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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화평이 어딘가?”
강소군이 관에 붙어 있는 헝겊을 보며 유상화에게 물었다. 피로 찍어 쓴 글씨는 지명 같았다.
“여기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들입니다.”
강소군이 잠시 생각하더니 유상화에게 말과 수레를 부탁했다.
“관도 하나 더 구해 주게.”
연화심이 물었다.
“어쩌시려고요.”
“관을 여기 둘 수는 없지 않소?”
강소군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짐을 쌌다.
나무꾼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삼도문에 있으면 직접 쳐들어올 수도 있다.
절대고수란 자들의 심리를 강소군은 잘 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다고 믿는 자들은 못할 짓이 없다.
흑천맹과 천무방이라는 대적을 앞둔 삼도문에 다시 새로운 강적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강소군이 짐을 챙겨 별원을 나왔다.
중랑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무복에 검을 꽂고 있다.
“….”
“이번에는 같이 갑시다.”
지난날 강소군이 홀로 나가 천무방 응천대를 상대하였다.
“이번 적은 다르네. 나를 찾아온 적이거든.”
“그래서 같이 가자는 거요.”
“…?”
강소군은 중랑이 갑자기 자신과 동행하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강소군에 대한 중랑의 태도는 모호했다. 그의 마음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강소군은 그에게 무공의 깨우침을 주고 대연의결을 건네주었으니 은인인 셈이다.
무엇보다 연화심을 몇 차례나 구해 주었다. 그럼에도 연화심의 곁에 강소군이 있는 게 마뜩잖았다.
강소군의 전신에 밴 짙은 피냄새와 연화심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불길했다.
낭인으로 살았던 중랑은 그들의 마지막을 수없이 봤다.
제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결국 누군가의 칼에 최후를 맞았다. 연화심을 그 피의 소용돌이에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 중랑의 마음을 강소군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함께 가자고 하는 게 의외였다.
“죽을 수도 있을 텐데?”
“당신은 죽으면 안 될 것 같소. 물론 나도 죽지 않을 거요.”
강소군에게 강적이 나타났다는 걸 안 연화심은 자기도 모르게 안절부절못하였다.
중랑은 그 모습을 보다 문득 깨달았다.
누군가를 걱정한다는 것.
그건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적어도 강소군이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제법 괜찮은 호위라오.”
“….”
강소군이 묵묵히 중랑 곁을 지나쳤다.
중랑이 따라붙었다.
***
구릉들 사이로 널따란 평원이 나왔다.
잡목과 수풀이 우거진 평원에 붉고 노란 꽃들이 여기저기 무리 지어 피었다.
초화평.
두 마리 말이 끄는 수레가 초화평으로 들어섰다. 수레 위에는 세 개의 관이 놓여 있었다.
마부석에는 강소군이 홀로 앉아 있었다.
“크흐흐. 과연 혼자 왔구나!”
“내가 그럴 거라 했잖소.”
두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철목삼부의 첫째와 둘째다.
그들은 원래 팽씨 형제를 척살하기 위해 왔으니 셋째를 강소군에게 잃고 복수부터 하고자 하였다.
강소군이 마부석에서 내리더니 수레에 실린 관을 내렸다.
모두 세 개다.
철목삼부의 첫째 일부(一斧)가 미간을 찌푸렸다.
“관을 두 개 보내지 않았나?”
이부(二斧)도 고개를 갸웃거리다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강소군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나머지 두 개의 빈 관은 일부와 이부를 위한 것이다.
강소군은 관을 내려놓고 무애검을 들고 두 사람 앞으로 왔다.
일부와 이부가 쌍도끼를 풀어 양손에 쥐었다.
팽씨 형제를 쫓다가 느닷없이 만난 놈이다. 가볍게 보다가 셋째를 잃고 말았다.
본성에서 다시 내려온 명을 받고 그가 혈마 강소군이라는 걸 알았다.
물론 산속에 처박혀 지낸 그들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전령이 전한 바로는 그를 잡기 위해 제왕전의 고수까지 나왔다고 하였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상대가 절대고수라는 뜻이다.
일부와 이부는 막내의 복수를 남에게 맡길 수 없었다. 그들 또한 절대지경을 걷는 고수들이다.
“건방진 놈!”
일부가 전신 대맥을 열었다. 순식간에 거대한 기운이 일었다.
이번에는 최선을 다할 생각으로 단숨에 전력을 끌어 올린 것이다.
-퍼엉!
이부의 몸에서도 거센 기파가 터져 나왔다.
강소군이 천천히 무애검을 뽑아 들었다.
-지잉.
무애검이 울었다.
강소군은 그사이 무애검과 감응이 깊어졌다.
강소군이 말없이 검을 겨눴다.
나타나서 검을 세우기까지 한 마디 말이 없었다.
말도 섞을 이유가 없다는 오만한 태도에 이부가 격분하였다.
-파파팟!
이부는 순식간에 강소군의 면전으로 들이닥쳤다.
도끼의 그림자가 강소군의 좌우를 덮었다. 그림자였을 뿐이나 거기에 실린 살기는 실체를 이룰 정도였다.
-따다당!
강소군이 갑자기 몸을 회전하며 춤을 추듯 검을 빙 돌려 도끼의 그림자를 쳐냈다.
-콰콰쾅!
경기와 경기가 부딪히며 폭음성이 연달아 터졌다.
‘…!’
강소군은 이부의 도끼에 실린 강맹한 기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쇠처럼 단단했던 것이다.
먼젓번 팽씨 형제를 구할 때와 사뭇 달랐다.
이부는 작정하고 처음부터 자신들이 자부하는 철목신공을 운용하였다.
강소군이 그들의 별호가 철목삼부라는 걸 알았다면 금석과 같은 단단함을 기초로 한 무공임을 유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
-쿠웅!
강소군의 금룡기가 전신 세맥에서 터져 나오며 철목신공의 기운과 부딪쳤다.
강 대 강.
강소군의 금룡기 또한 유에서 생성된 강맹함을 띠고 있다.
강맹한 두 기운이 부딪치자 둔중한 폭음이 일었다.
그 순간.
-쌔애애액!
일부의 거대한 도끼가 강소군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이부가 선공으로 강소군의 주의를 흩트리는 사이 일부가 허공에서 강소군의 머리를 노린 것이다.
일부의 전신 공력이 실린 도끼는 실제보다 두 배 이상 커 보였다.
‘심검!’
강소군은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일부의 도끼는 심검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수의 심력이 극한에 이르면 기운에 자신의 의지를 실을 수 있다. 기와 의지가 일체화된 것이 심검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게 검이든 도든 심지어 도끼든 무기와는 상관이 없다.
심검에도 경지가 있다. 고수의 심력과 무관하게 깨달음이 심검의 차원을 나누는 것이다.
구연강은 이기어검의 단계에 이르렀으나 심검의 초입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천하일통이라는 욕망이 그의 깨달음을 막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몰랐던 것이다.
철목삼부는 깊은 산속에서 나무꾼으로 살았다. 단순한 삶이었기에 세속적 욕망이 덜했다.
천주의 도움을 받아 절대지경에 들었고 심검의 경지를 밟았다.
그러나 단순함이 성취를 가져왔으나 또한 한계도 지었다. 깨달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고(苦)와 무관하지 않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비통함이나 억울하고 일을 당했을 때 터져 나오는 분노, 좀 더 가지고자 하는 욕망 등. 온갖 감정을 떨치고 넘어섰을 때 비로소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심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일부의 도끼는 강소군을 죽이고자 하는 단순한 의지를 실었기에 무엇보다 강맹하였다. 하지만 그 의지는 우직하여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일부가 허공에서 도끼를 내려치자 이부는 옆으로 돌며 강소군의 퇴로를 막으려 하였다.
그런데.
“엇!”
강소군이 갑자기 이부의 품으로 뛰어들더니 왼팔 겨드랑이 밑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걸고는 빙그르르 돌았다.
마치 두 사람이 춤을 추는 동작과 비슷했다.
이부는 이런 수는 듣도 보도 못했다. 난도질할 듯 몰아치는 거센 도끼의 그림자를 뚫고 자신의 몸에 들러붙다니.
이부가 황급히 오른손에 든 도끼로 강소군의 복부를 내리찍었다.
그러나 강소군이 뒤로 물러나며 이부를 중심으로 회전하자 중심을 잃고 옆구리만 베고 말았다.
그 사이 일부의 도끼가 떨어졌다.
-쩍!
일부가 황급히 도끼를 당겼으나 우직한 의지를 담은 도끼는 이부의 정수리를 찍었다.
일부가 도끼를 내려치고 강소군이 이부를 끌어와 자신을 대신한 건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이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정수리부터 하복부까지 쫙 갈라지고 말았다.
“둘째야!”
일부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삼류 무인들의 싸움도 아니고 절대고수들의 접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
“헛!”
수풀 속에 잠복하고 있던 무흔도 놀랐다.
강소군에게 기습을 당해 부상을 입었으나 호신갑 덕분에 치명상을 피한 무흔이다.
자객은 목숨이 다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적을 노린다. 상대가 죽든 자신이 죽든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일이 끝난다.
무흔은 일부와 이부가 강소군을 잡기 위해 관을 보내는 걸 보고 주위를 맴돌았다.
그간 지켜봐 온 바대로라면 반드시 강소군이 나타날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강소군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일부와 이부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접전에 꽤 길어질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랬기에 약간 떨어진 곳에서 암습할 궁리를 세우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세 사람이 격돌하자마자 순식간에 이부가 죽었다. 그것도 자신의 친형이 내리친 도끼에 반쪽이 났다.
얼마나 놀랐는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켠 게 실수였다.
“…!”
허공에 어리는 싸늘한 기운을 느끼고 무흔이 재빨리 몸을 뒤집었다.
소리 없이 떨어지던 검이 돌연 굉음을 터뜨렸다.
-쐐애애액!
순간 허공에 새하얀 별무리가 피어나더니 유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무흔 역시 절대지경의 고수.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별무리 역시 방향을 급선회하여 쫓아갔다.
무흔이 수풀 속에서 튕기듯 솟구쳐 오르며 길고 짧은 도를 양손에 나눠 쥐고 연달아 휘저었다.
-따다다다당!
중랑의 검과 무흔의 쌍도가 연달아 부딪쳤다.
이어 무흔이 지면에 내려섰다.
“넌 또 뭐지?”
중랑은 말없이 검을 세웠다.
***
-털썩!
이부의 시신이 넘어졌다.
“으으….”
일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광기 어린 눈이 이부의 시신을 지나 강소군에게 향했다.
무어라 할 말이 많은데 나오지 않았다.
“으아아악!”
일부가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며 왼손에 든 도를 던졌다.
-쉬쉬쉭!
거대한 도끼가 원반처럼 강소군을 향했다.
일부가 그 뒤를 따라 나머지 도끼를 사선으로 내리찍었다.
강소군이 날아오는 도끼를 검으로 쳐냈다. 도끼에 실린 경력은 막강하였지만 이미 일부의 심력이 깨졌기에 어렵지 않게 쳐낼 수 있었다.
-쐐애액!
그 사이 사선으로 내리찍어 오는 도끼도 마찬가지였다.
일부의 두 눈은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일종의 주화입마에 든 상태였다.
전신에서 거센 기파가 터져 나왔으나 무의미한 기운의 소용돌이일 뿐이다.
강소군의 검이 기운의 소용돌이를 가르며 쭉 뻗어 나갔다.
-푹!
강소군의 검은 마침내 일부의 심장에 박혔다.
“크억!”
심장에 검이 박히고서야 일부가 정신을 차렸다.
일부는 이부의 시신과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을 보았다.
“과, 과연 제왕전에서 나설 만한 자였구나….”
일부는 그제야 강소군이 자신들이 짐작했던 것 이상의 고수라는 걸 깨달았다.
절대지경이란 것이 그렇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 힘을 가졌기에 하늘도 두렵지 않다. 그러나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아는 순간 죽는 것이다.
“크크크. 관을 하나 더 준비해야 할 것이다. 네놈도 곧 우리 뒤를 따라올 것이니….”
일목이 말을 마치지 못하고 선 채로 숨을 거뒀다.
강소군이 검을 거두고 중랑과 무흔이 접전을 벌이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철목삼부가 제법 단단한 자들이었는데.”
허공에서 윙윙 울려 퍼지는 소리.
강소군이 흠칫, 하여 평원 끝 숲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