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77화 (177/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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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외곽 외진 장원.

사람들은 있는지조차 모르는 장원이다.

어둠이 내릴 무렵 철권호가 장원에 들어섰다.

경계하는 무사도 없었다.

‘으음.’

철권호는 사방에 도사린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천황성 군웅각에 처음 들었을 때 받았던 느낌과 흡사했다.

하인 하나가 다가왔다.

“노야께서 기다리십니다.”

하인을 따라가니 내전 깊숙한 전각에 달할 수 있었다.

아담한 실내 상석에 공손 노야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철권호가 들어섰는데도 시선을 주지도 않고 입만 떼었다.

“거기 앉게.”

“무슨 일로 보자 한 것이오?”

철권호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공손 노야는 그제야 책을 덮어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

“노부가 하는 일에 훼방을 놨더군.”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철권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강소군이란 놈을 잡으려 군웅각 고수들을 보냈지. 그런데 절반이 죽거나 다쳐서 돌아왔더군. 다 죽었어야 했는데 말이지.”

“….”

“자네가 중간에 나타나 막았다고 들었네. 해명을 해야 할 걸세.”

“그보다 사일신창과 팽일호에 대한 이야기부터 합시다. 어찌하여 나를 믿지 못하고 그들에게 자객을 보낸 것이오? 내가 그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오?”

철권호가 따지듯 물었다.

공손 노야는 철권호의 물음을 무시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자네는 천황성 사람이 아니로군.”

“당신이야말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소. 나는 조왕의 부탁을 받고 도와줄 뿐이오.”

공손 노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천주의 은혜를 입고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천주께 도움을 받은 건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게 명을 내릴 수는 없는 거요.”

“명을 내릴 수 없다? 자신이 어떤 위치인지를 모르나?”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만.”

“자네는 바둑판의 돌 같은 존재일 뿐이야. 그런데 돌이 제 마음대로 하게 놔둘 것 같나?”

철권호가 인상을 썼다.

“말조심을 하는 게 좋겠소. 내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때 약조한 바를 잊었소?”

“….”

“분명 대의를 벗어난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공손 노야가 클클, 웃었다.

“그렇지. 그런데 왜 대의를 저버렸나?”

“자객을 보내 경쟁 상대를 제거하는 비열한 암수를 저지르고도 대의라고?”

철권호가 코웃음을 쳤다.

공손 노야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자네야말로 말조심을 하는 게 좋겠군. 조왕부에 머무는 내자를 생각한다면 말이야?”

-팟!

철권호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방금 뭐라고 했나?”

공손 노야는 담담하게 말했다.

“삼음절맥이 고칠 수 없는 병도 아닌데 왜 조왕에게 붙잡혀 지내는지 모르겠군.”

“…!”

“천주께서 손을 쓰면 그 정도는 고칠 수 있었을 것인데 말이지.”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아니지. 도와주려고 하는 거지. 그래서 사람을 보냈다네. 아마 지금쯤 조왕부에 당도했겠군.”

-콰당.

철권호가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감히 안사람을 노려? 죽고 싶은가?”

“경거망동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아무리 늙었다지만 자네 하나 감당하지 못할 것 같나?”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흥! 네가 뭘 착각하고 있구나! 네놈이 무림에 약간이나마 명성이 있었기에 내세운 것뿐이지, 정말 사람이 없어서 너를 무림맹주에 앉히려고 한 줄 아느냐?”

철권호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여기서 끝내기로 하지. 나는 네놈의 주구가 될 생각이 없으니까.”

철권호가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그리 쉽게 나갈 수 있을 것 같나?”

“나를 막는다면 죽을 것이다.”

철권호가 주먹을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주먹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만일 안사람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안사람이 다친다면 내 손에 반드시 죽을 것이다.”

철권호는 그대로 방을 걸어 나갔다.

철권호가 나가자 한 사람의 신형이 스르르 나타났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러웠다.

청수한 풍모의 장년 사내는 철권호가 나간 문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노야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흥! 그래 봐야 결국은 수그리고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손 노야가 코웃음을 쳤다.

“저놈이 물러났으니 무난하게 무림맹주에 오를 것이네.”

“무림맹주라… 생각지도 못한 감투를 써 보는군.”

장년의 사내, 한때는 천산신검이라 불렸던 검황이 중얼거렸다.

***

“아버님?”

제갈선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섰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백발 성성한 노문사는 제갈세가의 노가주 제갈후였다.

집안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노가주가 나타나니 제갈선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앉아라. 상의할 게 있다.”

상석에 앉은 제갈후가 말하자 제갈선이 아래쪽에 앉았다.

“철권호를 지지하던 걸 철회해야겠구나.”

“예?”

제갈선이 놀라 되물었다. 세가연합과 척을 지면서까지 철권호를 지지했는데 이제 와서 철회한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초 계획대로 모용백을 지지한다. 그리고 군사부를 네가 맡아 줘야겠다.”

“인선은 무림맹주가 선출된 이후에 하기로 합의했습니다만.”

“그렇게 될 거다.”

“모용백은 아마도 저를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걱정 마라. 모용백은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

“전혀 새로운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

제갈선이 잠시 침묵을 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버님, 그 사람이 혹시 천황성의 고수입니까?”

제갈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게 말해 둘 게 있다.”

“….”

“우리 가문은 천황성과 오랫동안 공조해 왔다.”

제갈선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내심 품었던 의문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네가 알다시피 천황성은 이제껏 무림에 간여하지 않았지. 천외천의 존재로 지내 왔는데 이번에 무림맹 결성에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더구나.”

“천황성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무림을 지배하고자 하는 겁니까?”

제갈후가 아들을 잠시 보다 말을 이었다.

“그들이 무림을 지배하려 들었다면 벌써 뜻을 이뤘을 것이다.”

“….”

“그들에게는 그럴 힘이 있지. 너도 보지 않았느냐?”

“하지만 무림인들이 따르겠습니까?”

“그들이 원하는 바는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무림맹이다.”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주 황조와 제후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들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로 무림 영역을 나누고 자신들은 주 황실처럼 조공을 받겠다는 것이지.”

“아!”

제갈선은 천황성의 의도를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제갈세가의 영역도 이미 분할받았다.”

“만일 따르지 않으면 어찌 되는 겁니까?”

제갈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아들을 보았다.

“따르지 않는다고?”

“대파나 세가는 자존심이 무척 강합니다. 천황성에서 정해 준 영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러면 멸문될 것이다.”

“…!”

너무나 단호한 제갈후의 말에 제갈선은 말문이 막혔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힘이 있다. 하늘이 내려온 이상 따를 수밖에 없지.”

“그들이 왜 우리 가문에 미리 일러준 겁니까?”

“내가 그들을 대신하여 무림의 일을 관할하기로 했다.”

“그건 안 됩니다.”

제갈선이 자기도 모르게 내뱉었다.

제갈후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제갈선을 보았다.

“무림인들은 자유분방한 자들입니다. 천황성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반발을 할 게 분명하고 그러면 그 화살이 우리 가문으로 향할 겁니다.”

“뭐라?”

제갈후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제갈선이 한발 물러났다.

“아버님은 이미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나셨습니다. 지금 가주는 형님이시죠. 형님의 뜻이 정해져야 할 겁니다.”

“….”

제갈후가 둘째 아들을 노려보았다.

“네가 내 명을 거역할 줄 몰랐구나.”

“아버님의 아들이기 이전에 가문을 대표하는 중책을 맡고 온 것입니다. 가주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건 걱정 마라. 명아가 직접 오고 있으니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그렇다면 철권호 지지도 일단은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는 무림맹주의 자리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포기하고 돌아갔다.”

“예?”

“그렇게 알고 있어라.”

제갈후가 올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제갈선은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 제갈후가 너무나 위험한 자들과 연루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천황성이라니?’

무림 밖의 무림은 천황성이나 마교, 혈교를 이른다.

마교와 혈교와 달리 천황성은 정사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무림인들은 배척할 것이다.

‘큰일 났구나.’

제갈선이 궁리 끝에 철권호를 찾아갔으나 정말 그는 거처에 없었다.

***

깊은 밤.

노이칠이 은밀하게 강소군의 별원으로 들었다.

삼도문 장원에는 대파와 세가들이 곳곳에 머물고 있다.

노이칠은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아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왔다.

강소군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대청에 앉아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밤늦게 차를 마시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천황성이 어찌 나올지 알아야 했다.

-스르륵.

대청으로 들어오는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고 노이칠이 들어왔다.

“오셨군요.”

강소군이 노이칠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노이칠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들이 이미 무한에 당도했네. 이상하게도 안가로 쓰는 장원에 들어간 후 움직임이 없네.”

“모두 몇 명이나 됩니까?”

“여든 명 정도 되는 것 같더군. 그중에 서른 명 정도가 빠져나와 장강을 넘었네.”

“….”

“아마도 흑천맹까지 칠 모양이네.”

“정말 무림을 일통할 생각이로군요.”

노이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관 각주께 보고했네. 대정무각의 무력대가 무한으로 오고 있을 것이네.”

“대정무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평범한 무인들이 상대했다가는 희생자만 늘어날 겁니다.”

“나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애초에 대정무각을 만든 취지가 천황성을 상대하기 위함이네. 모두 죽더라도 끝장을 봐야지.”

“지금 무한에 온 자들이 다 죽어도 천황성이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노이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역시 알고 있는 바다.

“천주를 잡아야 합니다.”

“그를 잡으려면 황군이라도 동원해야 할 걸세.”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불취에게 들은 바대로라면 십만대군이 온다 해도 천주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몸 하나 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제가 갈 것입니다.”

“아! 비어 있는 천황성을 친다? 좋은 계책이네.”

노이칠이 맞장구쳤으나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천황성에는 저 혼자 갑니다.”

“뭐라고? 자네가 혼자 가겠다고?”

“….”

“그건 너무 무모한 짓이네.”

“아닙니다. 노 대협께서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희생을 줄이는 데 힘을 기울여 주십시오.”

“….”

“남궁가와 팽가에게 조력을 부탁해 보겠습니다. 무당도 도와줄 것입니다. 무한에 모인 무림인들을 해산한다면….”

강소군이 자신과 인연이 있는 문파들을 거론하였다.

노이칠이 탄식했다.

“자네는 무림인들을 정말 모르는군. 그들은 군이 아니라네. 눈앞에 죽음이 있어도 자존심 하나로 목을 세우는 이들이지. 천황성이 아니라 마교가 들이닥친다 해도 무림맹 결성을 포기하지 않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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