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63화 (16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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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역시 강소군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

그때.

“살을 바른다니. 사람에게 할 소리는 아니군.”

뒤이어 한 사람이 쿵, 하고 장내에 떨어졌다. 팽일호였다.

팽일호의 시선이 쓰러진 일부와 이부를 스치더니 강소군에게 향했다.

“내 빚을 가져갔으니 나도 당신 몫을 가져가야겠소.”

팽일호는 강소군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백정을 향해 섰다.

“도를 모욕하는 자는 쥘 자격도 없지.”

그러면서 팽일호는 백정의 뒤에 있는 자들을 살폈다.

‘좋지 않군.’

저잣거리에서 흔히 보는 차림이었으나 기운이 읽히는 자가 없다.

‘천황성이 어떤 곳이기에 이런 고수들이 몰려 있는 거지?’

팽일호는 자신이 그동안 너무 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북팽가라는 명성에 도취되어 무림이 어찌 돌아가는지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팽일소가 뒤이어 달려왔다.

“헉!”

팽일소는 나무꾼들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숨을 들이켰다.

“일소, 너는 뒤로 물러나 있거라.”

팽일호가 도를 뽑았다.

“그럴 수야 없죠. 적이 많잖아요.”

팽일소도 도를 뽑아 들었다.

그때 허공에서 소리가 울렸다.

“볼 것 다 봤으니 어서 처리하지? 언제까지 놀 건가?”

하늘에서 말하는 듯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어딘가 모르게 권태로운 말투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점쟁이 노인 등이 움찔, 하였다.

강소군의 시선이 숲으로 향했다.

역시 누군가 있었던 것이다.

허공에서 들려 온 소리에 팽일소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육합전성!’

그런 수법이 있다는 것만 들어 봤지 실제로 겪는 건 처음이었다.

점쟁이 노인 등이 마지못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서 처리하라는 말은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누가 강소군을 잡을지를 두고 내기를 했으나 명이 떨어진 이상 합공을 해서라도 빨리 죽여야 하는 입장이 됐다.

“체면이 말이 아니군. 어린놈들을 상대로 합공을 하다니.”

중년 서생이 철선을 촤악, 펴더니 얼굴을 반쯤 가리며 강소군 등을 보았다.

누구를 공격할지 정하려는 것 같았다.

그때 장내에 다시 한 사람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렇다면 나와 겨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만.”

왼팔이 헐렁한 검객. 바로 남궁악이었다.

남궁악은 한 팔을 잃은 대신 절대지경의 벽을 넘었다. 전신의 기도는 담담하고 걸음걸이는 가벼웠다.

그의 뒤로 남궁령이 따라왔다.

이를 본 중년 서생의 눈빛이 음침하게 굳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안 것이다.

“누구지?”

“남궁악이라고 하오.”

“….”

“남궁가가 왜 끼어드는 거지?”

“저런, 당신들 동료가 내 한쪽 팔을 이리 만든 걸 벌써 잊었소?”

중년 서생이 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깜빡했지 뭔가.”

팽일소는 남궁령이 나타나자 슬며시 다가갔다.

“남궁 낭자!”

마치 자신이 지켜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반보 앞에 섰다.

“고수들이 예상보다 많소. 조심해야 할 것이오.”

“저리 비켜요. 지금 나를 뭘로 보고.”

남궁령도 무가의 여식이다.

검을 뽑아 들고 천황성 고수들을 노려봤다.

팽일호에 이어 남궁악이 나타났으나 천황성의 고수들은 여전히 여유를 부렸다.

“호호, 그렇다면 나는 저 계집애를 맡지.”

칠현금을 든 기녀가 연화심에게로 향했다.

팽일호와 남궁악이 나타나며 상대를 지명하고 기녀가 연화심에게 향하자 자연 점쟁이 노인과 화공이 강소군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암묵적으로 상대를 정해 서서히 움직이는데 다시 한 사람이 검으로 풀을 헤치며 걸어 나왔다.

“여기는 길도 없군. 웬 잡풀이 이리 많은 건지.”

구시렁거리며 나타난 이는 노이칠이었다.

“노 대협?”

“연 문주, 섭섭하네. 지난날 함께 싸웠던 걸 잊었나? 동지를 쏙 빼놓고 이리 와서 자기들만 재미 보면 안 되지.”

노이칠이 검을 척, 어깨에 걸치더니 너스레를 떨며 화공을 향해 움직였다.

점쟁이 노인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결국 저놈은 내 차지인가?”

그러나 노이칠이 끝이 아니었다.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혈적산판 염가는 천황성의 고수들을 보고는 인상을 잔뜩 쓰더니 노이칠에게 말했다.

“세 명이라며? 너는 적이 몇인지도 모르고 나를 불렀냐?”

노이칠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게 말이오. 이게 다 어디서 쏟아져 나온 괴물들인지.”

“끄응. 너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제 명에 못 죽을 게 분명해.”

염가가 타박을 하며 산통을 든 점쟁이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산통에 든 산죽을 향했다.

“산죽을 던지는 게 당신 수법이지?”

염가가 자신의 주판을 흔들었다.

“내 주판알이 좀 더 많은 것 같군.”

공교롭게도 서로 상대가 정해졌다.

강소군이 천황성의 고수들을 봤다.

모두 화경에 접어든 이들이다. 실전경험이 부족하다지만 고수는 고수다.

이쪽에서 저들과 맞서 동수를 이룰 사람은 남궁악 정도일 것이다.

나머지는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죽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았다.

천황성의 고수들도 이를 알고 있으니 여유를 부리는 것이다.

강소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팽팽한 대치 상황에서 그가 움직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강소군이 향하는 곳은 숲이었다.

“크크. 알아서 죽으러 가는군.”

점쟁이 노인이 강소군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강 대협, 이들부터 처지하고 함께 상대해요.”

연화심이 강소군을 불렀으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강소군의 걸음걸이는 무거웠다.

연화심과 남궁령은 속이 탔다.

숲에 있는 자는 이들의 우두머리가 분명했다. 당연히 더 강한 고수일 것이다.

강소군이 중상을 입은 몸으로 굳이 강적을 찾아가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소군이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천황성의 고수들이 한 발 물러났다.

그들은 강소군을 잡기 위해 온 것이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다른 이들과 싸울 생각까지는 없었다.

목수도 두어 발 뒤로 물러났다. 그는 악귀처럼 버티고 있는 중랑이 껄끄러웠다.

중랑은 강소군이 들어간 숲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걸 예상한 걸까?’

숲으로 들어가니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계곡이 있었다. 커다란 바위들이 널려 있고 그 사이로 물이 흘렀다.

큼직한 바위를 하나씩 차지한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은 바위에 덜렁 누웠고 다른 한 사람은 정좌를 하고 있었다.

정좌를 한 중년인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선정에 든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옆에 기댄 은빛 철창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강소군이 나타나자 바위에 누워 있던 사람이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쳐다봤다.

왠지 불취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었다. 중년인과 달리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는 입에 기다란 풀잎을 물고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시선에는 권태로움이 가득했다.

강소군은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바위로 가더니 역시 정좌를 하였다.

운기조식을 하려는 것이다.

모로 누워 강소군이 하는 걸 보던 이가 퉤, 하고 씹고 있던 풀을 뱉더니 말했다.

“대담한 녀석이야. 죽여 달라고 오다니.”

그가 누운 채 자신의 옆에 있는 채찍을 들었다.

-팟!

채찍이 펼쳐졌다가 다시 감겼다.

놀랍게도 풀잎 하나가 채찍 끝에 감겨 있었다.

그가 새로 풀잎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었다.

“저 밖에 있는 이들 죽이지 말라고 들어온 거겠지?”

강소군은 금룡기를 운용하였다.

채찍을 쓰는 자는 편제(鞭帝)다.

“혈마라고 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음이 여리군.”

“그가 손쓰는 걸 봤잖나. 너라면 그렇게 단호하게 사람을 가를 수 있겠냐?”

이제까지 듣고만 있던 창제(槍帝)가 대꾸하였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크크. 그렇게 못하지. 나는 피 튀기는 게 싫거든.”

창제가 눈을 떴다.

“그렇다고 명을 어길 건가?”

“누가 그렇대? 근데 이건 좀 아니잖아? 저 한 놈 잡자고 우르르 몰려오다니.”

“저놈에게 벌써 절반이나 당했다.”

“흥! 한심한 놈들! 억지로 끌어 올려줬다고 자기들이 절대고수라도 되는 줄 알고 설치다 당했으니 할 말 없겠지.”

두 사람은 강소군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였다.

“오랜만에 네 창법이나 구경하자.”

편제가 부추겼으나 창제는 손을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강소군은 금룡기를 운용하며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연화심의 요상환은 동약사에게 처방을 받은 것이다. 효과가 꽤 빨리 나타났다.

금룡기까지 운용하자 오장육부의 기운이 빠르게 조화를 이뤄 갔다.

“호오. 저거 괴물인데? 회복력이 장난이 아니잖아?”

편제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직 볼 게 더 남았나?”

편제는 천주가 왜 자신과 창제 두 사람이나 보냈는지 궁금해하였다. 게다가 열 명이나 되는 고수들까지 붙였다.

적어도 자신들과 같은 생사경의 고수라 생각하고 나름 기대를 하고 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실전에 뛰어나기는 했으나 현경의 고수라는 걸 알자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점쟁이 노인 등에게 빨리 처리를 하라고 한 것인데 강소군이 느닷없이 숲으로 들어온 것이다.

죽여 달라고 왔지만 굳이 손을 쓰고 싶지 않았다. 부상당한 사람을 해치우기 껄끄럽다는 자존심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었다.

권태.

편제는 생사경에 들어 권태에 빠졌다.

그의 상대는 천하에서 천주를 비롯 자신보다 서열 위인 몇몇 천황성 고수들뿐이다.

정작 그가 싸우고 싶은 이는 그들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상대를 해 주지 않는다.

편제는 그 이유도 안다. 천주는 몰라도 삼황오제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의 차이다.

한순간 깨달음으로 생사경을 벗어던지는 순간 천주와 같은 미증유의 경지로 들어간다.

삼황오제는 서로를 견제하기에 그런 경지에 이를 기회를 줄 이유가 없다.

창제 역시 마찬가지다. 편제 앞에서 자신의 창법을 보여 줄 생각이 없다.

그러니 중상을 입은 적이 회복하는 걸 보기만 하는 기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창제는 눈을 감고 강소군이 싸우던 모습을 연상하고 있었다.

분명 그보다 경지가 낮았으나 묘하게도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그 역시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경지이다. 그랬기에 강소군에게서 강렬한 삶의 의지를 보았다. 그와 함께 기이할 정도로 폭발하는 기의 흐름을 느꼈다.

‘대체 그게 뭘까?’

창제는 천주의 명에 따라 마지못해 나왔다가 자신의 화두를 잡은 것 같았다.

그런데 옆에서 편제가 자꾸 말을 거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휙!

창제의 신형이 홀연 사라졌다.

“뭐야? 내게 떠맡긴 거야?”

편제가 황당해하였다.

“하긴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뭔가 결심이 선 듯 편제가 펄떡, 일어났다.

“네게는 안됐지만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다.”

편제가 자신의 채찍을 한 번 휘둘렀다.

-짝!

허공에서 기파가 터졌다.

“이봐, 일어나라고. 가만있는 놈을 죽였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거든.”

강소군이 눈을 떴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어차피 정식으로 겨뤄도 죽는 건 마찬가지거든?”

편제가 풀쩍, 뛰어 강소군 삼 장 거리에 있는 바위로 내려섰다.

“한 번의 기회를 줄 테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고.”

편제가 우드득, 목을 꺾어 풀면서 말했다.

강소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홍옥비도가 들려 있었다.

이 장 길이의 채찍과 짧은 비도.

무기만 봐서는 강소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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