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68화 (168/250)

168

홍의발은 조개량의 비참한 죽음을 봤다.

공손 노야가 자신에게 충성을 요구했으나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공손 노야는 자신 외에 머리 쓰는 책사를 두지 않는 편협한 자라는 걸 홍의발은 알고 있다.

천황성이라는 신비한 조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홍의발은 다분히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공손 노야처럼 인적이 드문 장원에서 탈속한 척 구는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는 머리 회전은 정말 빨랐다. 그랬기에 조개량이 그를 곁에 두었던 것이다.

-털썩!

홍의발이 즉시 무릎을 꿇었다.

고장추가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홍의발을 내려다보았다.

“귀선의 제자 아니시오? 왜 이러시는 거요?”

“나는 귀선의 제자가 아닙니다. 귀선 또한 알려진 흑도의 은거 고인이 아니고요.”

“…!”

“맹주님께서 위험합니다. 귀선이 맹주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뭐라고!”

고장추가 두 눈을 부릅떴다.

등 노사는 고선과 고장추가 정파와의 일전을 빌미로 십이지대를 제거하려 하자 결단을 내렸다.

껄끄럽게 구는 고씨 부자를 제거하고 다른 이를 흑천맹주로 세울 계획을 짠 것이다.

홍의발이 온 것은 십이지대를 이용해 고장추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등 노사는 어렵지 않게 고장추를 제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홍의발이란 자를 너무 간단히 보았다.

홍의발은 고씨 부자가 십이지대를 경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공손 노야나 등 노사 또한 십이지대를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도 안다.

홍의발은 오면서 따져 보고는 고장추를 죽이기 위해 십이지대의 상당수가 희생되리라는 계산을 얻었다.

‘어떻게 키운 무력인데.’

조개량이 비밀리에 십이지대를 키울 때 중간에서 연락을 담당했던 이가 홍의발이다.

그가 십이지대에 애착을 가지는 건 자신의 생존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십이지대가 사라지면 홍의발이라는 존재는 천황성에서 쓸모가 없다.

그야말로 끈 떨어진 신세가 되는 것이다.

공손 노야의 수발이나 들다가 어느 날 목이 떨어질지도 모를 비루한 삶으로 전락하고 말 터였다.

홍의발은 고선이나 고장추가 예상외의 고수라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오늘 고장추를 보니 절대고수의 반열에 든 게 분명했다.

홍의발은 고장추의 편에 설 생각이다.

“귀선은 사실 천황성이라는 신비문파의 수뇌부입니다. 거기서는 등 노사라고 부릅니다.”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홍의발이 등 노사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고장추의 얼굴은 시시각각 우그러들었다.

“천황성? 이 새끼들이?”

고장추 역시 무림이 돌아가는 소식을 수시로 듣고 있다.

천황성이나 봉황수에 대해서도 들은 바 있다.

하지만 본인들에게 닥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흑천맹에도 마수를 뻗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홍의발이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맹주님이 위험하십니다. 어쩌면 벌써 손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휙!

고장추의 신형이 사라졌다.

“사형!”

조비추가 뒤따라가며 고장추를 불렀다.

홀로 남은 홍의발은 한참 동안 막사에 앉아 있었다.

‘패는 던졌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잠시 후, 홍의발이 일어나서 막사를 나갔다.

“대주들은 모이시오.”

십이지대의 대주들이 모였다.

애초에 오백이 왔는데 남은 인원이 사백여 명 정도다. 그사이 일백을 잃은 것이다.

홍의발이 일대 백 명을 데려왔으니 다시 오백여 무력이다.

“언제까지 남의 손에 놀아나며 목숨을 바칠 겁니까? 이제 우리 스스로 길을 엽시다!”

여섯 대주는 묵묵히 홍의발을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 제 뜻에 따라 주면 완전히 해독할 수 있는 약을 드릴 겁니다.”

그제야 여섯 대주의 눈빛이 번뜩였다.

“일단 흑천맹으로 갑시다. 우리가 따라야 할 주군이 있습니다.”

***

채찍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하늘이 어두워졌다.

거대한 그물이다. 채찍이 뿌린 강기의 가닥이 촘촘한 그물처럼 덮쳐 왔다.

거대한 벽처럼.

도저히 깰 수 없는 강기의 벽, 혹은 그물.

절로 눈이 감겼다.

그러자 상관무영의 검이 떠올랐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검.

“….”

검이든 그물이든 결국은 매한가지.

시전자의 의지다.

홍옥비도가 날았다.

강기의 그물이 아니라 편제의 가슴을 향해서.

가장 최단 거리로 날았다.

강기의 그물이 덮치며 전신이 갈갈이 찢겨 나갔다.

그럼에도 강소군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흥!”

귓가에 들리던 편제가 비웃던 소리.

-퍽!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당황한 편제의 목소리.

그리고 서서히 희미해지는 의식.

어둠이다.

누군가 바라보는 듯했다.

“…!”

강소군이 눈을 떴다.

둥글고 맑은 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눈이다.

그 눈에 물기가 어린다.

강소군은 손을 뻗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눈이 화들짝 놀랐으나 강소군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작고 보드라운 손이 강소군의 손을 덮어 왔다.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연화심이 강소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중얼거렸다.

강소군의 눈빛은 몽롱하여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보는 듯했다.

연화심은 강소군이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여겼다. 아니, 그렇다고 여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눈가를 쓰다듬는 강소군의 손길을 밀어내야 했으니까.

강소군이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깊고 편안한 잠에 빠졌다.

***

“이 쥐새끼 같은 놈을!”

구양수를 잡으러 갔던 당종이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탈혼백침 빈 통이 들려 있었다.

천무방을 휘저으며 구양수를 내놓으라고 닦달하자 신무대주 주태가 탈혼백침 빈 통을 건네주었다.

“이공자께서 이걸 주시면서 굳이 찾을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이겠는가.

염왕사를 쓴 건 만천하가 다 안다. 하지만 탈혼백침은 회수해야 해서 찾아갔는데 이미 써 버린 빈 통만 받아 왔다.

“그놈이 이제껏 훼방 놓은 게 틀림없다!”

당종은 당우화를 찾아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다 이상함을 느꼈다.

불취는 하남과 호북의 경계에 있었고 당연히 당우화도 그곳에만 머물렀다.

‘그런데 내 귀에 늘 우화의 소문이 들려 왔지.’

당우화를 찾아 천지사방을 헤맬 때 어디서 봤다더라 하는 말이 들려 오곤 했다.

막상 가면 또 어딘가로 간 흔적이 있었다. 그렇게 당우화의 종적을 쫓아 당종은 저 남쪽 바다 해남도까지 갔다 왔다.

당종이 솟구치는 노기를 애써 억누르며 당우화에게 물었다.

“우화야. 해남도에 간 적 있느냐?”

“해남도요? 제가 거길 왜 가요?”

당우화가 별걸 다 묻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당종이 격분했다.

“그놈이 거짓 정보를 흘린 게 분명해.”

“거짓 정보라니요?”

“네가 있는 곳을 꾸며낸 거지.”

“왜요?”

“왜긴? 이 순진한 것아. 내가 너를 찾으면 어찌하겠냐?”

“혼내시겠죠.”

“그리고 나면?”

“…아!”

당우화도 그제야 깨달았다.

당가의 비기 탈혼백침과 염왕사를 외인에게 건넸다는 걸 알면 당종이 회수하려 들 것이다.

구양수는 그걸 방해하고자 당종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천지사방을 떠돌게 만든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연화심은 기가 찼다.

구양수라는 인간은 정말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

탈혼백침과 염왕사를 쓰고 마비환도 다 쓴 다음에야 당종과 당우화를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것도 연화심에게 선심을 쓰는 척 서의를 데려다주겠다고 하고 장원을 가로채 갔다.

그러고는 무림맹에 장원을 넘기고자 했다.

실제로 구양수가 사라진 뒤 제갈선이 연화심에게 정식으로 제의해왔다.

***

“연 문주. 사실 생각은 있었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한번 고려해 보는 게 어떻겠나?”

제갈선이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장원의 권리증서를 이미 구양 공자에게 넘겼습니다.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 입장이 아닙니다.”

“구양 공자가 연 문주의 다급한 처지를 이용해 장원을 갈취한 건 부당한 일이네.”

“어찌 됐든 제가 스스로 계약을 한 일입니다.”

“아니, 이런 부당한 일은 무림의 명숙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니 사실상 주인은 삼도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네.”

제갈선은 장원이 연화심의 소유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삼도문의 장원이 무림맹이 들어서기에 최적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구양수의 뜻대로 하면 천무방이 무림맹에 한자리 차지하고 들어올 여지를 줄 수밖에 없다.

한때 천하사패였던 천무방이 무림맹에 들어오는 건 세가연합으로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구연강이 아직 살아 있다. 주화입마에 들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그게 위장일 수도 있는 일이다.

천하 십대고수의 하나인 구연강이 건재하다면 철권호가 무림맹주가 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연화심에게 대금을 치르고 삼도문 장원을 인수받고 싶은 것이다.

“제갈 선배님.”

연화심이 정색을 하고 제갈선에게 말했다.

“제가 제갈 선배님에 비해 한참 어린 후배이기는 하나 일문의 문주입니다.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계약을 했지만 삼도문주로 한 계약입니다. 신뢰를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사실 연화심은 구양수에게 권리증서를 건넬 때 삼도문 장원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애초에 삼도문 장원을 되찾은 건 아버지와 숙부들의 유해를 거두기 위함이었다.

연화심은 이미 세 사람의 유해를 복건 장원으로 이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구양 공자가 매각대금 운운했는데 그것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연화심은 어려서부터 삼도문의 일을 처리해 왔기에 이재에 밝았다.

무림맹이 무한에 들어서면 당연히 상권을 두고 경쟁을 하게 된다.

삼도문이 천하무림의 힘이 모인 무림맹과 경쟁을 한다면 결과는 불문가지.

오히려 주력은 복건 장원에 두고 무한에 닦아 놓은 상권 기반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허어. 거참.”

제갈선은 명분을 중시해 왔다.

연화심이 직접 계약 당사자로 장원을 건네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거부를 하니 구양수의 말대로 천무방의 몫을 인정해 줘야 할 듯싶었다.

“제 생각에 천무방은 뜻을 굽히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천하비무대회에 참가하겠지요. 정파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했으니 거부할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제갈선은 입을 닫았다. 과거 천하사패는 제외하기로 세가연합과 대파들과 의견을 모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무방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명분이 없었다.

***

강소군은 정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연못에 홀린 듯이 잡혀 있었다.

연화심이 탕약을 들고 올라왔다.

강소군의 약은 그녀가 직접 달였다.

“방으로 갔더니 나와 계신다고 해서 놀랐어요. 서신의께서도 당분간 거동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강소군이 시선을 돌려 연화심을 보았다.

“움직일 만하오.”

강소군은 자신이 본 연화심의 눈물이 실제인지 아니면 환상이었는지 가물가물하였다.

하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중랑은 어떻소?”

“서신의께서 조치를 하셨어요. 벌써 수련하겠다고 해서 말리느라 골치 아파요. 다 큰 사람들이 왜 이리….”

연화심이 강소군이나 중랑이나 속 썩이는 건 마찬가지라고 말하려다 문득 입을 닫았다.

강소군이 피식, 웃었다.

“어, 벌써 일어나셨어요?”

그때,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강소군의 시선이 여인에게 향했다가 연화심을 보았다. 그 시선이 누구냐고 묻자 연화심이 말했다.

“아, 사천당가 당우화 여협이세요.”

강소군은 노란 옷의 여인이 왠지 낯익었다.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불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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