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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려 했는데 어쩌다 살리게 됐나 모르겠네요.”
강소군의 앞에 선 당우화는 거침없었다.
강소군과 불취가 절벽에서 겨룰 때 당장이라도 날아가 거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살아 있소?”
“네. 살아 있기는 한데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당신은 이리 멀쩡한데.”
당우화가 심통이 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중 약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조만간 당도하실 거예요.”
당종은 여전히 불취를 치료하지 않았다.
동약사의 소식에 당우화가 반색했다가 돌연 한숨을 쉬었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당우화가 강소군과 연화심을 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참 보기 좋군요.”
“예?”
느닷없는 말에 연화심이 안색을 붉혔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은 깨어나면… 나를 떠날 거예요.”
급기야 당우화는 눈물까지 뚝뚝, 흘렸다.
불취는 그녀를 꺼렸다. 집까지 뛰쳐나왔건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였다.
중상을 입은 불취를 돌본 지난 한 달여간은 애가 타면서도 달콤한 시간이었다.
강소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뭐가요?”
“그가 당신을 보던 눈빛은 그렇지 않던데?”
강소군은 불취와 있을 때 그가 절벽 중간에 있는 노란 꽃을 수시로 보았던 걸 기억하고 있다.
그 눈에 애틋함이 어려 있었다.
적을 앞에 두고 그런 시선이라니. 특이하여 인상 깊게 남았다.
지금 와 생각하니 그때 불취는 당우화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말 못됐어요.”
당우화가 또다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 년이 넘도록 기다렸는데 한 번도 만나 주지 않았어요.”
“아니, 왜요?”
연화심이 놀라 물었다.
“모르죠.”
당우화가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한 번도 나와 보지 않았어요.”
“당신이 찾아가서 따지면 되잖아요.”
“거기는 갈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진이 펼쳐져 있는 것 같았어요.”
당우화가 기다리기만 했던 건 아니다.
몇 번을 불취가 있는 계곡으로 들어갔는데 번번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들어가서 헤매다 보면 다시 왔던 길로 나오더라고요.”
연화심이 신기해하였다.
“진이라고요? 정말 그런 진이 있다는 말이에요?”
“늘 운무가 펼쳐진 계곡이에요. 일 년 내내 그럴 수가 없죠. 진이 아니라면요.”
강소군이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거기가 어디요?”
“그건 왜 묻는 거죠?”
“그는 천황성에서 왔소. 아마 거기가 천황성의 본거지일 것이오.”
***
-두두두두.
말을 달리는 구양수가 연신 채찍을 휘둘렀다.
마음이 급했다.
‘제기랄. 마비환이 아니라 환생단이었어?’
구양수는 제법 뛰어난 은신술을 지니고 있었다.
당종과 연화심 등이 나누는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
그러다 자기가 요긴하게 써먹은 마비환이 실은 사람을 살리는 환생단이라는 말에 기겁을 하였다.
동시에 아버지 구연강이 왜 죽지 않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환생단이라면 지난날 입었던 부상도 치유됐을 것이다.
시비에게 때맞춰 환생단을 복용시키라고 지시해 놨다. 그러나 구연강이 공력을 회복하면 스스로 마비를 풀 수도 있을지 모른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절대고수의 세계다.
구연강이 깨어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구양수는 자신의 형 구양조를 천하비무대회에 출전시켜 무림맹주의 위에 올릴 생각이다.
그런데 구연강이 깨어나면 또다시 무력으로 천하를 제패하려 들 게 분명했다.
그 전에 자기를 해치려 한 아들 구양수부터 죽일지도 몰랐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달려 이틀 만에 천무방에 당도하였다.
멀리 천무방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이공자님?”
수문위사가 구양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였다.
구양수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말을 달려 구연강의 거처로 달려갔다.
평소 적적하던 거처에 무사들이 이 배치되어 있었다.
구양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일인가? 방주님 신상에….”
무사 하나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경사가 났습니다. 방주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구양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즉시 뒤로 돌아 달아나려 했다.
그때.
전각안에서 구연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양수, 왔느냐?”
구양수는 석상이라도 된 듯 온몸이 굳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뭐 하고 있느냐?”
구양수의 얼굴이 꺼멓게 죽었다.
전각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형 구양조가 나왔다.
“양수야, 아버님이 쾌차하셨다. 부르시는데 들어오지 않고 뭐 하느냐?”
구양수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방이 호위무사들이다. 도주할 방도가 없었다.
***
천황성 조천각.
공손 노야의 집무실이다.
공손 노야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운해 너머 푸른 하늘에 태양이 빛났다.
하늘은 맑았지만 공손 노야의 마음은 잔잔한 분노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공손 노야는 최근 들어 몇가지 일이 예상을 벗어난 바람에 심기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일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다행이 이번에는 탓할 놈이 있다.
“철권호, 그자가 끼어들었다는 말이지?”
“자신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까지 하였습니다.”
공손 노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제 가운데 둘이나 가고 군웅각 고수 열 명을 보냈는데 절반이 죽었다.
편제는 중상까지 입었다.
‘그놈이 그리 대단했나?’
강소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본래 강부는 문가였으니 무공을 익혔으면 얼마나 익혔겠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쌍렵을 죽이더니 군웅각의 고수들을 잇달아 격파하였다.
“대체 창제는 어디 있는 거냐?”
편제와 같이 보낸 창제는 홀연 사라졌다.
천재라고 자부하는 공손 노야도 창제가 강소군이 싸우는 모습을 보다 생사벽을 넘을 수 있는 심득을 얻어 은신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공손 노야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강소군도 강소군이지만 천하비무대회가 반달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철권호가 뜻하지 않게 천황성의 일을 방해하고 심지어 경고를 해 왔다.
‘건방진….’
일인지하 만인지상.
공손 노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철권호의 성품이 무척 강직하여 거슬리기는 했다.
‘그런 자가 조왕의 명은 순순히 듣는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손 노야는 철권호를 봤을 때 단순한 조왕의 식객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조왕은 그런 호한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공손 노야가 심복에게 일렀다.
“사람을 보내 조왕과 철권호의 관계를 알아봐라.”
심복이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공손 노야가 벽에 걸린 지도를 향해 걸어갔다.
‘흑천맹은 등 노사가 장악할 것이고 무림맹은 이미 철권호가 장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몇몇 거슬리는 놈만 제거하고 다시 성문을 닫으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하늘 밖의 하늘.
천외천의 존재로 천황성은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대정무각이 귀찮게 뒤를 쫓고 있지만 연결고리를 모두 끊어 놨다.
예전처럼 엉뚱한 곳을 뒤지며 허송세월하다 사라질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라질 하찮은 존재들.’
공손 노야의 시선이 옆창을 통해 멀리 보이는 천주전으로 향했다.
‘천주가 대법을 완성하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리라.’
그때.
전서구 하나가 날아들었다.
공손 노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직접 다루는 전서구로 아주 긴급할 때만 쓰는 것이다.
요즘 자꾸 일이 틀어지니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손 노야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비둘기 다리에 매달린 전서통에서 돌돌 만 종이를 꺼내 펼쳤다.
다행이 별일이 아니다.
등 노사가 흑천맹주 고선을 제거하고 다른 자를 내세우기로 했다는 전언이다.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공손 노야가 손바닥으로 종이를 비볐다.
삼매진화가 일어나며 종이가 가루로 흩어져 날렸다.
***
밤새 달려온 고장추가 내성을 지나 곧바로 흑천전으로 갔다.
“맹주님 계시냐?”
흑천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을 지키는 수문위사에게 물었다.
흑천전 주위는 경계가 삼엄하다.
“예. 안에 계십니다.”
흑천전은 흑천맹 내성 안에 있는 커다란 장원 한가운데 있다.
“…!”
고장추가 흑천전 앞 넓은 광장으로 들어서다 문득 멈춰 섰다.
사위가 조용하다.
평소 호위무사들이 사방을 지켰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 고장추의 눈에 벽에 기대어 쓰러진 호위무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제기랄!”
고장추가 이를 부드득 갈고 흑천전으로 몸을 날렸다.
-쾅!
흑천전 커다란 문이 박살이 났다.
사방 창문이 닫혀 어두운 대청에 빛이 들었다.
빛이 있는 곳이 밝으니 어둠이 더욱 짙었다.
그러나 절대지경에 든 고장추의 시선은 대청 안을 훤히 꿰뚫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흑천전 안쪽에 맹주 고선의 집무실이 있다.
고장추가 집무실 쪽으로 가는데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흑천맹의 태상장로 귀선, 아니 등 노사였다.
등 노사가 예상 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의발을 만나지 못했나?”
고장추의 눈에 짙은 묵기가 피어올랐다.
심상치 않은 고장추의 기세에 등 노사가 흠칫, 하였다.
“귀선, 아니 등 노사라고 했나? 맹주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
등 노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등 노사라고 부른다는 건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왔다는 뜻이다.
“귀찮게 됐군. 어떻게 알았느냐?”
“다시 묻겠다. 맹주님은 안에 계시나?”
등 노사는 대답을 하지 않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네놈이 훼방을 놓는구나.”
고장추의 신형이 휙, 사라졌다.
등 노사의 눈이 움찔, 하였다. 엄청난 기운이 그를 덮쳐온 것이다.
“헉!”
가볍게 쳐내려던 등 노사가 재빨리 방향을 바꿔 옆 창을 부수고 나갔다.
고장추가 쏟아낸 일권에 실린 경력이 심상치 않은 걸 깨달은 것이다.
고장추는 등 노사를 쫓지 않고 고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고선은 자신의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아버님!”
고장추가 크게 놀라 부르짓는 소리가 흑천전을 흔들었다.
고선의 등에 비수가 꽂혀 있었다.
등 노사는 고선을 암습한 뒤 무림맹의 자객이 한 짓으로 위장을 하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현장에서 들키고 말았다.
흑천전에서 고성이 터지자 바깥에 있던 무사들이 몰려들었다.
“등 노사, 이 새끼!”
고장추는 그대로 벽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등 노사는 연무장 한가운데서 기다리고 있었다.
급습을 받아 피하긴 했지만 고장추 하나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일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고장추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했다.
‘흑도에서 맹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왕왕 벌어지는 일 아닌가.’
고장추를 죽이고 고씨 부자가 전횡을 하기에 자신이 나섰다고 하면 그만이다.
고씨 부자가 너무 자기들 뜻대로 맹을 운용한다고 은근히 불만을 가지는 자들도 꽤 있었으니 무난하게 넘어갈 것이다.
“헐헐헐. 사람을 보냈으면 알아서 죽지 왜 여기까지 와서 굳이 노부가 손을 쓰게 만드는 것이냐?”
등 노사가 귀찮다는 듯 내뱉고는 뒷짐을 지고 옆으로 서서히 발을 떼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한가로운 걸음걸이였다.
고장추의 눈은 이제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그 눈을 본 등 노사는 내심 경각심을 끌어 올렸다.
‘아무래도 한 수가 있는 모양이군. 제 아비보다 뛰어나다니.’
-쾅!
고장추가 땅을 박차자 지축이 흔들리는 것만 같은 폭음이 일었다.
고장추의 오른손에서 거대한 묵빛 강기가 어렸다.
등 노사가 뒷짐 진 손을 풀어 그대로 쌍장을 내밀었다.
가볍게 내민 듯했지만 실은 그의 모든 공력이 깃들어 있는 장이었다.
부드러운 장세만 보고 가볍게 여기다 죽은 고수가 한둘이 아니다.
고장추의 권과 등 노사의 쌍장이 마침내 부딪쳤다.
-쾅! 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