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54화 (15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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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취가 죽었다고?”

천주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공손 노야가 침중한 표정으로 보고를 이어 갔다.

“무흔의 보고에 따르면 흑사와 철목삼부(鐵木三斧) 셋째도 당했습니다.”

“그 한 놈 때문에 여러 고수가 죽었군.”

천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쌍렵에 위 태사까지 당했지? 게다가 자네의 본거지까지 홀랑 타 버리고.”

공손 노야가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들 상황이 아니다.

천주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그 어린놈이 자네를 이렇게 곤혹스럽게 만들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천주가 공손 노야에게 시선을 주었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높은 절벽 중턱. 기이하게도 편평한 곳에 그리 크지 않은 성이 들어서 있다.

건축 양식으로 보아 천년은 됨직한 성은 고풍스러운 느낌을 물씬 풍겼다.

성안은 마치 별천지 같았다.

연못과 정원, 가산이 곳곳에 전각과 어우러져 있다.

천해각.

천주가 가장 좋아하는 누각이다.

누각에 오르면 운해 아래로 천하가 내려다보인다.

옆 절벽에서는 가느다란 폭포가 흘러내렸다.

“그래서 청이 있습니다.”

“뭔가?”

“군웅각의 고수들이 좀 더 필요합니다. 그자는 아무래도 본성을 노리고 있는 듯합니다. 삭초제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가 묵묵히 운해를 바라보다 말했다.

군웅각은 삼황오제를 제외한 나머지 고수들이 머무는 전각을 통칭한다.

“군웅각의 고수가 벌써 여럿 당했네. 제왕전에서 나서야 하지 않겠나?”

공손 노야가 흠칫, 놀랐다.

제왕전이라면 오제가 머무는 곳.

“편과 창이면 되겠나?”

공손 노야가 황급히 부복하였다.

편제와 창제를 출성시키겠다는 뜻이다.

“충분합니다.”

“아니, 충분치 않아. 군웅각에서도 열 명을 차출하게.”

“…!”

공손 노야는 소매 속에 감춰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제 중 두 사람이 나서고 군웅각 고수 열 명!

거기에 이미 나가 있는 철목삼부 이 인과 무흔까지.

강호 대파도 밀어 버릴 수 있는 전력이다.

“고수 한 사람을 키우는 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불필요한 희생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군.”

천주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위 태사 후임은 정했나?”

“후보를 찾았습니다. 조만간 끌어들이고자 합니다.”

“흐음. 무림 쪽은?”

“등 노사가 흑천맹을 장악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무림맹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손 노야는 철권호의 상대가 될 만한 자나 껄끄러울 만한 인물을 제거하고 있다.

“오랫동안 봉문하였더니 본성의 존재를 잊은 자들이 있는 것 같더군.”

천주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존재를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우쳐 줄 필요가 있지 않겠나?”

천주가 공손 노야를 보며 말했다.

맑고 투명한 눈빛이 기이하도록 빛났다.

“잘 처리하리라 믿네.”

***

고장추는 정확히 사흘 뒤 오시에 삼도문 대문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의 뒤로 흑천맹 오백 명의 십이지대 무인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무척 운치 있는 장원이군요. 피로 물들이기는 아깝네요.”

고장추의 옆에 선 흑희의 목소리가 요염하다.

“저들이 알아서 비워 주면 굳이 피를 볼 이유가 없겠지.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군.”

고장추는 무슨 일인지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다.

강소군과 중랑은 대문 바로 옆 망루에서 흑천맹 세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무장에는 화천대와 삼도문도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강소군이나 중랑이나 말수가 적기는 마찬가지다.

가만 적진을 내려다보는데 초지항이 올라왔다.

“저들이 뭘 기다리는 걸까?”

초지항이 흑천맹 무인들 앞에 선 고장추와 흑희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중랑 역시 그들을 보며 말했다.

“아마도 천무방을 기다리는 것 같군요.”

“천무방!”

초지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뜻인지 알아챈 것이다.

“우리와 전투를 벌이다 기습을 당할까 염려하는 거로군.”

강소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맞은편 연록색이 우거진 산을 보고 있었다.

봄날 오후.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피 냄새가 섞여 있는 듯했다.

강소군은 자신이 혈마라는 별호에 딱 들어맞는 운명을 가진 게 아닐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가 피하고자 해도 혈풍은 끊이지 않고 따라온다.

그는 대량살상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 길로 접어들었다.

외면할 수도 있었다. 못들은 척 피하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혈옥(血獄)으로 들어온 셈이다.

‘운명이라면 받아주지.’

화양객잔에서 삼도문의 소식을 들었을 때 갈등을 하였다.

그러나 앉아서 연화심이나 중랑의 죽음을 전해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의 인연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오랜 친분을 나눈 사이도 아니고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 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운명처럼 엮인 뭔가가 있다.

‘천성육십사식 때문일까?’

현치자가 삼도문의 회천십이도를 얻는 대신 연성결에게 건넸다는 천성검보.

중랑이 천성육십사식을 펼칠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황궁무고에 있어야 할 무공이 어찌 세상에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부족하다는 건 안다. 아마도 억지로 이어 붙이려는 이유에 불과할 것이다.

강소군이 연화심과 바로 옆에 있는 중랑을 보았다.

중랑이 연화심을 지키려는 건 어쩌면 그 스스로를 위해서일 것이다.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지만 강소군은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처럼 자신 역시 연화심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존재 자체로 도움을 주기도 하는 모양이오.’

자신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심마에 빠져 빗속을 걷다 강가의 정자에서 연화심을 만났을 때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강소군의 정신을 두 번이나 깨웠다.

미혹에 빠져 있을 때 그리고 심마에 들 뻔했을 때.

강소군이 산을 보던 시선을 내려 흑천맹 오백 무인을 보았다.

‘손에 피를 묻힐 운명이라도 내 운명이다. 피하지 말자.’

그가 다가 올 혈전을 받아들였다.

-지잉.

등에 맨 무애검이 울었다.

모두 놀라 강소군을 보았다.

“천무방이 오는 모양이오.”

강소군의 시선이 북쪽 길 쪽으로 향했다.

-두두두두.

선두에 수십 필의 말이 가볍게 열을 맞춰 달려왔다.

그 뒤로 대오를 맞춰 달려오는 무인들.

천무방 정예 중의 정예라는 신무와 참룡, 그리고 진마대였다.

삼도문 대문과 흑천맹과 천무방이 품자형으로 대치하였다.

천무방의 무인들이 도열하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구양수였다.

구양수가 고장추와 흑희를 보며 말했다.

“어이. 거기 머리 어지러운 친구!”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고장추의 눈에서 시퍼런 빛이 번뜩였다.

“나, 천무방 구양수라고 한다. 네가 흑선문, 아니지 이제는 흑천맹인가? 흑천맹 고 맹주의 후계자라며?”

고장추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아래로 보이는 놈이 반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네가 천무방 파락호라는 놈인가?”

고장추가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혔으나 분노를 감출 수는 없었다.

“에헤이. 그렇게 무게 잡지 말고 이리 나와서 이야기 좀 하자!”

고장추가 대답도 하기 전에 흑희가 먼저 나섰다.

“미친놈! 네놈이 뭔데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거냐?”

“넌 또 뭐냐?”

구양수는 흑희에 대해서는 몰랐나보다.

“피죽도 못 먹어 비리비리한 놈이 감히 본녀를 몰라보다니. 두 눈알을 뽑아 개나 줘 버려라!”

흑도의 세계에서 자란 흑희의 입은 걸쭉하였다.

구양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그년, 생긴 건 앙큼한데 입은 험하네.”

구양수 뒤에 선 주태의 얼굴이 붉으죽죽하였다.

이공자가 직접 나선다기에 물러나 있었는데 계집과 말싸움을 하다니.

주태는 천생 무인이었다.

무인들끼리 목숨과 명예를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에게 전장은 무인들이 목숨과 명예를 걸고 싸우는, 그야말로 열혈남아들의 세상이다.

결전을 앞두고 이런 개싸움을 보자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진 것이다.

주태가 앞으로 나서려는데 진마대주 추위산이 슬며시 다가와 소매를 잡아끌었다.

“형님, 이공자에게 맡겨 두시죠.”

진마대주 추위산 역시 천방지축인 구양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구양수의 심계만은 잘 알고 있다. 괜히 저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여 주태를 말렸다.

어쨌거나 구양조는 이번 출정의 전권을 구양수에게 주었다.

주태는 수하들 보기에 창피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구양수는 굴하지 않고 고장추에게 소리쳤다.

“고장추! 본방은 지난날 은원을 잊고자 대승적 결단을 내려 삼도문에게 장원을 돌려주었다!”

구양수의 외침에 흑천맹은 물론 삼도문 망루에 있던 연화심 등도 놀랐다.

“저게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초지항이 버럭 화를 냈다.

목숨을 걸고 탈환하였는데 자신들이 내준 것처럼 말하다니.

구양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감히 흑도의 무리가 삼도문을 침탈한다기에 이리 지원을 나왔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누가 들으면 천무방이 협의 정파인 줄로 착각할 것이다.

“이 좋은 봄날에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할 이유가 있나? 천무방의 면을 봐서 순순히 물러나는 게 어떻겠냐?”

고장추가 산발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체구가 큰 만큼 얼굴도 남보다 컸다. 매부리코에 부리부리한 눈, 두툼한 입술에서 강맹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파락호인 줄 알았더니 여우새끼였군.”

고장추는 애초에 삼도문은 안중에 두지 않았다.

혈마가 있다고 하나 절대적인 수적 열세이니 감히 대문을 열고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목이 파악한 바로 천무방의 병력은 삼백 명.

정예라고 하나 십이지대 오백 명은 그 이상이다.

단번에 깨뜨리고 여세를 몰아 삼도문까지 휩쓸어버릴 생각을 하고 왔다.

그러니 구양수의 수작을 들어 줄 이유가 없었다.

“일대일 생사결을 할 자 나와라!”

고장추가 등 뒤에 맨 커다란 도를 뽑았다.

널찍한 도는 칼이라기보다 기다란 철판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도폭이 거의 두 뼘이나 되고 길이는 넉 자에 이른 대도였다.

마치 노와 같은 도를 들고 고장추가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주태가 자신의 검을 쥐고 말에서 내리는데 참룡대주 평엽이 먼저 나갔다.

“주 형, 저놈이 도를 쓰니 본 대주가 잡겠소.”

주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시오. 어린놈이 제법 기세가 강맹하오.”

평엽 역시 대도를 썼다.

결연한 표정의 평엽이 앞으로 나가려는데 구양수가 막아섰다.

“지금 뭐 하려는 거요?”

“적장이 생사결을 청했으니 당연히 응해야지 않겠소?”

평엽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역시 구양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공자는 아직 전투를 모르시니 뒤로 물러나 계시지요?”

주태와 추위산이 동조하였다.

구양수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이 양반들이? 형님이 제게 전권을 준 걸 잊었나 보네? 전쟁터에서 항명하면 어찌 되는지 모르나?”

구양수의 눈에서 광망이 쏟아졌다.

방금 전까지 흑희와 막말을 주고받던 구양수가 아니다.

평엽 등이 당황하였다.

구양수가 고장추를 가리키며 말했다.

“평 대주가 나갔다가 저놈에게 당하면 어떡할 거요?”

평엽이 불쾌한 얼굴로 구양수를 노려보았다.

“그럴 일은 없을 게요!”

“흥! 그러다 죽으면서 장강의 앞 물결이 어쩌고저쩌고 하려고?”

구양수가 비아냥거리자 평엽이 크게 화를 냈다.

“아무리 이공자라지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구양수는 들은 척 만 척 평엽에게 쏘아붙였다.

“한 발짝만 더 나서면 내 손에 먼저 죽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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