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70화 (170/250)

170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경기가 터져 나갔다. 두 사람 주위 땅이 흔들리고 연무장 청석이 갈라졌다.

“…!”

상황을 쉽게 생각했던 등 노사는 크게 놀랐다. 쌍장에 실린 자신의 내공을 고장추가 감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런 괴물 같은….’

말이 되지 않았다. 평생에 걸쳐 쌓아 온 그의 내공이 고작 서른에 불과한 고장추와 백중지세를 이루다니.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우아아악!”

고장추가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확인한 그는 눈이 뒤집어졌다.

고장추는 원래 대도를 썼다. 그런데 도를 뽑을 생각도 없이 미친 듯이 권을 휘둘렀다.

-퍼퍼퍼퍽!

연달아 날아드는 권을 등 노사는 맞받아칠 수가 없었다.

재빨리 양손을 나뉘어 펼치며 그저 고장추의 권을 쳐내기 바빴다.

‘이런 멧돼지 같은 놈이?’

권을 밀어내며 연달아 뒷걸음질 치는 등 노사의 눈에서 흉흉한 살기가 쏟아졌다.

한번 기세를 빼앗기자 좀처럼 반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고장추의 권에 실린 묵영강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콰쾅!

흑천전에 변고가 생기자 수많은 무인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고장추와 태상장로가 싸우는 걸 보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주위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그저 그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절대고수 둘이 싸우며 분출하는 경력이 스치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죽거나 최소한 중상을 입을 터였다.

“끝내자!”

등 노사는 미친 듯이 달려드는 고장추의 권세를 어느 정도 해소하자 고함을 질렀다.

-쾅!

연달아 권을 펼친 고장추가 거친 호흡을 돌리는 짧은 순간, 벼락같이 경기를 쏟아내고 일 장을 물러났다.

곧이어 양손을 휘저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무척 빠른 동작이었다.

등 노사의 손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허공에 수영이 가득 피어났다.

손 그림자 하나하나에 암경이 실려 있었다.

맞받아치는 순간 상대의 내부로 침투하여 기맥을 끊는 독한 수법이었다.

고장추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옥죄어 오는 수영을 향해 거침없이 권을 내질렀다.

-쾅! 콰콰쾅! 쾅!

고장추의 묵영강기와 등 노사의 암경이 부딪치며 연달아 폭음이 터졌다.

“크음.”

등 노사가 서너 걸음 물러났다.

오래 묵은 생강이 맵다고 하나 땅을 뚫고 새로이 나는 싹의 기세 또한 맹렬했다.

고장추는 묵영강기를 완성하며 절대지경에 막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분출하는 힘이 분노와 결합하여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제정신이 아니군. 동귀어진이라도 할 참인가?”

등 노사는 고장추가 자신의 진원지기까지 모두 쏟아내고 있음을 알았다.

진원지기는 내공과 달라서 이를 회복하려면 꽤 많은 시일이 걸린다. 그런데 고장추는 뒷일을 생각지 않고 마구 지르는 것이다.

사실 고장추는 지금 아무 생각이 없었다.

분노가 폭발한 뒤 묵영신공의 기운이 전신을 지배하며 이성을 상실하였다.

그저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등 노사는 힘에서 밀리자 일단 도주할 생각을 했다.

벼락같이 쌍장을 후려쳤다.

-쾅!

고장추가 가볍게 양팔을 교차하여 막았다.

순간, 등 노사가 신형을 날렸다.

흑천맹의 무인들이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으나 감히 그를 막을 생각을 못 했다.

그때.

흑희 조비추가 허공을 날아오며 솟구쳐 오르는 등 노사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고장추에게 거의 대부분의 신경을 쏟아붓고 있던 등 노사가 퍼뜩 놀라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쾅!

조비추는 등 노사의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가더니 그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엇!”

조비추를 튕겨내는 사이 어느새 고장추가 다가와 등 노사의 발목을 잡았다.

“크아앗!”

고장추는 등 노사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청석에 패대기쳤다.

등 노사가 다른 발로 고장추의 머리를 치려 하였으나 자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쾅!

-콰지직!

등 노사는 전신이 부서지는 충격에 그만 입을 쩍 벌렸다.

단순무식한 수였으나 치명적이기도 했다. 호신강기로 방비하기는 했으나 충격을 모두 해소할 수는 없었다.

“크아아아.”

고장추가 등 노사의 무릎을 발로 내리찍었다.

-빠각!

“으악!”

무릎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고장추는 발이 이번에는 복부를 내리찍었다.

“크흡!”

등 노사의 몸이 새우처럼 휘었다. 고장추는 미친 듯이 등 노사를 발로 내리찍었다.

등 노사의 호신강기는 어느새 깨어지고 전신의 뼈가 산산조각이 났다.

“커윽!”

등 노사는 입으로 핏덩이를 연달아 게워냈다.

주위에서 지켜본 무인들은 끔찍한 광경에 절로 몸이 떨렸다.

그들 모두 흑도의 인물들이었지만 이리 잔인한 광경은 좀처럼 보기 드물었다.

사람을 발로 짓밟아 죽이다니.

“사형!”

어느새 다시 달려온 조비추가 다가와 고장추를 불렀다.

“사형! 정신 차려요!”

조비추가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고장추가 멈췄다.

그가 조비추를 돌아봤다. 그의 눈은 새까맣게 빛났다. 마치 흑요석을 박아 놓은 듯했다.

“사형? 눈이?”

고장추는 묵영신공을 대성하자마자 전력으로 펼치며 완전히 화경으로 접어들었다.

“….”

고장추의 눈이 천천히 회복되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이놈이… 이놈이….”

고장추가 육포가 되다시피 한 등 노사를 보았다.

“크르르….”

등 노사는 마지막 숨을 거두고 있었다.

“천황성!”

고장추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하늘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기다려라! 네놈들 모두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이다!”

고장추의 포효에 모여든 흑천맹의 무인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러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

구연강은 자신의 거처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양수는 들어서다 구연강과 눈이 마주치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처박았다.

“아, 아버님….”

대담한 구양수이지만 아버지 구연강만큼은 두려웠다. 애초에 구양수의 계획에서 구연강이 되살아나는 일은 없었다.

구연강이 구양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거기서 뭐 하느냐? 이리 앉아라.”

뜻밖의 말에 구양수가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구연강 양옆으로 의자들이 있는데 구양조가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구양조가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이 쾌차하신 걸 보고 양수가 놀란 모양입니다.”

“크흐흐. 놀랐겠지.”

구연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이 말씀하시는데 어서 와서 앉지 않고 뭘 하느냐?”

구양수의 내심을 알 리 없는 구양조가 손짓을 하였다.

구양수가 주춤주춤 일어나 빈자리에 앉았다.

“네 형에게 들었다. 나를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돌봤다고?”

구양수는 환생단을 복용시키기 위해 자신이 직접 구연강을 돌봤다.

“양수가 아침저녁으로 아버님을 찾아 직접 약을 드렸지요.”

“흐흐흐. 그랬구나.”

구연강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니 구양수는 등골이 서늘했다.

“아버님이 쾌차하셨으니 우리 집안의 우환은 이제 끝난 모양입니다.”

구양조가 말했다.

“곧 손자를 보실 겁니다. 구씨 가문의 장손이 태어날 테니까요.”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구연강의 얼굴에 화기가 돌았다.

“그래, 그래….”

구연강이 물끄러미 큰아들을 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자식들을 잘못 본 모양이구나.’

구연강은 어쩌면 큰아들도 구양수가 하는 짓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구양수에게 당한 뒤 깨달은 것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아들들이 실상은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이제 와 돌아보니 막내아들 구양운은 성품이 경박했던 것 같다.

마씨 부인과 조개량이 끊임없이 칭찬했던 것을 감해서 보면 확실히 그랬다.

연화심을 쫓아간 일만 해도 그렇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했던 구양수가 의붓어미에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속에 칼을 품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러니 큰아들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자신할 수 없었다.

구연강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구양수에 의해 전신이 마비되었을 때 그는 벽을 넘어섰다.

그는 자신이 생사경의 관문에 한 발 걸쳤음을 느끼고 있다.

그랬기에 다시 일어나면 천무방을 물려주고 뒤로 물러나 무공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깨어나니 생각이 바뀐다. 그렇게 물러나기에 그는 아직 팔팔한 장년이다.

모든 걸 좌지우지했던 그의 성품은 생사경에 이르러서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이게 나의 한계인가?’

알면서도 떨치지 못하는 습(習)을 절감하였다.

구연강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너희가 그간 나를 대신하여 천무방을 잘 이끌었더구나. 수고 많았다. 특히 양수 네가 형을 도와 많은 일을 했다고 들었다.”

“….”

구양수는 내심 놀랐다. 아버지 구연강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릇이 컸다.

구연강은 천무방으로 오는 마차에서 마비된 채 구양수의 고백을 들었다.

자신을 해하려 한 동기가 마씨 부인에 대한 원한 때문임을 알았다.

행동은 괘씸했지만 자신의 어미를 위한 복수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구연강은 강자존을 신념으로 삼고 있는 무인이다.

아들 구양수가 뜻밖에도 재주가 있음을 알았는데 내칠 생각은 없었다.

그게 구연강이 이제껏 천무방을 키워 온 방식이기도 했다.

“그동안 무림에 많은 변화가 있었더군. 무림맹과 흑천맹. 게다가 천황성까지. 천하사패가 다시 짜이는구나.”

구연강은 말을 하면서 아들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말은 천무방이 다른 세력과 함께 다시 천하사패의 한 축으로 나서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자신이 그리하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구연강이 큰아들에게 물었다.

“지금은 잠시 관망하며 힘을 길러야 할 때인 듯합니다.”

역시나 신중한 구양조였다.

“다른 세력이 자리 잡으면 그때는 더욱 입지가 좁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격랑에 배를 띄우는 건 위험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계속하여 신중론을 펼치는 구양조. 그러나 구연강은 예전처럼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구양조가 자신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 여기고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동안 고지식하고 순후하다 여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이를 의심하는 구연강이다. 심지어 군사직을 맡긴 조개량마저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양조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세인가 아니면 진심인가.’

구연강은 갈수록 큰아들을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구연강이 이번에는 구양수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구양수는 아버지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는 천하사패 체제는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

“이번에 천하비무대회에 형님이 출전하여 무림맹주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

구양조가 흠칫, 놀랐다.

구연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그가 생각지 못한 수였다.

“양조를 무림맹주에? 세가연합과 대파가 받아들이겠느냐?”

“제가 이번에 무한에 가서 그 기반을 마련해 놨습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구연강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천무방은 누가 맡는다는 것이냐?”

“아버님이 계시잖습니까?”

“그들은 나를 두려워한다. 당연히 양조를 무림맹주의 자리에 앉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님은 주화입마에 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 알도록 놔두고 형님 말대로 대외활동은 축소한 채 내실을 다지면 됩니다.”

구연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구양수의 말은 자신이 회복된 사실을 감추고 뒷전에 물러나 있으라는 뜻이었다.

구연강은 일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조직이라는 건 살아 있는 생물과 같다. 한번 뒤로 물러나면 머릿속에서 잊혀 다시 권력을 잡기 쉽지 않다.

모든 황제가 죽기 직전까지 양위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때.

구양조가 담담하게 말했다.

“양수의 생각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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