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53화 (15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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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노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표정은 담담하였으나 내심으로는 딴생각을 하였다.

‘이자의 야망이 생각보다 크구나. 어쩌면 흑천맹주를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가 마음만 먹으면 고선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지금 고선을 중심으로 흑도의 세력이 모이고 있으니 당장 처리하는 것이 하책일 뿐. 당분간 그대로 둬야 한다.

흑천맹이 자리 잡는 순간 고선을 죽여야겠다고 등 노사는 결심을 하였다.

그때, 바깥에 있던 무사가 고했다.

“고장추 선봉대장으로부터 긴급 전령이 왔습니다.”

고선이 등 노사를 쳐다봤다. 용무가 끝났으면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이다.

“으흠. 나는 이만 가 봐야겠소. 고 맹주께서 이리 밤늦게까지 흑도를 위해 분주하니 그저 감읍할 따름이오.”

끓어오르는 속마음을 감추며 등 노사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고선이 전령을 불러들였다.

“보고하라.”

“저희가 한발 늦어 삼도문 여식이 천무방 무한지부를 차지하였습니다.”

고선으로서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

“패망한 삼도문에게 그런 힘이 남아 있었다는 말이냐?”

“삼도문 여식이 새로이 문주가 되었는데 무공이 절정을 넘었다고 합니다.”

“….”

고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골치 아프게 됐다.

그는 흑도이지만 명분을 중요시하는 행보를 택하고 있다.

천무방 무한지부를 치는 건 괜찮지만 이 시점에서 삼도문 장원을 빼앗는 건 정파의 공분을 살 수가 있다.

“대장님께서 하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대로 진행하라 일러라.”

고선이 고심하다 명을 내렸다.

명분이 약해지긴 했지만 어찌됐든 흑도의 힘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십이지대의 전력이 약화되면 금상첨화다.

‘남의 칼은 한 번 쓰고 빨리 버리는 게 낫다.’

고선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연화심은 몇 되지 않지만 삼도문 체계부터 잡았다.

초지항을 호법으로 삼고 화천대주를 겸하게 하였다.

지략이 뛰어난 유상화를 총관으로 삼았다.

“나는 뭘 하지?”

중랑이 물었다.

“오라버니는 오라버니지요. 감히 제 밑에 둘 수 있나요.”

연화심은 가지고 있는 돈을 풀어 새로이 무사를 고용한다는 내용을 공포하였다.

“오라버니께서 낭인 생활을 하셨으니 옥석을 가려 줄 것이라 믿겠어요.”

연화심은 중랑에게 무인 선발을 맡겼다.

발 빠르게 움직였으나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흑천맹 오백여 무인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입니다.”

포구에 정찰 나갔던 문도가 급하게 기별을 보내 왔다.

연화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오백 무인이라면 어지간한 대파와도 맞붙을 만한 무력이다.

“초 호법과 유 총관을 불러라.”

연화심이 초지항과 유상화, 그리고 중랑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려 할 때였다.

전령 하나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천무방에서 무한지부를 되찾겠다고 무력대를 움직였습니다. 삼백 명이 달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천무방의 반발을 예상했으나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 몰랐다.

“천무방은 천하비무대회에 참가할 생각이 분명합니다. 그에 앞서 교두보를 잃고 싶지 않겠지요.”

유상화가 천무방의 의중을 읽어냈다.

“무한에 무림맹이 들어서는 게 우리에게는 화근이 된 셈이군.”

초지항이 투덜거렸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유상화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잘되다니?”

유상화가 빙긋 웃었다.

“호랑이 한 마리보다 세 마리가 있는 게 나을 때도 있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호랑이끼리 먹잇감을 두고 싸우게 해야지요.”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야죠. 궁리를 좀 해 보겠습니다.”

연화심이 물었다.

“그런데 호랑이가 세 마리라고 했는데 또 한 호랑이는 어디를 말하는 거지?”

“무림맹을 결성하려는 정파 역시 호랑이나 마찬가지지요.”

“….”

그때 대문을 지키던 무사가 달려와 보고하였다.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다.

“강 대협께서 오셨습니다.”

“강 대협?”

“강소군 대협 말입니다.”

지난날 삼도문 대문 앞에서 벌어진 혈전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다.

강소군은 삼도문도들에게는 투신이나 마찬가지다.

대문에서 몇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강소군과 노이칠, 그리고 팽씨 형제였다.

“하하. 연 낭자! 오랜만이오. 멀리서 온 늙은이를 박대하지는 않겠지?”

노이칠이 다가오며 장난스레 손을 흔들었다.

연화심은 가슴이 벅찼다.

강소군과 노이칠.

두 사람만 있어 줘도 큰 힘이 된다.

연화심이 강소군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삼도문의 위기를 보고 와 줄 줄은 몰랐다.

고장추가 으름장을 놓고 간 뒤 삼도문 앞을 얼씬거리는 이가 없었다.

무사를 모집한다고 서둘러 공고를 했으나 흑천맹과의 결전을 앞두고 자원하려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비장한 결심을 하였으나 침울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중랑에 이어 강소군 등이 나타나니 분위기가 바뀌었다.

삼도문 장원에 활기가 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화심을 감격하게 만든 일은 그날 오후에 또 벌어졌다.

삼도문 대문에 무한의 상인과 부호들이 몰려왔다. 그들이 끌고 온 수레에는 삼도문이라 쓰인 커다란 현판이 실려 있었다.

“삼도문이 돌아왔는데 현판이 없어서야 되겠소?”

대적을 앞두고 경황이 없어 현판조차 달지 못하고 있었는데 무한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둬 현판을 새겨 온 것이다.

비록 대적과 싸우는 일에 가담할 수는 없지만 삼도문이 무한의 문파라는 뜻을 피력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연화심이 눈물을 글썽였다.

***

“천무방이 오고 있다는 말이지?”

산발한 머리에 가려진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고장추의 관심은 애초부터 천무방이었다.

한때 천하사패로 무림일통에까지 나선 천무방.

그들과 일전을 벌이는 건 고장추가 기대하던 바였다.

천무방 무한지부가 고작 몇십 명의 삼도문도에 의해 쫓겨났다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천무방이 무력대를 끌고 온다니 귀가 번쩍 뜨였다.

“누가 인솔하고 있더냐? 구양조인가?”

구양조의 이름은 호남성 일대에서 높다.

과거 천무방 무력대를 끌고 요천루의 잔여세력을 병탄할 때 앞장섰던 이가 구양조였다.

호남성 일대에서 그의 별호가 천무공자였다.

그만큼 청년 무인들에게는 경원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아닙니다. 그러나 천무방 최고의 무력 신무대주 주태가 이끌고 있습니다.”

“으음.”

상대하기는 구양조보다 주태가 더욱 까다롭기는 하다.

흑천맹에서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주태는 구연강의 심복이었던 자로 백전노장의 고수다.

“그리고 참룡대와 진마대 등 천무방의 주력이 모두 출동하였다고 합니다.”

“흐음… 어쩐다?”

고장추는 잠시 갈등하였다.

삼도문 잔당을 쓸어버리고 장원을 점령한 뒤 적을 맞는 게 나을지 아니면 우선 천무방부터 꺾고 삼도문을 치는 게 나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호호호. 사형이 고민하는 걸 보니 적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네요?”

고장추가 고개를 돌려 보니 요염한 여인이 서 있다.

이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은 흑의무복이 잘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고장추의 사매이자 고선의 제자 흑희(黑姬) 조비추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사매가 웬일이냐?”

“사부께서 보내셨지요. 사형이 사고칠까 봐.”

“사고라니. 사형을 뭘로 보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고장추는 흑희를 반가이 맞았다.

“사부님께서 전하라는 말이 있으셨어요.”

“아버님이?”

“남의 칼이다, 라는 한마디였어요.”

고장추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때 십이지대 백서대주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삼도문에 혈마가 들었다고 합니다.”

“혈마? 아!”

고장추 역시 혈마의 명성을 들었다.

고장추 또한 야망이 있다. 흑천맹을 무림제일방파로 키우고 그 정점에 앉아 천하를 오시할 생각이다.

그 자리까지 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자들을 제거해야 한다.

혈마 강소군 또한 그의 살생부 명단에 있는 인물이다.

“흐흐. 잘됐군. 천무방에 이어 혈마까지. 이참에 모두 쓸어버릴 수 있겠군.”

백서대주가 고개를 저었다.

“삼도문을 치는 걸 재고해 보시라고 온 것입니다.”

“뭐라?”

백서대주는 강소군의 무위를 잘 안다.

십이지대 천 명의 무인을 무인지경으로 휘젓고 조개량의 목을 딴 강소군이다.

고장추가 아버지 고선 밑에서 세상 무서움 모르고 지옥문을 열려하니 막을 생각으로 온 것이다.

“하하하. 재고? 이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말인가? 그러고도 무인이라고 할 수 있나?”

고장추가 어이없다는 듯 대소를 터뜨리며 조비추에게 동조를 구하듯 바라보았다.

백서대주의 눈빛에 잠시 살기가 스쳤으나 고장추와 조비추는 알지 못했다.

“그는 절대지경의 고수요. 절대고수가 무력대 두셋과 맞먹는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오?”

고장추가 웃음을 그치고 백서대주를 바라보았다.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비친 고장추의 두 눈에서 광망이 흘러나왔다.

백서대주는 감히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절대고수라고?”

고장추의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뻗쳐 나오는 듯했다.

“그들의 목은 철갑이라도 둘렀다는 말인가?”

고장추의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전신에서 기운이 폭사되었다.

“헉!”

백서대주가 크게 놀라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한 걸음 물러났다.

‘고 대장이 이렇게 막강한 공력을 지니고 있었다니?’

백서대주는 자신을 압박하는 고장추의 기도에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백서대주 역시 만만치 않은 자다. 절정에 이른 그의 공력으로 봤을 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절대지경?’

백서대주가 놀라 고장추를 다시 보았다.

고장추의 눈빛은 몸을 꿰뚫을 것처럼 강렬하였다.

“흑선문이 오늘을 위해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 안다면 감히 내 앞에서 절대지경 운운하지 못할 것이다!”

백서대주는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기운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사형, 적당히 하세요. 일개 대주가 뭘 알겠어요.”

흑희가 고장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사방을 점하며 폭주하던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다.

바닥을 짚은 백서대주의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고장추의 기운에 대항하느라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가 봐라. 또다시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면 목부터 내놔야 할 것이다.”

***

천무방에 대한 흑천맹의 정보에는 빠진 내용이 있었다.

신무와 참룡, 진마 삼 대를 이끄는 수장은 신무대주 주태였지만 그 옆에 한 사람이 붙어 있었다.

“이공자께서는 후위에 계시지요.”

주태가 만류했으나 구양수는 한사코 본진을 지휘하는 주태와 나란히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천무방 이공자 구양수에 대해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무공이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고 주색잡기에 빠진 파락호. 그게 세간에 알려진 이공자에 대한 평가다.

심지어 천무방 사람들조차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니 구양수가 따라온 게 주태로서는 탐탁지 않았다.

“에헤이. 신무대주께서 저를 그리 띄엄띄엄 보시다니 정말 실망스럽군요.”

‘평소 행실이 그런데 뭘 잘못 봤다는 거냐?’

주태가 속을 투덜거렸다. 그러나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공자의 안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오.”

구양수가 피식, 기괴한 웃음을 짓더니 목을 우두둑 꺾으며 말했다.

“흐음. 모르시는군요? 누구나 각자 싸우는 방식이 따로 있단 말입니다.”

구양수가 돌연 뒤쪽을 향해 손짓을 하였다.

-휙!

비도가 날아가더니 보급품 수레를 밀고 오던 일꾼의 머리에 꽂혔다.

주태가 황당하여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함부로 사람을 죽이다니!”

“흐흐. 맞지요. 맞아.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되죠. 하지만 쥐새끼는 잡아야 하는 것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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