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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시대의 흐름은 참 절묘하지? 천하사패가 중원을 할거하던 시기가 지나가니 여러 문파가 합종연횡하여 무림맹을 만들다니.”
남궁천 등 세가와 대파가 나서서 무림맹을 결성하려는 이유는 공교롭게도 천무방 때문이었다.
하나의 세력이 너무 커지면서 주위 문파를 복속시키거나 병탄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방의 독주에 위협을 느낀 대파와 세가는 그런 세력이 또다시 나오는 걸 막고자 무림맹을 만들려 한다.
“하지만 정작 무림맹이 출범하면 어떤 존재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
강호에 유례없는 일이니 노이칠도 무림맹의 장래를 알 수가 없었다.
“대정무각도 비무대회에 참가합니까?”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천황성을 상대하는 것이네.”
노이칠이 고개를 저으며 오히려 되물었다.
“자네는?”
“무림의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천황성을 추적하기 위해 가는 것뿐입니다.”
“지난 십 년간 흔적조차 잡기 어려웠던 그들이네. 그런데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걸로 봐서 분명 무슨 속셈이 있을 것이네.”
“점창 사일신창도 습격을 받았다더군요.”
노이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맹주 후보가 될 사람을 제거하려는 속셈이겠지.”
노이칠이 술을 마시고는 입맛을 다셨다.
“대파와 세가에서는 암묵적으로 남궁악이 맹주가 되리라고 봤지. 대파는 대개 불가나 도가 문파가 아닌가. 세속적인 맹주의 자리를 맡기에는 부담스럽지. 세가에서 나온다면 남궁악이었는데 이번에 그가 불구가 되고 말았지.”
강소군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악이 꺾인 것은 그로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무림맹주라는 자리에 맞지 않았다.
강소군은 무림맹주라는 자리는 황제 위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경우에 따라 자신의 혈족도 죽이는 냉혈한들이다. 권력이란 결코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런 면에서 남궁악은 무인 그 자체였지 맹주라는 자리를 맡을 성정이 아니었다.
“남궁악이 그렇게 되자 오히려 갑자기 천하비무대회가 무림인들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네. 대파는 물론이고 각 세가, 중소문파의 고수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지.”
“유력한 후보가 누구입니까?”
“사일신창이었는데 그가 암습을 받아 중상이라니 이제 누가 유력하다 말할 상황이 아니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사람이 들어오다 말고 황급히 나가려 했다.
“어째서 자리를 피하는 겁니까?”
강소군이 나가려는 중년서생의 뒤를 향해 물었다.
중년 서생 낙서생이 돌아서더니 무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술 생각이 나서 들어왔는데 두 분이 밀담을 나누는 걸 보고 자리에 앉기가 그래서 돌아가려고 한 것뿐이오.”
노이칠이 낙서생을 흘깃 보고는 강소군에게 말했다.
“강호에 풍문을 즐겨 전하는 이가 있는데 과거에서 세 번 낙방하여 낙서생이라 부른다지?”
“세 번 낙방한 사실은 몰랐습니다.”
강소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낙서생이 얼굴을 붉히며 다가왔다.
“누가 그러오? 세 번 아니오. 한 번 떨어지고 그다음에는 아예 응시를 안 했는데.”
그러더니 강소군에게 말했다.
“이분은 뉘신지….”
강소군이 다시 한 번 웃었다.
하오문주 낙서생이 대정무각의 십각주 노이칠을 모를 리 없다.
객잔에 들어서다 말고 나가려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오문이나 대정무각 십각이나 정보를 수집하는 곳이니 경쟁자나 다름없다.
“차를 팔러 다니는 상인일 뿐이오.”
노이칠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강소군은 그가 낙서생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거론하고 싶지 않았다.
노이칠이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고아한 학사께서 상인의 술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앉으셔도 좋소.”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는지. 술에 귀천이 있을 리가 없잖소.”
낙서생이 덥석 자리에 앉았다.
술이 몇 순배 돌았다.
노이칠이나 낙서생이나 뱃속에 능구렁이가 수십 마리는 들어찬 인물들이다.
서로의 신분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담소를 나눴다.
낙서생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렇게 술을 대접 받으니 들은 풍문을 털어놓지 않을 수가 없구려. 노 형은 무한 쪽으로는 당분간 가지 마시오.”
“헉? 그게 무슨 말이오? 이번에는 구입한 차가 양이 꽤 많아 배편으로 가려고 하던 참인데.”
낙서생이 주위를 경계하는 몸짓을 하더니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전형적인 매화자의 수법이다. 마치 극히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기라도 한다는 듯 낙서생이 말했다.
“호남에 흑천맹이라는 방파가 들어섰다는 이야기 들어 봤소?”
“그쪽에 사파와 흑도가 우글거린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소.”
“요천루주가 죽고 사파가 지리멸렬할 때 천무방이 가서 그 지역을 장악했는데….”
낙서생이 말을 끊고는 스스로 술을 따라 마셨다. 역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전형적인 매화자의 수법이다.
“어서 말해 보구려. 궁금하잖소.”
노이칠은 알면서도 맞장구쳤다.
강소군은 둘이 하는 양을 보고 있자니 내심 웃음이 나왔다.
“고선이라는 자가 흑천맹이라는 걸 만들어 사파와 흑도를 모두 끌어모으더니 천무방을 쳤소.”
“…?”
대정무각 십각과 하오문은 정보조직이지만 수집된 정보의 성격이 약간 다르다.
대정무각 십각의 정보원은 주로 지방 관아의 무인들이다. 그러니 관아에 접수된 사건이나 알려진 무림문파들의 동향이 주로 보고된다.
반면 하오문은 객잔과 기방, 도박장 등에서 정보를 모으기에 무림의 밑바닥 소식에 민감하다.
흑천맹은 흑도와 사파의 연합이니만큼 하오문이 빠를 수밖에 없다.
“천무방은 봉문하다시피 하고 있으나 그래도 가진 힘이 적지 않은데 흑도가 무리한 짓을 했군요.”
노이칠의 말에 낙서생이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오. 그런데 놀랍게도 흑천맹이 천무방을 장강 이북까지 단번에 밀어냈지 뭐요.”
“…?”
노이칠이 흠칫, 놀랐다.
천무방의 세가 줄었다하나 천하사패 중에서도 단연 강자였다. 그런데 신생 방파인 흑천맹이 단숨에 천무방을 밀어 버렸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낙서생이 강소군을 흘깃 보았다.
강소군은 낙서생이 자신을 찾아온 데는 그 이상의 정보가 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흑도의 힘이 그리 강했소?”
노이칠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명색이 정보를 취급하는 십각주인데 아직 그런 소식은 들어오지 않았다.
흑도가 모여 큰 세력을 이루는 일은 이제까지 없었다. 대개 지역마다 패자가 있어 영역 다툼을 하는 정도였다.
“흑천맹주 고선이 그동안 심혈을 기울였는지 무력대가 무려 수백이 넘는다고 하오. 그것도 하나같이 일류급이라고 하더이다.”
노이칠과 강소군의 시선이 교차했다.
‘천황성!’
두 사람의 머릿속에 천황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이다.
낙서생은 자신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음을 알았는지 흐뭇하게 웃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게….”
낙서생이 강소군을 보며 말했다.
“승기를 잡은 흑천맹이 내친 김에 천무방 무한지부를 친다는 소식이오.”
“천무방 무한지부?”
“예전 삼도문이 있던 자리가 천무방 무한지부가 되지 않았소? 흑도가 장강 이북에 거점을 마련하려는 것이겠지요.”
“무한은 지금 천하비무대회를 앞두고 정파의 고수들이 모이고 있는데 흑천맹이 감히 강을 넘는다는 말이오?”
“그러니까 교두보를 심어 놓으려는 것 아니겠소. 어쩌면 벌써 넘었을 지도 모르지요.”
노이칠이 별안간 전전긍긍하였다.
그 모습을 본 낙서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봐야겠소. 술도 적당히 얻어먹어야지. 과하면 거지 취급 받지 않겠소?”
낙서생의 입꼬리에 승자의 웃음이 스쳐 갔다.
은근히 경쟁했던 대정무각 십각보다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낙서생이 객잔을 나갔다.
강소군은 하오문에게 천황성의 동정을 파악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문주인 낙서생이 직접 소식을 가져온 것이니 믿을 만한 소식일 것이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건 노이칠의 반응이다.
노이칠이 안절부절못하자 강소군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
삼도문의 장원이 활짝 열렸다.
화천대와 삼도문도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천무방이 언제 세를 규합하여 되돌아올지 몰랐다.
그러나 삼도문의 귀환을 환영하는 무한의 상인과 지인들의 방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 숙부님!”
연화심은 초지항과 함께 연성결 등의 묘를 찾아 배례를 올렸다.
“문주님, 손님들이 많습니다. 이만 내려가서 맞이하셔야죠.”
초지항은 하염없이 묘를 바라보는 연화심에게 말했다.
연화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켜봐 주세요. 삼도문은 다시 일어설 겁니다.”
연화심이 묘소를 내려와 대전으로 갔다.
낯익은 얼굴도 있고 새로운 인물도 있었다. 삼도문의 귀환을 축하하러 온 이도 있었고 새로운 문파가 어떤 성향인지 알아보러 온 이도 있다.
연화심이 대전 상석에 올라 예를 취했다.
“여러분께서 삼도문의 귀환을 반겨 주시니 돌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와아!”
-짝짝짝!
여러 사람이 환호를 하고 박수를 쳤다.
“무한 사람들은 삼도문을 잊지 않았소. 천무방이 패악질을 부렸을 때 비로소 삼도문이 얼마나 공정한 문파였는지 알게 되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오.”
누군가 외쳤다.
“옳소!”
사람들이 환호하였다.
“이제 막 장원을 되찾았습니다. 여러분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연화심의 말이 끝나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미 패망한 문파를 다시 일으켜서 뭐할 건가? 강호는 음험하니 어린 여자의 몸으로 문파를 어찌 건사한다는 말인가?”
쇳소리가 섞인 우렁찬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연무장을 가로질러 한 무리의 흑의인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앞장선 이는 풀어헤친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다.
대략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거한이었다. 온몸에서 풍기는 거친 기세가 주위를 압도하였다.
화천대원 하나가 달려와 보고하였다.
“기다리라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들어왔습니다.”
연화심이 산발 거한을 향해 예를 취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산발 거한은 당당하게 대전으로 걸어 올라왔다.
그의 등에 달린 대도는 길이도 넓이도 보통 칼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나는 흑천맹의 선봉 고장추라고 한다. 여기는 흑천맹이 접수하려고 이미 점찍어 둔 곳이다. 한발 늦었지만 비켜 줘야겠다.”
고장추의 새된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흑천맹?”
“장강 이남이 흑천맹 세상이 되었다더니….”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흥!”
초지항이 콧방귀를 꼈으나 나서지 않았다.
문주인 연화심이 옆에 있으니 함부로 끼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연화심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흑천맹이라… 귀파가 득세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요.”
연화심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삼도문의 영역에서 흑도가 활개 치게 놔둘 수는 없지요.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초 대주께서는 손님을 내보내세요.”
말도 섞기도 싫다는 듯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
“크흐흐. 몇 되지도 않은 잔당으로 감히 흑천맹의 명을 거역할 셈인가?”
“이봐, 문주님 말씀 못 들었나? 오늘은 좋은 날이니 그냥 돌려보내 주마.”
초지항이 나서며 자신의 도를 손으로 툭툭 쳤다.
“하하하. 좋군 좋아. 피를 원한다면 사양하지 않지. 아니, 원하는 바이다.”
고장추가 크게 웃으며 대전을 나가며 을렀다.
“사흘 후 다시 오겠다. 그때 얼씬거리는 놈이 있으면 삼도문과 함께 땅속에 묻어 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