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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155화 (155/250)

155

구양수의 냉랭한 말에 평엽이 발을 멈췄다.

“이공자? 대체 뭐 하자는 거요?”

평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적을 앞두고 장수의 출전을 막다니.

평엽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일찍이 무공을 인정받아 참룡대의 대주로 올랐다. 평생 이렇게 무시당한 적이 없었다.

“나를 막다니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요.”

평엽이 구양수를 노려보았다. 어찌 됐든 전권을 쥔 이는 구양수다.

구양수가 알았다는 듯 손을 휘휘 젓더니 앞으로 나갔다.

***

조배극은 천무방의 원로이자 공신이었다.

마씨 부인 측근으로 알려져 한직인 무한지부 호법장로로 밀려났으나 무사들 사이에서는 신망이 높았다.

특히 무력대 대주들은 그와 함께 동고동락을 했기에 복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구양조 역시 조배극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신무와 참룡, 진마대를 보낸 것이다.

그때, 구양수가 돌연 튀어나와 자신에게 전권을 달라고 했다.

주태 등은 그가 왜 나섰는지 몰랐는데 지금 하는 걸 보니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저런?”

“미친?”

구양수가 평엽 대신 나갔다.

무기도 들지 않았다. 심지어 두 팔을 들어 병기가 없다는 걸 보이며 걸어갔다.

천무방 무인들은 물론이고 고장추도 의외의 눈길로 구양수를 지켜보았다.

구양수가 천천히 걸어가 고장추 앞에 서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일단 도는 집어넣어라!”

고장추가 미간을 찌푸렸다.

천무방 이공자라는 놈이 무슨 속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네놈의 속셈이 뭐냐?”

구양수가 실실, 웃었다.

“남의 속을 함부로 알려고 하지 마. 그랬다가 뒤통수 맞기 딱 좋거든? 사내끼리 까놓고 이야기나 좀 하자는 거야.”

고장추가 눈살을 찌푸렸다.

천무방 이공자라는 놈이 뜻밖에도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고장추는 힘을 쓰는 놈보다 머리 쓰는 놈들이 더 껄끄러웠다.

“천무방에 이무기 있는 줄 몰랐군?”

“나도 마찬가지야. 흑선문에 저런 살인마들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구양수가 고장추 뒤에 있는 오백여 무인들을 노려봤다.

구양수는 그들의 정체를 안다.

십이지대.

조개량이 아버지 구연강을 꼬드겨 키운 무인들.

그들은 하나같이 일류 고수이자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는 살인귀들이다.

그들의 실력을 구양수는 알고 있었다.

신무와 참룡, 진마대는 천무방의 정예다. 두 무력이 부딪치면 잘해야 양패구상.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이고. 아버지, 아버지가 돈 쏟아부어 키운 칼에 자식들이 다 죽게 생겼네요.’

구양수가 속으로 투덜댔다.

천무방은 원래 열셋에 이르는 무력대 천삼백 명과 살귀대와 같은 별도의 무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난 몇 년 사이 숱한 무인을 잃었다.

강소군과의 싸움이 치명타였다. 응천대와 귀영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고 흑마대와 천성대도 반절이 넘게 꺾였다.

게다가 구양조가 요천루의 세력을 병탄하면서도 손실을 입었다.

천무방은 그동안 대외활동을 접고 무력대를 재편하였다.

구양조는 동생 구양수의 의견에 따라 무너진 무력대에 인원을 보충하는 대신 일백 무인으로 편성된 무력대 여섯으로 정비하였다.

무력대 하나를 조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무인들을 모아놓는다고 무력대가 아닌 것이다.

대주와 조장, 조원들의 실력이 고르게 분포되어야 한다. 또한 대원들이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 충심으로 통할 때 비로소 정예라고 말할 수 있다.

천무방은 양보다 질을 택했다.

무력이 반으로 줄어들었으나 여섯 무력대의 수준은 과거보다 높아졌다. 그것만으로도 여전히 강호 최강의 방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 절반인 삼백이 출정을 하였다. 그것도 방의 정예 무력들로만.

구양수는 별반 이득도 없는 명예를 위한 싸움에 천무방의 무력 삼백이나 출정하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 급히 전권을 달라고 하고 직접 출정을 한 것이었다.

구양수는 십이지대 오백여 무인을 보며 내심 이를 갈았다.

‘조개량, 너의 뒷배가 고선이었다고?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조개량을 천무방에 심어 놓은 뒷배를 알아내기 위해 이목을 천지사방에 풀었다.

그런데 조개량의 행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막막해하던 차에 잠적했던 조개량이 느닷없이 나타나 남궁세가를 치다가 강소군에게 죽었다.

그 후 사라졌던 십이지대가 흑천맹의 무력대로 나타났다.

구양수는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직접 확인을 해야 했다.

그래서 고장추와 마주 섰다.

“흑선문이 광산이라도 하나 캔 모양이지? 저렇게 많은 무인을 기르다니. 아니면 어디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왔나?”

구양수가 넌지시 떠봤다.

고장추 역시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파악!

갑자기 고장추의 전신에서 기운이 솟았다. 퍼져 나온 기막이 고장추와 구양수를 감쌌다.

두 사람의 대화가 새어 나가는 걸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말했잖아. 그냥 강 건너 돌아가 줬으면 좋겠는데?”

“크흐흐. 장난 하나?”

“삼도문이 필요한 게 아니잖아?”

“….”

“무한에 무림맹이 들어설 거야. 흑천맹이 이 자리에 있는 걸 놔둘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고장추가 피식, 웃었다.

“네놈도 정파라는 거냐?”

“그럴 리가. 칼 쓰는 놈들 중에 흑백을 따지는 놈이 더 이상한 거 아냐? 다 같이 나쁜 놈들이지.”

구양수가 키득키득 웃다가 말했다.

“그런데 넌, 왜 남의 칼 노릇을 하는 거냐?”

“…!”

고장추가 흠칫, 하자 구양수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다.

구양수가 치고 들어갔다.

“저놈들, 네 새끼들 아니지?”

고장추가 구양수를 노려봤다.

“넌 뭐냐?”

“뒤통수 먼저 맞은 놈이지.”

고장추가 구양수를 노려보았다. 산발한 머리 사이로 비치는 눈빛이 시퍼렇다.

“다행이군.”

“뭐가?”

구양수가 대답하며 머리를 좌우고 꺾으며 목을 풀었다. 고장추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자 긴장을 풀려는 것이다.

고장추가 한 발 내디디며 말했다.

“네놈이 한 칼 거리에 있다는 게.”

“…!”

“저놈들도 껄끄럽지만 네놈은 더더욱 마음에 안 들어.”

말이 끝나는 순간 고장추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파가 터졌다.

구양수도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양팔을 내리쳤다.

-펑!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확, 퍼졌다.

구양수는 은신탄을 터뜨리는 동시에 비도를 날렸다.

“이 미친놈아! 얘기는 해 보고 싸워야 할 게 아니냐?”

구양수가 발악하듯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쉬이이익!

고장추는 말없이 도를 내리쳤다.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갈라졌다.

“무식한 놈이 힘은 장난이 아니네!”

구양수는 어느새 삼 장 거리에서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대가 이리 무지막지하게 나올지 몰랐던 것이다.

고장추는 구양수가 어찌 십이지대의 비밀을 아는지 궁금했지만 상관없었다.

십이지대 오백 무인과 천무방 삼백 무인이 서로 상잔하고 끝을 보면 된다.

게다가 묘하게도 구양수가 거슬렸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속을 파고든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이다.

고장추가 도를 앞세워 몸을 날렸다. 기어이 구양수를 죽일 생각이다.

그러나 천무방의 무인들도 허수아비가 아니다.

“네놈의 상대는 나다!”

허공에서 평엽이 나타나 도를 내리찍었다.

고장추가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도를 올려쳐 맞받았다.

-쾅!

폭음과 함께 평엽이 허공에서 거꾸로 한 바퀴 돌아 착지하였다.

바로 서지 못하고 주춤주춤 두어 걸음이나 밀려났다.

“으음!”

평엽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한 번 부딪쳤으나 상대의 내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린놈이 무슨 내력이 이리 강하지?’

주태와 추위산도 흠칫, 놀랐다.

당금 무림에서 평엽의 도를 감히 맞받아칠 자가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흑천맹의 선봉대장에게 밀리다니.

그때 흑희가 소리쳤다.

“저 새끼들 다 죽여!”

그러나 십이지대 무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명령권자의 말만 듣는다.

지금 명령권자는 고장추다.

“다 쓸어버려라!”

고장추가 손을 들어 지시하였다. 그러자 십이지대 무인들이 일제히 돌격하였다.

-펑!

-카강!

삼도문 앞 너른 공터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크악!”

비명소리와 함께 기어코 피보라가 일었다.

***

삼도문 망루.

십이지대 오백 무인과 천무방 삼백 무인의 격돌을 보는 삼도문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양 진영 무사들의 무위는 일반 무력대와 차원이 달랐다.

강소군은 십이지대 무사들이 남궁세가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한층 상승하였음을 알았다.

천황성은 아무래도 무공을 급성장시키는 비결이 있는 모양이다.

놀라운 것은 천무방 무력대였다.

신무와 참룡은 예전부터 정예 중에 정예로 꼽혀 왔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듣던 것 이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무방은 잇따른 격전으로 천삼백여 무인 가운데 절반가량을 잃었다.

숱한 격전 끝에 살아남은 자들. 그들이야말로 강자들이다. 그랬기에 십이지대와 맞서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판가름은 수적 열세에서 났다. 수적으로 불리한 천무방 무인들이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강소군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피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핏물이 널리는 광경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무수히 봤던 모습이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거나 고꾸라지는 군상들.

피를 뒤집어쓴 자들의 눈은 시퍼런 살기가 번뜩이고.

끊어진 팔다리가 나뒹굴고 머리통이 떨어져 구르고. 목이 잘린 시신이 죽은지도 모른 채 걸어가기도 했다.

지옥도를 바라보는 강소군의 마음이 점차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의 몸에 밴 오랜 살기가 고개를 쳐들려는 걸 억지로 누르는 중이다.

“저놈들이 양패구상할 때 뒤를 치면 되겠군.”

초지항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동조하지 않았다. 심지어 말을 한 초지항조차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고장추나 천무방이나 삼도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대놓고 눈앞에서 싸우는 것이다.

저들 중 반의 반절만 남아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무공이 저리 강할 줄이야.”

유상화는 고장추가 싸우는 걸 유심히 보았다.

중랑 역시 침중한 얼굴로 고장추를 보고 있었다.

고장추의 무위가 예상 밖이다. 평엽에 이어 주태와 추위산까지 달라붙었다.

신무와 참룡, 진마대의 대주 셋이서 한 사람을 합공하는데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방어를 하기에 급급했다.

‘어디서 이런 놈이?’

주태는 평생 전장에서 살아왔지만 고장추가 대도를 휘두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몇 차례 도를 맞받아 낸 평엽은 이미 내상을 입었는지 악다문 입가에 핏물이 배어 나왔다.

고장추는 철판 같은 대도를 부지깽이 휘두르든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대도에 실린 공력이 엄청나기에 맞받아칠 수가 없었다. 한 번 휘두르면 도세가 삼장을 덮었다.

-콰쾅!

내리찍을 때마다 지면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터졌다. 가까이 있는 무인들이 휩쓸려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곤 하였다.

-슈슉!

간간이 날아드는 구양수의 비도가 아니었다면 세 대주 중에 하나는 벌써 절단이 났을 것이다.

구양수가 이를 악물었다.

“저 새끼가 정말 사람 돌게 만드네?”

구양수가 가죽장갑을 손에 끼더니 등에 맨 보따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은 가죽으로 된 혁낭이다.

“야, 이 멧돼지 같은 새끼야. 여기를 봐라!”

구양수가 혁낭에 손을 집어넣고는 고장추에게 다가갔다.

“위험하오! 물러서시오.”

구양수가 가까이 오자 주태가 소리쳤다.

구양수는 오히려 세 대주에게 말했다.

“대주들은 물러나세요. 이놈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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