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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칠의 말이 맞았다.
남궁악조차 지금 와서 되돌릴 수는 없다고 했다.
“무한에 천하 정파의 무림인들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 천황성이 천하무림을 상대할 수는 없을 거네.”
“그들의 무위를 알지 않습니까?”
남궁악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을 알린다 해도 누가 듣겠는가. 천하비무대회가 사흘 남았네.”
후기지수쟁패지연이 나날이 격화되고 맹주 선출을 위한 천하비무대회가 가까워지며 분위기는 한층 달아올랐다.
가장 유력했던 의천맹주 철권호가 돌연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몇몇 고수가 천하비무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경쟁이 치열해지며 누가 무림맹주가 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을 모았다.
“아무튼 각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거대한 산들이 연이어 펼쳐져 있다.
평야와 산이 만나는 길목에 말 한 필이 나타났다.
강소군이 연이어 펼쳐진 산을 살폈다.
당우화가 일러주기는 했으나 막상 와서 보니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계곡을 한 번 잘못 들면 되돌아 나오거나 산을 넘어야 한다.
강소군이 지세를 살피며 가는데 저 멀리 산중에서 기파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 왔다.
“…!”
강소군이 잠시 귀를 기울이다 말에서 내렸다.
한쪽 나무에 말을 묶어 두고 곧바로 경공을 펼쳤다.
-쾅!
기파 터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계곡 한가운데 십여 장 평지가 있는데 두 사람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주위로 세 명이 서 있었고 가마 한 대가 부서져 있었다.
“철권호?”
격전을 벌이는 사람 중 하나는 갑작스레 사라져 풍파를 일으킨 철권호였다.
철권호를 상대하는 이는 도를 쓰는 자였다.
그가 한 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사방에 도기가 번뜩였다.
지켜보는 이들의 복장은 각양각색이었다.
강소군은 대번에 그들이 천황성 고수들임을 알아보았다.
그들도 강소군이 나타나자 시선을 주었다.
특이하게 투구와 갑옷을 입은 자가 강소군을 보더니 퉁명스레 내뱉었다.
“어쩐지 완강하게 반항한다 했더니 조력자가 있었군!”
강소군이 다가가며 장내를 살폈다.
부서진 가마 옆에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가마꾼들은 도주하였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한쪽에 쓰러진 시신 한 구가 눈에 들어왔다.
-쾅!
철권호가 벼락같이 권을 내지르자 도를 쓴 자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크윽!”
그럼에도 다른 자들은 그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로 간에 냉담한 것이 천황성 고수들의 특성이다. 아니, 냉담하다기보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할까? 동료 의식은 없는 자들이었다.
철권호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도를 든 자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더니 말했다.
“지독한 놈! 천주가 네놈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 준 모양이지?”
“무공은 누가 이끌어 주는 게 아니다. 너희는 화경에 들고도 그 이치를 모른다는 말이냐?”
철권호가 대답을 하며 여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어 철권호가 강소군에게 말했다.
“나의 내자일세. 기절을 한 듯한데 이상 없는지 봐 주겠나?”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이고 여인 쪽으로 가려 하자 투구와 갑옷을 쓴 장수차림의 무인이 걸어 나왔다.
그는 커다란 언월도를 들고 있었다.
“어디를 함부로 오는 것이냐?”
그와 강소군, 그리고 여인이 쓰러진 자리는 품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어린놈이 대담하군. 여기 어르신들이 있는 게 보이지 않느냐?”
“네놈들의 상대는 나다!”
철권호가 장수차림의 무인을 막아섰다.
장수차림 무인이 코웃음을 치고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공손 노야가 생포하라고 했지만 이렇게 완강히 반항하니 어쩔 수 없군.”
들으라는 듯 변명 같은 말을 내뱉더니 번개같이 언월도를 휘둘렀다.
-부웅!
커다란 바람 소리와 함께 언월도가 철권호를 사선으로 내리찍었다.
철권호가 한 발 옆으로 물러나는 척하다 앞으로 나오며 거리를 좁히려 들었다.
그때,
“죽인다고? 그렇다면 내가 마무리를 해야지!”
도를 든 자가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려 왔다.
철권호가 양손을 쭉 내밀었다. 장수차림의 무인과 도를 든 자에게 각기 일권을 지른 것이다.
-파라라락!
권 주변에서 바람이 일며 거대한 권기가 쭉 뻗어 나갔다.
-쾅!
장수차림의 무인은 언월도를 비틀어 권기를 흘려냈으나 도를 든 자는 작정을 한 듯 맞받아쳤다.
사방에 권기가 비산하는 와중, 철권호의 신형이 사라졌다.
권을 쓰는 이들은 보법에 뛰어났다. 병기를 쓰는 이들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각별히 단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철권호는 강소군이 부인을 지켜줄 것이라 믿고 제약 없이 보법을 펼쳤다.
“어헛!”
도를 든 자가 숨을 들이켜고 신형을 비틀었으나 이미 늦었다.
-퍼엉!
그의 복부에 철권호의 권이 꽂혔다.
“크어어억!”
도를 든 자가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이놈이? 죽어랏!”
장수차림의 남자가 언월도를 횡으로 크게 그었다.
놀랍게도 도가 두 자 길이로 늘어났다. 아니, 도강이 솟으며 늘어난 듯 보였다.
철권호는 감히 막지 못하고 뒤로 십여 걸음이나 물러나 피했는데 공교롭게도 나머지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이었다.
“더 볼 필요가 없지?”
한 사람이 묻자 다른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쌍둥이처럼 닮았는데 양손에 각기 두 자 길이의 강편을 쥐고 있었다.
세모꼴의 강편은 굵기가 어린애 팔뚝만 하여 맞으면 뼈가 박살이 날 듯 보였다.
“네 권은 충분히 감상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죽어 주는 게 좋겠다.”
한 사람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강편으로 철권호를 후려쳤다.
-쐐애액!
강기를 품은 강편이 귀청을 찢을 듯 바람을 가르며 철권호의 어깨를 내리치려 들었다.
워낙 강맹한 기운이 담겨 있는지라 철권호는 마주 쳐내기 어려웠다. 다시 옆으로 피하는데 언월도가 날아왔다.
“이놈은 내 차지다. 너희는 저놈이나 잡아!”
장수차림의 무인이 고함을 질렀다.
“아무나 먼저 잡으면 되지.”
“너희부터 죽여 줄까?”
“알았다. 알았어.”
장수차림의 무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쌍둥이 무인이 투덜대며 강소군을 향해 걸어갔다.
강소군은 여인의 옆에서 손목을 잡고 맥을 살피고 있었다.
강소군은 여인에게 기운을 불어넣으려 했으나 세 가닥 맥이 끊어져 흩어짐을 느꼈다.
‘절맥?’
여인은 서른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미간에 그늘이 져 있었으나 그로 인해 묘한 신비함마저 들었다.
절맥은 치료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아주 귀한 영약이 필요하여 막대한 비용이 든다. 평범한 이는 일찍 죽는 수밖에 없다.
그 사이 강편을 든 쌍둥이 형제가 다가왔다.
“이봐, 젊은이. 헛수고하지 말고 이리와. 그 여자보다 네가 먼저 죽을 거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모두 죽여 버리고… 크흐흐.”
“왜 그리 음흉하게 웃는 것이냐?”
“생각해 보니 여인을 접한 지 이십 년도 더 된 것 같아.”
두 사람은 오십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놈의 신선이 뭔지. 한창 좋은 시절을 이 산속에서 다 보내고 말았네.”
두 사람은 강소군을 앞에 두고 신세 한탄을 하였다.
강소군은 불취가 한 말을 떠올렸다.
천황성의 고수들은 천주의 대법을 통해 화경까지 쉽게 든다고 했다.
이후 성취는 각자에게 달렸다. 그러기에 그들은 동료이면서도 경쟁자였다.
천주는 그들에게 따로 제약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군웅각에 머물며 다음 벽을 깨기 위해 수련을 한다.
천주는 생사경을 넘어 미증유의 경지에 들면 반노환동은 물론 생사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했다.
말만이었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천주 본인이 반노환동하여 탈속한 중년 문사의 풍모를 하고 있으니 모두가 굳게 믿고 있다.
천주의 나이 또한 알려지지 않았으나 적어도 백 년은 훌쩍 넘었을 것이란 게 불취의 말이다.
장생불사 신선의 길이 눈앞에 있는데 욕심을 내지 않을 이가 없었다.
강소군은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왜 웃는 것이냐?”
자신을 비웃는다고 여긴 한 사람이 강소군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 대화로 봐서 그가 형인 듯했다.
강소군은 이십여 년이나 수련을 하고도 음심을 떨치지 못하는 걸 보고 천주의 대법이 확실히 한계가 있음을 알고 웃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굳이 말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
-스르릉.
강소군이 무애검을 뽑아 비스듬히 내렸다.
“좋은 검인데 아깝게 됐군.”
동생으로 보이는 이가 강편을 휘휘 휘두르며 다가왔다.
-붕붕.
경기를 품은 강편이 바람 소리를 냈다.
쌍둥이 형이 슬그머니 옆으로 돌았다.
세 사람이 품자형을 이루는 순간.
“받아 봐라!”
고함 소리와 함께 강소군은 사방이 어두워진 느낌을 받았다.
강편 그림자가 허공을 뒤덮으며 햇빛마저 가린 것이다.
-붕붕.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무거운 기운이 강소군을 짓눌러 왔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연수합격을 익힌 듯 손발이 맞았다.
강소군이 빠져나갈 틈 없이 사방을 제압하고는 이어서 공격을 해 왔다.
-쉬이이익!
강소군이 발을 옮기며 비스듬하게 내렸던 검으로 원을 그렸다.
기운이 실리지 않은 검이 흐느적거리며 쇄도하는 강편을 찍으려 들었다.
“한심한 놈!”
강편에 실린 기운은 바위도 박살낼 만했다. 그런데 검으로 쳐내려 든다니 절로 비웃음이 나왔다.
“어엇!”
비웃음은 곧 놀람으로 바뀌었다.
-착!
강편에 검이 달라붙은 것이다. 그러더니 강편을 휘감아 돌렸다.
그러자 왼손의 강편이 복부를 찌를 듯 쑤시고 들어왔다.
쌍둥이 형도 가만있지 않았다.
양손의 강편으로 강소군의 정수리를 동시에 내리쳤다.
-깡!
강소군은 자신의 검세에 말린 강편을 끌어 복부를 찔러 오는 강편과 마주치게 하였다.
동시에 허리를 숙이더니 그대로 미끄러지며 정수리를 찍어 오는 이의 옆을 스쳤다.
마치 봄바람처럼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정수리를 찍은 이는 복부가 화끈하더니 곧이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주르륵.
“크어억!”
복부가 갈라지며 장기가 밀려 나오는 걸 보는 순간 고통이 밀려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터뜨렸다.
“이 새끼가?”
형이 순식간에 당하자 눈이 뒤집힌 아우가 물불을 안 가리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파파파파팍!
강편이 연달아 강소군을 향해 꽂혔다.
쌍둥이 형도 한 손으로 복부를 감싸며 다른 손에 든 강편을 뒤편에 있는 강소군에게 던졌다.
-팅!
강소군이 날아오는 강편을 쳐내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쌍둥이 아우의 강편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쉬쉬식!
강편이 강소군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러나 아무런 타격음이 일지 않았다.
강소군의 신형은 마치 허깨비와 같았다.
쌍둥이 아우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눈앞에 있어 후려쳤는데 그림자를 친 듯 아무런 걸림이 없다.
강소군이 검을 쭉 내밀었다. 쌍둥이 아우가 검을 내리찍었으나 검 역시 실체가 없는 듯 쑥 지나갔다.
“조심해라! 환영술이다!”
복부가 갈린 쌍둥이 형이 크게 놀라 외쳤다.
그는 아우의 강편이 강소군을 쳤는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환영술이라 착각을 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강소군은 가만 서 있는 듯했으나 사실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임은 크지 않았으나 강편을 흘리기에는 충분했다.
‘초식이 완성을 이루면 상대의 초식 또한 훤하게 들여다볼 수 있지.’
강소군에게는 쌍둥이 아우가 휘두르는 강편의 길이 훤하게 보였다.
그러니 맞아 주고 싶어도 맞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