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71화 (17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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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의견을 제시하는 것 같았으나 구양조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으음.’

구연강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두 형제는 구연강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구연강은 어쩌면 이미 자신의 자리가 사라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누워 있는 사이 천무방의 조직은 여러 가지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조배극과 같은 개파공신들이 상당수 밀려났다.

구연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수다. 나는 잠시 폐관수련에 든 것으로 하자꾸나.”

구연강이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완전히 물러났다고 보기에는 그의 어조가 미묘했다.

***

천하비무대회를 앞두고 무한이 미어터졌다.

천하의 정파 무림인들이 일시에 몰리니 객잔은 만원인지라 민가에까지 투숙하는 일이 벌어졌다.

무한 사람들은 무림맹이 들어선다니 적극 협조하였다.

무림맹이 들어서면 그만큼 안전해지고 번성하게 될 것이란 기대와 희망이 무한에 넘쳤다.

제갈선은 삼도문이 천하비무대회 장소를 제공한다고 공포하였다.

삼도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렸으나 대부분 대문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삼도문의 장원 역시 규모가 작지 않으나 워낙 많은 이들이 몰렸다.

세가와 대파의 수장들이 모두 삼도문으로 왔다. 그러다 보니 제법 이름이 있는 문파의 수장도 간신히 객방 하나 얻을 정도였다.

제갈선은 너른 연무장에 짓고 있는 비무대를 보고 있었다.

청수한 중년 문사의 풍모에 지나는 이들이 모두 경의를 표했다.

제갈선은 한 사람 한 사람 가벼이 여기지 않고 담담하게 마주 예를 취했다.

제갈선은 세가연합을 대표하여 천하비무대회와 무림맹 창설을 주관하고 있다.

그러니 모두가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무림맹 창설에 세가연합의 목소리가 큰 것은 자금 때문이다.

각 세가는 적잖은 기금을 내놨다.

대파들이 대부분 불도 수행 문파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군소 문파도 여력 있는 문파는 앞다퉈 자금을 내고 있다. 당연히 무림맹 이후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제갈선은 어깨가 무거웠다. 이번 무림맹 창설을 순탄하게 이끌어냄으로써 제갈세가의 명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고수들이 겨루는 곳이오. 최대한 튼튼하게 지어야 하오.”

의례적인 당부를 하고 있는 제갈선에게 심복이 다가왔다.

“무당파가 당도했습니다. 청무 장문인이 직접 오셨습니다.”

“이로써 대파는 대부분 온 것인가?”

소림은 장문인이 직접 오지 않았지만 장경각주 무오대사가 와 있다.

제갈선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대파와 세가가 모두 모였다. 그들과 회합이 일차전이다.

각 파와 집안의 입장이 미묘하게 다르니만큼 결론을 끌어내는 게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일차전이 끝나면 세가와 대파의 의견을 가지고 기타 문파들과 대회합을 가지고 최종 결론을 이뤄내야 한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나 명분과 대의를 중시하는 정파이니만큼 여러 사람의 중론도 무시할 수 없다.

무림 사상 첫 무림맹의 탄생을 지휘하는 입장이니만큼 제갈선은 신중하게 처신을 했다.

“소천은 돌아왔나?”

제갈소천.

제갈가의 대공자를 세가로 보낸 지 꽤 됐다.

철권호가 등장할 때쯤 세가에서 전해온 밀지.

「제갈가는 철권호를 맹주로 추대한다.」

제갈세가 가주이자 친형인 제갈명과 협의한 것과는 다른 명이었다.

제갈세가는 원래 남궁악을 밀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봉황수와의 일전으로 불구가 된 뒤 고심을 한 끝에 모용세가의 고수 모용백로 후보를 바꿨다.

제갈선은 일단 철권호를 의천맹주로 추대하였으나 본가의 뜻일 확인하기 위해 제갈소천을 직접 세가로 보냈다.

세가연합이 아닌 재야의 고수를 추대하라는 명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조카 제갈소천이 모습이 보였다.

“왔구나.”

제갈선이 제갈소천과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갔다.

“경계를 단단히 하여라.”

사방 경계를 세우고도 전음으로 물었다.

-가주의 명이 확실한 것이냐?

제갈소천.

명석한 두뇌와 고절한 무공으로 후기지수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는 드는 재목이다.

-할아버지의 명이었습니다.

-뭐라고? 아버님이?

제갈선이 의외라는 듯 놀랐다.

-가주님께서 세가연합에서 맹주가 나와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는데 할아버님이 밀어붙이신 듯합니다.

-으음. 이유가 뭐라더냐?

-천하 모든 무림인을 규합하려면 철권호가 적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제갈선도 그 정도는 안다. 그래서 의천맹주로 쉽게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가가 움직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정말 강호 정의를 위해서만 움직인다고 하면 듣는 이들이 코웃음 칠 것이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주가 동의한 마당에 어떻게 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제갈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셈이다.

이제 남은 건 세가연합과 대파의 수장들을 설득하는 것뿐이다.

***

“잘 썼소. 하지만 나와 맞지는 않는 듯하오.”

중랑이 무애검을 내밀었다.

강소군이나 중랑이나 아직 안색이 창백하다.

강소군이 검을 받아 챙겼다.

중랑은 바로 가지 않고 다탁에 앉았다.

“….”

강소군이 화로의 숯불을 지피고 찻주전자를 올려놓았다.

다구를 다루는 강소군의 손길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기품이 배어 있다.

저 손으로 사람을 반쪽 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중랑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복수를 위해 어려서부터 험하게 단련한 몸이다. 그의 손 역시 울퉁불퉁하다.

“고마웠네.”

강소군이 잔을 건네며 말했다.

중랑이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야말로 고맙소.”

중랑이 짤막하게 답하고는 차를 마셨다.

그는 차보다는 술이 더 마시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다.

연화심은 내상이 회복될 때까지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말라고 당부하며 억지로 약속을 하게 하였다.

“….”

강소군은 오히려 고맙다는 중랑의 말에 의아해하며 흘깃 중랑을 보았다.

중랑은 뭔가 결심을 한듯했다.

“나는 당신이 화심 옆에 있는 게 마뜩잖소.”

“….”

뜻하지 않게 연화심의 이야기가 나오자 강소군은 당황하였다.

그는 며칠 전 본 연화심의 눈물을 떠올렸다.

실제였는지 그의 환상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강소군의 시선이 기울어 찻잔으로 향했다. 비취색 잔에 황색 찻물이 고요하다.

“당신에게서 짙은 피 냄새가 났소. 첫인상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중랑은 백륭사 나루터에서 처음 강소군을 만났다. 그는 그날 구양운과 천무방 응천대를 무더기로 죽이는 강소군의 모습을 봤다.

“낭인 생활을 하며 수없이 싸움에 참가했소. 하지만 그렇게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는 건 처음 봤소.”

“….”

“당신은 위험한 사람이오. 옆에 있는 자 또한 위험할 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랑이 말하지 않아도 그 역시 안다.

이번에도 천황성 고수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도와주러 왔던 이들 가운데 몇몇은 죽었을 것이다.

“아니, 내가 원한 답은 그게 아니오.”

중랑의 목소리가 단호하였다.

강소군의 시선이 중랑에게 향했다. 중랑이 정면으로 주시하니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강소군은 중랑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중랑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복수를 위해 칼을 쥐었소. 그런데 복수를 하고 나서도 여전히 누군가와 싸우고 생사를 넘나들 줄은 몰랐지 뭐요.”

“….”

“요즘은 검을 쥔 자의 숙명이라 받아들이고 있소.”

중랑은 대정무각의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노이칠 등은 중랑에게 일각주 자리를 맡기고 자신들은 점차 뒤로 물러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공동전인으로 삼은 것이다.

중랑은 연화심을 옆에서 지켜주겠다는 생각에 답을 미뤄 왔다.

그런데 혼자서 지켜주기에는 연화심이 너무 커 버렸다.

삼도문의 문주.

일파의 문주로 서고자 하는 그녀에게 다가올 적들은 개개의 무인이 아닐 것이다.

그녀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려면 세가 필요했다.

당장 약소 문파의 문주로 장원을 빼앗기다시피 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연화심은 중랑에게 강소군한테는 그 내막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중랑 역시 강소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힘이 약해서야.’

구양수가 농간을 부리기는 했으나 결국 힘의 논리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중랑이 시선을 돌려 다시 강소군을 주시했다.

“화심의 마음이 당신에게 있소.”

“….”

“처음부터, 아니 당신을 찾아가기 전부터 그랬소.”

강소군은 백륭사에서 봤던 연화심의 눈빛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를 어릴 적부터 지켜보았소. 그런데 당신을 찾아갈 때처럼 막무가내인 적은 없었소. 그때는 삼도문을 위해서라고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드오. 그런데….”

“중랑.”

중랑이 자꾸 말을 돌리자 강소군이 중간에서 자르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중랑은 연화심 곁에 있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강소군의 마음이 확실치도 않은데 지레짐작으로 남녀 간의 일에 끼어든다는 게 온당치 않다고 여긴 것이다.

중랑이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당신 자신을 조금 더 아껴 달라는 것이오.”

“나를?”

“당신이 죽으면 그녀의 삶도 불행해질 테니까. 당신도 알고 있지 않소?”

중랑이 다시 강소군과 시선을 마주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약조라도 하라는 듯한 눈빛이다.

강소군이 얽힌 시선을 풀어 창밖을 보았다.

“검을 쥔 자의 숙명이라고 했나? 나도 자네도, 그리고 그녀도 검을 쥔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네.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것도, 스스로를 아낀다는 것도 부질없는 약속이지.”

“….”

“한때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지.”

부모님, 장선백, 장영영, 마운산 등의 얼굴이 스쳐 갔다.

“그런데 새로이 다가오는 인연도 있더군.”

연화심, 중랑, 노이칠, 조운룡, 초씨 남매와 진연, 진운 형제들까지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무총에서 나온 그는 잃은 것들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혀 떠돌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

천황성은 부모님에 이어 진운초를 암살하였다. 그리고 이제 자신을 노리고 있다.

그게 자신만을 향한 칼끝일까? 이미 그의 주위 모든 이들이 천황성의 칼끝에 선 셈이다.

천황성이 무너지지 않는 한 위협은 계속될 것이다.

“나를 아끼라고 했나?”

강소군이 차분한 시선으로 중랑을 보았다.

“고맙군. 그리고… 자네도 그러기를 바라겠네.”

중랑은 끝내 마음속에 품고 온 말을 하지 못했다.

연화심의 마음을 확인한 이상 강소군의 마음도 다짐을 받고 싶었던 중랑이다.

그러나 사실 부모라고 해도 강요하기 어려운 일이다.

“화심의 마음이 당신에게 있다는 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오.”

중랑은 불쑥 한마디 하고는 차를 벌컥 마셨다.

그는 겉보기와 달리 투박한 사내였다.

“차나 마시게.”

강소군이 빈 잔에 차를 따랐다.

***

제갈선이 강소군을 찾아왔다.

“진작부터 만나고 싶었는데 좀 늦었소.”

강소군은 자신의 별원 거처에서 줄곧 머물렀기에 외부인을 만날 일이 없었다.

“강호의 소문이 종종 와전된다더니 과연 그런 것 같구려.”

제갈선이 차분한 강소군을 보며 말했다.

눈앞에 있는 명문세가의 귀공자가 강호를 진동시킨 혈마라는 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요?”

강소군은 제갈선이 자신을 찾아올 일이 뭐가 있는가 생각해 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강소군은 천무방과 남궁세가 외에 무림과 엮인 일이 없다.

제갈선이 무림맹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무림맹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간여할 생각도 없었다.

“천황성에 대해 듣고 싶어서 찾아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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