다. 그래서 짧아 보였던 것이다.
‘아.’
강소군이 아쉬워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금단진공을 운용하여 의식을 나누고 있었다.
방금 전 장검을 든 자와의 싸움에서 그는 초식의 완성으로 심검에 다다를 뻔했다.
심검.
마음만으로 사람을 벨 수 있다는 경지. 그러나 그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 아는 이가 없다.
원래 강소군이 이루고자 한 것은 심검이 아니라 검초의 완성이었다.
검을 사선으로 한 번 빗겨 그은 것뿐이었으나 그의 뇌리에서는 무수한 검초가 피어올랐고 그에 따라 기운이 발출되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검초의 기운이 완벽한 구의 형태를 이뤘을 때 적을 벨 수 있었다.
이를 본 도황이라는 자가 심검이라며 짤막하게 내뱉었다.
순간 강소군은 심검의 단초를 얻었음을 깨닫고 금단진공을 운용하여 의식을 나눴다.
백정을 상대하면서 다른 의식으로 방금 전 쓴 수법을 되새겼는데 그만 짧은 검을 쥔 자가 알아챈 것이다.
강소군이 짧은 검을 쥔 사내를 보았다.
‘무림 출신이다. 그것도 제법 고수였을 것이다.’
천주의 대법을 받기 전 그의 경지가 짐작이 갔다.
그에게서 쉽게 깨뜨릴 수 없는 평정심이 느껴졌다. 게다가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장검을 든 사내도 무림 출신이었는데 그가 다소 경박했다면 이 사내는 무척이나 진중했다.
게다가 어딘가 모르게 대파의 정종무공 느낌이 강했다.
“나는 절검(切劍)이라 하지.”
강소군이 자신을 탐색하는 듯하자 사내가 스스로를 밝혔다.
허나 이는 천황성에서 통용되는 별호일 것이다.
그는 불취처럼 과거를 지우고 싶어 하는 자였다.
‘정말 각양각색이군.’
평범했다가 천주의 대법을 통해 경지에 오른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에 충실했다.
반면 무림인이었다가 대법을 받은 이들은 좀 더 다양했다.
편제에게서는 지독한 권태를 느꼈다. 잠시 봤던 창제는 오로지 무공에만 몰두한 무치였다. 불취는 술독에 빠져 헤맸다.
강소군은 절검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갈등을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다르다.’
강소군의 시선은 바위에 앉아 있는 도황에게 향했다.
먼 곳에서 다가올 때 마치 폭풍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바위에 앉아 있는 그에게서는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심한 눈으로 강소군을 보고 있을 뿐이다.
강소군이 다시 절검과 백정, 목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호에 나가면 하나같이 절대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앞에 두었으나 강소군의 마음은 담담하였다.
절대지경이라는 허울을 벗기고 나자 앞에 있는 이들이나 삼류무사나 매한가지로 느껴졌다.
이들의 무공이 기이하게 높긴 하지만 스스로 깨우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어딘가 허점이 남아 있었다.
“어서 저놈을 해치우자고. 철권호 그자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야.”
백정이 말하자 목수도 앞에 나섰다.
일 대 삼.
적어도 목수는 자신은 살아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절검과 백정은 확실히 자신보다 강했고 그들이 합공하면 강소군과 동귀어진을 할 공산이 컸다.
설령 강소군이 감당하더라도 중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그때 자신이 마지막 숨통을 끊으면 공을 세울 수 있다.
‘공을 세우면 천주의 대법을 다시 한 번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공손 노야는 이번 대출정에서 공을 세운 자들에게 천주의 대법을 약속했다.
목수는 그때를 잊지 못한다.
백 일간의 대법에서 깨어났을 때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 허공을 날아올랐고 칠흑같은 밤에도 삼 장 밖 풀숲의 거미까지 보였다.
기운은 넘쳤고 두뇌는 영민하여 모든 게 기억났다.
아쉬운 것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무디어져 간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목수 역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천주는 말했다.
‘톱질이라도 대성을 이루면 생사경을 넘어 미증유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기다리겠다.’
목수는 다시 한 번 대법을 받는다면 반드시 생사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대법에 대한 갈망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억눌렀다.
‘반드시 살아서 생사경을 넘으리라.’
살고자 하는 목수의 마음은 그의 행동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절검과 강소군이 대치하자 백정이 슬며시 자리를 옮겨 강소군의 옆을 노렸다.
목수는 절검과 백정 사이에 섰다. 그나마 두어 걸음 뒤쪽이다.
백정이 인상을 썼으나 절검은 개의치 않았다.
머리 위에 검을 띄워놓고 강소군을 무심히 볼 뿐이다.
누가 봐도 일검의 승부를 노리는 모양새였다.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야.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바위에 앉아 있던 도황이 문득 흘리듯 말했다.
절검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도황은 거든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절검이 손을 뻗자 머리 위에 떠 있던 검이 스르르 내려와 그의 손에 잡혔다.
강소군이 부러진 검을 주시하였다.
절검은 강소군이 자신의 검을 유심히 보자 흘리듯 말했다.
“단정검이라 하지.”
절검의 시선이 강소군의 검에 꽂혔다. 보기 드문 검이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무애검이라 하오.”
강소군이 화답하듯 말했다.
절검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무애검의 이력을 아는 듯했다.
“명성만큼 좋은 검이군.”
절검의 말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무애검이 지잉 울었다.
“하지만.”
절검이 단정검을 들었다.
“단정검이 자를 수 없는 건 없다.”
절검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파파팟
단정검이 강소군의 목과 가슴, 허리를 노렸다.
-깡, 까강, 챙!
무애검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세 차례 부딪쳤다.
여기까지는 일반 검사들의 싸움과 다를 바 없었다.
단정검이 돌연 사라졌다.
-파파팟!
얼마나 빠른지 검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중에 들릴 정도였다.
강소군의 눈으로도 잡기 힘든 쾌검이었다.
검이 보이지도 않으니 찔려도 어떻게 당했는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강소군은 눈을 내리깔고 천성육십사식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천성육십사식은 앞식에 뒤의 식을 더해 중첩해 나가는 검법이었다.
강소군의 머릿속에 육십사식이 동시에 펼쳐져 중첩되었다.
머리에서 펼쳐진 검식이었건만 검로를 따라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절검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쾌검을 운용하면서도 결정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다.
강소군의 시선이 절검에게 향했다. 그의 눈에는 천성육십사식의 모든 검로가 보였다.
검로의 영역은 일 장 거리.
절검은 그 안에 있었다.
강소군이 세웠던 무애검을 내리그었다.
-서걱!
절검의 가슴팍에 핏줄기가 그어졌다. 단정도가 미친 듯이 나부꼈다.
-카카캉!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기와 기가 부딪치는 기음이 터졌다.
“허억!”
절검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상세는 깊지 않았다.
“우앗!”
그 틈을 타고 백정이 강소군의 옆을 덮쳤다.
-쉬이익!
커다란 칼이 벼락같이 강소군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백정이 일 장 거리로 들어오는 순간 강소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공간을 빽빽하게 채운 검로.
강소군이 그중 하나를 따라 그었다. 이미 기운으로 그어진 검로였다. 기운이 움직이자 백정의 우람한 팔이 잘려 나갔다.
“크억!”
백정은 서늘한 느낌과 함께 자신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자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
목수는 아예 꼼짝 못 했다.
검을 휘두를 뿐인데 절로 가슴이 베어지고 팔이 떨어져 나가는 광경에 감히 공격할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절검의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정말 심검을 완성한 것인가?”
“….”
절검의 얼굴에는 허탈함이 가득했다.
도황의 말이 맞았다. 초식이 아니라 자신이 깨우친 최상의 경지, 스스로 탄검(彈劍)이라 이름 붙인 절기를 펼쳐야 했다.
그랬으면….
과연 탄검을 펼쳤다 해도 이길 수 있었을까?
짧은 순간 의문이 스쳤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왜?”
절검이 검을 내렸다.
강소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상반신이 잘렸을 것이다.
그런데 피륙의 상처만 내는 정도에 그쳤다.
“….”
강소군이 목수를 보았다.
목수가 움찔, 하더니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같은 경지이나 백정은 자신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주하였고 목수는 심약한 마음에 제대로 써 보지도 못했다.
반면 절검은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열어 가고자 하는 이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강소군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을 제약하는 한계 또한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강소군의 시선이 절검에게 향했다가 단정검으로 이어졌다.
“검을 깨뜨리시오.”
“…?”
“단정(斷情)이라는 이름 또한 벽이니까.”
강소군이 자신의 검을 들어보았다.
“무애라는 건 검의 이름이 아니라 펼치고자 하는 이의 마음이오.”
“….”
절검의 얼굴이 멍해졌다.
선문답 같은 알 수 없는 말이었으나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팍!
절검이 전신의 기운을 주입하여 단정검을 깨뜨렸다.
그는 이미 검을 깨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다만 마음이 검에 갇혀 있었던 것뿐이다.
“고맙네.”
절검이 짤막하게 한마디 하더니 몸을 돌렸다.
“하하하!”
절검이 걸어가며 크게 웃었다. 목소리에는 비통함과 후련함, 그리고 자조 등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이십 년 세월이 마음의 감옥이었다는 말이었던가?”
절검이 질주하였다.
바위에 앉아 있던 도황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가 막히군.”
목수도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몸을 날리려 하였다.
백정도 오른팔을 지혈하고 주춤주춤 뒤로 빠지려 하였다.
“너희를 풀어줄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