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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무방 구양조와 화룡문 조운룡이 나타나자 정파의 명숙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천하사패 가운데 천무방. 그리고 도룡회의 주축이었던 화룡문이다.
무림맹을 결성하는 이유는 천하사패와 같은 무력세력이 나오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천하사패의 일원이었던 방파가 들어온다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선이 나섰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소. 천무방은 과거 패도적인 세 확장으로 강호 여러 문파로부터 원성을 산 바 있소. 그런데 무림맹에 참여한다면 누가 반기겠소?”
상황이 급박한 만큼 제갈선도 돌려 말하지 않았다.
“화룡문 역시 전신이 도룡회나 마찬가지 아니오. 도룡회는 역모의 세력과 결탁하여 조정을 상대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소. 순수한 무림 문파라고 자부한다 해도 누가 믿겠소?”
조운룡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정말 어이가 없군.”
“말조심하게. 여기는 정파의 명숙들이 모두 모인 자리 아닌가?”
정파의 명숙들이 앉은 자리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검은 도포를 입은 노도사는 공동파의 장로 진형자였다.
조운룡의 눈이 싸늘하게 굳었다.
“화룡문의 전신이 도룡회라고? 이백여 년 역사를 지닌 화룡문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정녕 모른다는 말이오?”
조운룡이 대파가 모인 곳을 노려보았다.
“으흠. 과거 화룡문이 곤륜파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긴 했지. 그렇다고 지금의 화룡문이 과거 화룡문과 동일하다고 누가 보겠는가?”
진형자가 말했다.
“하하하. 지난날 오랑캐를 물리치느라 화룡문이 앞장설 때는 들어 보지도 못한 문파가 이제는 대파가 되었군요.”
사실 그렇다.
과거 원을 물리칠 때 각 지역에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일어나 나섰다.
화룡문 또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앞장서 싸웠으나 이후 주원장에게 배신을 당하여 멸문의 위기에 몰린 바 있다.
그렇게 한바탕 무림이 소용돌이친 후 다시 흥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 시비를 걸러 온 것인가?”
조운룡이 도를 뽑더니 대청에 콱, 박았다.
“화룡문의 도는 한 번도 대의를 잊은 적이 없소! 나는 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천하비무대회에 출전할 것이오.”
진형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시 말하지만 화룡문이….”
그때.
“우리 곤륜이 인정하는데 누가 화룡문의 정당성을 따진다는 말인가?”
장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흰 도포를 입은 십여 명의 도인이 대청 앞 광장을 채운 인파를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가장 앞에 선 나이든 도인이 좌중을 보고 예를 취했다.
“곤륜파 장로 관해라고 하오. 동도 여러분을 뵙게 되어 반갑소.”
장내에 모인 명숙들이 웅성거렸다.
청해성에 있는 곤륜파는 워낙 거리가 멀어 중원에서 좀처럼 보기 어렵다. 게다가 수행을 중시하여 무림의 일에 어지간하여서는 간여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참여하지 못할 것이란 견해가 우세했는데 뜻밖에도 나타나 화룡문을 거드니 놀라웠던 것이다.
청해진인이 조운룡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화룡문은 곤륜에서 갈라져 나온 속가문파로 이번에 본산을 대신하여 참가할 것이오.”
곤륜파가 화룡문의 정당성을 보장하였으니 더 이상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양수가 앞으로 나왔다.
“천무방의 지난날 행보에 대한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기에 본방은 향후 호북을 벗어난 활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무방 무력대 또한 무림맹의 요청이 있을 때만 움직일 것입니다.”
천무방이 가진 바 힘을 내려놓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니 이 또한 반발하기 어려웠다.
모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늙은 거지 한 사람이 슬며시 대청으로 들어왔다.
“아, 오개 어르신이 오셨군요.”
오개는 기척도 없이 들어왔지만 몇몇 사람이 알아보고 일어나 예를 취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분분히 일어나 예를 취했다.
개방의 태상장로 오개는 나이로 보나 배분으로 보나 이 자리에서 어른이었다.
오개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호남은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여기는 한가하구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갈선이 물었다.
오개가 좌중을 돌아보며 클클, 웃으며 말했다.
“흑천맹에서 내분이 일어나 맹주 고선이 죽었소.”
오개의 말에 모두가 놀라면서도 안도하는 분위기가 일었다.
흑천맹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무림맹이 결성되면 곧바로 일전을 벌이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역시 개방의 소식은 정말 빠르군요.”
“흑도가 결국은 그렇지. 그들이 맹을 이룬다는 게 말이 되는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는데 오개가 혀를 찼다.
“이 사람들아.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오개가 구부정한 등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 아들 고장추가 광분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흑도의 다섯 문파를 직접 쓸어버렸네. 죽은 이들만 거의 일천 명에 달한다더군.”
“….”
“무슨 무공인지는 몰라도 묵빛 강기를 쏟아내면 막을 자가 없다더군. 그래서 묵영사신이라는 별호까지 얻었다지 아마.”
“흥! 그래 봐야 어린놈 아닙니까? 정히 걱정되시면 우리 점창파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점창파의 장로가 나섰다.
“흐흐흐. 자네 목이 구천광도보다 질기다면 그래도 되겠지.”
오개의 말에 점창파 장로가 입을 닫았다.
구천광도는 흑도의 거마로 십대고수에 버금간다는 인물이다. 악명을 떨친 지가 벌써 수십 년이다.
“고장추가 구천광도를 일도에 반토박 냈다더군.”
사람들은 입을 쩍 벌렸다.
구천광도를 일도에 죽인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하는 이가 오개가 아니라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 통에 흑도의 영웅으로 떠오르면서 그 휘하로 흑도 문파와 거마들이 속속 들어가고 있는 중이네. 이렇게 한가하게 노닥거릴 때가 아니라고.”
제갈선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서 논의를 마저 합시다.”
***
그날 밤.
무당장문 청무진인이 강소군을 찾아왔다.
“부르시면 갈 것인데 직접 오셨습니까?”
“용건이 있는 사람이 와야지. 진작 왔어야 했는데 늦은 셈이네.”
청무진인이 품에서 얄팍한 책자를 꺼내 건네주었다.
“사숙이 전해 달라 한 것이네.”
표지에 무극해(無極解)이라고 쓰여 있었다.
“무당의 경전 같은데 이렇게 외인에게 전해도 되는 것인지요?”
강소군이 의아해하며 받아들였다.
“그게… 본산의 경전은 아니고… 사숙께서 저술하신 것이네.”
청무진인이 떨떠름해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좀 망설이긴 했네. 사숙이 참오하여 얻으신 심득이라면 무당의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지.”
대개의 문파가 그럴 것이다.
“사숙께서 말씀하시기를 당대 무당에서 이를 이해할 사람이 없으니 자네에게 주었다가 나중에 받으라 했네.”
청무진인이 기대에 찬 눈으로 강소군을 보았다.
“기다려도 되겠는가?”
강소군은 현치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얻은 바가 있다면 당연히 돌려드려야죠.”
청무진인이 안심한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마디 더 전하셨네.”
“….”
“손에 피가 묻으면 닦으면 된다는 말씀을 꼭 전하라시더군.”
“…?”
전하면서도 청무진인은 머쓱해하였다.
너무 당연한 소리를 굳이 전하려니 민망한 것이다.
“사숙께서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네. 손에 묻은 피는 지울 수 있지만 피로 물든 마음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청무진인은 현치자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사숙이 한 말이니 모른다고 하면서도 노파심에서 자신의 생각을 더했다.
강소군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었다.
혈마라는 별호 때문일 것이다.
곧 청무진인이 화제를 돌렸다.
“이번 천하비무대회는 아무래도 좋게 끝나지 않을 것 같네.”
청무진인은 뭔가 더 말할 듯하다 입을 닫았다.
무당장문으로 도력이 남다른 인물이다. 대파의 장문인으로 직접 온 이는 청무진인뿐이다.
천기가 심상치 않아 자신이 직접 왔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잔칫상에 재를 뿌릴 수는 없었다.
무한은 무림맹 결성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였다.
무림맹이 출범하면 무림의 분쟁이 사라지고 정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싸여 있었다.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던가. 각별히 조심하게.”
청무진인이 돌려서 주의를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소군은 무극해를 펼쳐 보았다. 책자는 얇았다.
현치자의 심득은 물음으로 시작하였다.
「더할 수 없는 지경(至境)은 존재하는가? 더할 수 없는 지경을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함이 없는 지경이 있으니 이를 무극이라 한다.」
강소군이 무극해에 빠져들었다.
***
천하비무대회가 열리는 전날 밤.
무한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제갈선은 열흘간 후기지수쟁패지연을 열고 뒤이어 맹주 선출을 위한 천하고수지회를 열겠다고 선포하였다.
무림맹의 조직은 비밀에 붙여져 있으나 주요 직책을 맡을 고수들은 이미 인선이 끝났다고 했다.
후기지수쟁패지연은 무력대를 이끌 인재를 선발하기 위함이었고 이에 뜻있는 젊은이들은 피가 끓었다.
하기에 따라 무림맹 무력대의 대주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놓인 것이다.
대파와 세가는 물론이고 중소문파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문파의 인재들을 총동원하였다.
그 외 무림맹 무사들도 따로 공개모집을 하고 있어 그야말로 칼 한 번 잡아 봤다는 이는 모두 무한으로 모여들었다.
무림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다음 날부터 있을 천하비무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안주 삼아 격론을 벌였다.
강소군의 별원은 세상 밖의 세상처럼 그 모든 소란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었다.
‘어디를 갔을까?’
별원에서 나오는 연화심의 표정이 어두웠다.
시비는 저녁 무렵 다녀올 곳이 있다며 나갔다고 했다.
‘천황성이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
강소군의 무위를 알지만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으니 걱정이 됐다.
***
달이 환하다.
철권호는 말없이 산을 걸어 올랐다. 경공을 펼치지도 않은 채 천천히 발을 떼는데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다.
강소군이 뒤를 따라 걸었다.
얼마나 갔을까.
무한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오는 산 중턱.
철권호가 바위에 앉았다. 달빛이 내린 그의 얼굴은 강인함 그 자체였다.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 전음이 왔다.
-잠깐 볼 수 있겠나.
그러더니 삼도문 장원을 나와 뒷산 기슭으로 오른 것이다.
철권호가 불야성을 이룬 무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평생 강호를 떠돌며 정과 협을 지키는 무림맹이 있기를 바랐네. 막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이뤄지려 하니 오히려 마음이 복잡해지는군.”
“….”
“대파와 세가에서는 나를 지지하지 않지. 하지만 나는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중소문파에서 맹주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네.”
철권호가 강소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달빛을 받은 철권호의 눈빛이 강렬했다.
“자네가 나를 지지해 줄 수 있겠나?”
강소군은 철권호가 자신을 불러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뭔가 오해하신 것 같군요. 나는 천하비무대회나 무림맹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잘 모르는군. 무림인들 사이에서 자네는 신비에 쌓인 고수이지. 단신으로 천무방의 무력대를 궤멸시킨 절대고수라고 추앙을 받고 있다는 걸 모르는가?”
“뜻밖이군요.”
강소군은 철권호가 무림맹주의 자리에 집착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