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숲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청죽으로 만든 낚싯대를 맨 노인이었다. 허리에는 고기를 잡는 그물을 차고 있다.
강소군은 천황성의 고수들이 각기 특색이 있음을 깨달았다.
사냥꾼이거나 나무꾼, 자객에 이어 어부 등 다양하다.
“귀하도 천황성에서 왔소?”
“네놈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귀찮게 됐지.”
“천황성은 어디 있소? 말해 주면 내가 직접 찾아가리다.”
“클클클. 노부를 우습게 보는군.”
그때 중랑과 무흔이 겨루는 쪽에서 나직한 비명이 터졌다.
“큭!”
어부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중랑의 검이 무흔의 복부에 박혀 있었다. 무흔의 작은 눈이 크게 벌어져 있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두 손은 자신의 복부를 찌른 중랑의 검을 잡고 있었다.
어부가 혀를 찼다.
“저놈이 저렇게 죽는군. 제법 조심스러운 놈이었는데.”
어부는 무흔을 아는 모양이었다. 혀를 찼으나 무흔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무흔이 어부의 말을 들었는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흔은 일전에 강소군의 기습을 받아 양팔을 다쳤다. 완전하지 않은 몸 상태로 살행에 나섰던 것이 죽음으로 돌아왔다.
무흔이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중랑이 검을 뽑고 잠시 무흔을 보다 강소군에게로 다가왔다.
중랑의 시선이 이부의 도끼에 베인 강소군의 옆구리로 향했다.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크게 베여 꽤 피가 흘렀다.
중랑이 다시 시선을 강소군에게서 어부로 돌렸다.
“대체 이들은 누구요?”
“천황성!”
중랑도 내심 짐작은 하고 있던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살폈다.
적이 하나만 있지는 않을 거란 판단이다.
어부가 중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한 놈이 더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네놈이 혹시 팽가냐?”
중랑이 검을 흔들어 보였다. 팽가라는 건 부인했으나 굳이 자신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아니라는 뜻이군. 그렇다면 네게는 관심 없으니 저리 비켜 있거라.”
중랑은 어부의 말을 무시했다.
“괜찮겠소?”
중랑의 시선이 다시 강소군의 옆구리 상처로 향했다. 부상을 입고 상대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랑이 삼 장 옆으로 물러났다.
중랑은 자신이 직접 상대하는 것보다 강소군을 노리는 기습을 막는 게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강소군 역시 중랑이 암습을 막아 준다면 안심이다.
다만 눈앞의 어부가 어느 정도 경지의 고수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절대지경에 든 고수들은 본인이 기도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좀처럼 화후를 가늠하기 어렵다.
상대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면 모를까 엇비슷하다면 일합을 겨뤄 보아야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어부의 경지가 강소군과 비교하여도 뒤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강소군은 철목삼부의 무공이 만만치 않아 속전속결로 끝내고자 했고 그 때문에 옆구리 부상을 감수했다.
자객을 중랑에게 맡김으로써 가능했는데 적이 더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차라리 처음부터 어부가 있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싸웠을 것이다.
강소군이 어부를 향해 말했다.
“잠시 기다려 주겠소?”
강소군이 품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더니 웃통을 벗었다.
잘 단련된 상체는 곳곳에 흉터가 가득했다. 양쪽 팔에 단검집이 매여 있었다.
강소군은 청홍비도를 나란히 차고 있었다.
“험난하게 산 모양이군.”
어부가 한마디 하였다.
강소군과 어부의 거리는 사 장여 떨어져 있었다.
기습을 하기에는 좀 먼 거리다.
강소군은 바늘에 실을 꿰어 옆구리 상처를 꿰맸다.
어부는 뒷짐을 지고 먼산으로 시선을 주었다.
“날이 좋구나. 오늘 같은 날 저녁이면 대물을 낚을 수 있을 것인데….”
어부의 왼발이 슬며시 앞으로 나왔다. 무료해서 서성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를 본 중랑이 오른발을 내디뎠다. 싸늘한 기운이 중랑의 전신에 어렸다.
어부가 중랑을 흘깃, 보고는 말했다.
“좋은 호위를 두었군.”
“그는 내 호위가 아니오.”
“그래? 그렇다면….”
어부가 말하다 말고 순간적으로 몸을 회전하였다.
뒷짐을 졌던 오른손에 어느새 청죽이 들여 있었다.
어부가 손을 쭉 뻗어 낚싯대를 휘둘렀다.
-쌔애애액!
“어차피 죽을 거 굳이 꿰맬 이유가 있나?”
사장 여 거리였으나 낚싯대로서는 최적의 공격권이었다.
어부의 청죽 끝에 삼 장 길이의 낚싯줄이 있고 그 끝에 세 갈래로 구부러진 낚싯바늘이 매여 있었다.
-치치칫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기음이 작은 낚싯바늘에서 터졌다.
중랑이 몸을 날렸다.
-콱!
살에 물체가 박히는 소리는 어부의 등판에서 났다.
-쉬이익!
낚싯바늘이 아슬아슬하게 강소군의 면전을 스쳤다.
“크윽!”
어부가 등을 돌린 채 앞으로 두어 걸음 가다 멈췄다.
“어떻게?”
어부는 자신의 기습을 상대가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더군.”
강소군은 자신의 상처를 마저 꿰매며 말했다.
“이상하리만치 높은 무공에 비해 실전 경험이 부족해.”
강소군은 어부가 나타났을 때 자신과 사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개 고수들이 일대일로 싸울 때 삼 장 거리를 두고 격돌하는 데 비해 일 장 더 떨어진 것이다.
강소군은 자신의 상처를 꿰매면서도 상대의 호흡에 집중하였다.
자연스럽던 어부의 호흡이 어느 순간 깊이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을 때 어부를 보았다.
먼 곳을 보며 딴전을 피우는 척하던 어부는 강소군의 손이 상처를 꿰매던 바늘을 놓고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홍옥비도를 쥐는 걸 보지 못했다.
“아주 간단한 유인에도 쉽게 넘어오더군.”
철목삼부의 일부와 이부 역시 강소군의 느닷없는 대처에 순간적으로 당했다.
강소군은 어부 역시 실전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눈치채고 자신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낚싯대를 등에 맨 어부가 자신을 기습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 몸을 회전하며 낚싯대를 휘두르는 것이라 판단하여 도박을 한 셈이다.
부상을 입은 몸이고 상대의 무위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이기에 속전속결을 택한 것이다.
“크윽, 이런 어이없는 수작에….”
어부는 믿을 수가 없었다. 등판에 박힌 홍옥비도는 정확히 척추를 부수고 심장을 찔렀다.
어부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전쟁터에서는 경험 많은 노병이 신참 장수를 꺾는 일이 종종 일어나지.”
강소군이 상처를 마저 꿰매고 상의를 걸쳤다.
천천히 어부에게 다가간 강소군이 물었다.
“몇이나 왔나?”
어부 한 사람만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크윽, 저승길에서 기다릴 테니 다시 겨뤄 보자….”
어부가 눈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한순간의 패배가 너무나 아쉬웠던 것이다.
“그가 기습할 것이라고 생각했소?”
중랑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하기를 바랐지.”
강소군이 숲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밭에서 일하다 막 나온 듯 커다란 낫을 두 자루나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망치를 쥐고 있었다.
“놀랍군. 그 몸으로 어옹을 해치우다니.”
강소군은 궁금했다.
그들은 동료임이 분명한데 서로에 대한 친밀감이 없어 보였다.
불취와 흑사도 마찬가지였고 무흔도 굳이 철목삼부와 연수합격을 펼치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 강소군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번에 두 사람이 나온 것은 강소군과 중랑을 각기 상대하기 위함일 것이다.
농부는 오십 정도 된 장년인이었고 대장장이는 서른 후반으로 보였다.
강소군이 바닥에 쓰러진 어부에게 흘깃 시선을 준 다음 말했다.
“이 사람이 어옹이면 거기는 야장쯤 되겠군. 이쪽은 농부?”
“속세와 떨어져 사는데 이름이 뭐 중요하겠나?”
농부가 양손에 든 낫을 엇갈려 문지르며 말했다. 농부의 낫은 보통 낫보다 한 자는 더 길었다.
“그렇군. 몇이나 왔지? 기왕이면 한꺼번에 나왔으면 좋겠는데?”
강소군이 말하자 야장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 우습군.”
한참을 웃은 야장이 숲을 흘깃 돌아보고는 말했다.
“크크, 미안하군. 너무 황당한 말을 들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잖아? 사냥감이 사냥꾼을 불러 달라니.”
“사냥감?”
“네놈을 두고 내기가 벌어졌지. 너를 잡는 자가 이기는 거지.”
강소군은 예상대로 여러 사람이 몰려왔음을 알았다.
“이기면 뭘 얻는데?”
야장이 대답하려는데 농부가 막았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해라.”
농부의 말에 야장이 입을 닫았다.
두 사람은 어딘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형제는 아니고 사촌 정도는 되어 보이는군.”
강소군이 말했다.
두 사람은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강소군이 다시 쓰러진 어부를 보더니 말했다.
“당신 둘은 이 사람보다 무공이 떨어지는데 왜 벌써 나섰지? 내가 다른 자와 싸우다 부상이 심해지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농부와 야장은 확실히 어부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강소군은 그들의 무위를 대충 느끼고 있다.
절대지경의 초입이다. 굳이 따진다면 쌍렵보다 조금 나은 정도?
강소군이 문득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비뽑기를 했군? 원해서 나온 게 아니야.”
“개소리 마라!”
야장이 일축했다. 그가 오른손에 든 망치를 쳐들었다.
“대가리 터질 준비나 하라고.”
그들은 강소군이 철목삼부와 어부를 기지로 상대하여 이기는 걸 봤다.
예상치 못한 수법만 조심하면 부상을 입은 강소군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농부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낫을 휘둘렀다.
그 나름 강소군이 머리를 쓸 기회를 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쉬이이익!
긴 낫이 정직하게 강소군의 목을 노리고 왔다.
강소군이 한 발 물러서는데 농부의 왼손이 오른손 밑으로 들어갔다.
두 자루의 낫이 같은 방향에서 연달아 날아들었다.
-챙!
강소군의 무애검이 빙그르르 돌며 낫을 튕겨내려 했는데 오히려 밀렸다.
강소군이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낫을 피했다.
그러나 낫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강소군의 목을 노리고 연달아 날아들었다.
“너는 내 몫이다!”
야장이 긴 망치를 붕붕 돌리며 중랑에게 다가갔다.
-부웅, 부웅!
야장의 기운이 흘러들어 가자 망치를 돌리는 바람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야장의 망치는 자루는 길고 머리는 주먹만 했다. 추하고 비슷해 보였다.
“막아 봐라.”
야장이 고함을 질렀다.
순간 망치가 중랑의 가슴팍으로 쑤욱 들어왔다.
중랑은 함부로 쳐낼 수가 없었다. 야장은 전문적으로 상대의 병기를 부수는 수법을 익힌 듯했다.
중랑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
“초화평이 어딘데요?”
남궁령이 물었다.
강소군을 찾아갔는데 거처가 비어 있었다.
그래서 팽씨 형제를 찾아갔는데 거기도 없었다.
삼도문 대문에 관이 놓인 것은 아침 일찍이었기에 모인 정파의 군웅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남궁령이 강소군을 수소문하다 연화심까지 찾아갔다.
“여기서 멀지 않아요.”
“적이 함정을 파놓고 있을 텐데 오라버니 혼자만 보냈단 말이에요?”
“다른 사람은 와 봤자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했어요.”
연화심이 말했다. 그녀 역시 걱정이 되었지만 강소군의 말을 철썩같이 신뢰하였기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 일문의 문주이고 장원에 여러 정파가 머무르고 있기에 함부로 거동할 수가 없기도 했다.
“그럼 정말 강적이라는 거잖아요?”
남궁령의 눈꼬리가 쑤욱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