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대단한 결투였지. 내 생애에 구 방주가 위기에 몰리는 건 처음 봤거든.”
구연강과 삼도문 의형제들이 싸울 때 조배극은 천무방도들과 함께 이 자리에서 지켜보았다.
자칫 구연강이 위험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뛰어들 뻔했다.
그럼에도 지켜만 봤다.
조배극은 구연강이 왜 연성결 등과 직접 겨뤘는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상대가 없어진 무인.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는 호랑이는 홀로 늙어 간다.
‘그랬을 거야. 연성결은 싸워 볼 만한 늑대였으니까.’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을 알고도 남은 연성결과 형제들을 보자 구연강은 무인으로서의 호기가 치솟은 것이다.
조배극이 연화심과 초지항을 보았다.
새파란 나이들이다. 눈에서 빛나는 형형한 분노, 그리고 파릇파릇한 의지.
“….”
구연강과 그 역시 이렇게 시작했다. 조배극은 구연강과 오랜 세월 함께하며 전장을 누볐다.
구연강의 부친을 죽였던 문파… 이제는 그 문파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물셋 구연강이 복수를 하러 가던 날. 패기만만했던 그 무리에 조배극도 있었다.
모두 스무 명이 몰려갔고 악전고투 끝에 일곱 명이 살아남았다.
그 이후 천무방이 천하사패에 오르기까지 숱한 전장에 조배극이 있었다.
어느 날 돌아보니 함께 싸웠던 형제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몇 남지 않았다.
싸워야 할 적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천무방이 커 가며 숱한 무인들이 들어왔고 무력대라며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사냥하듯 문파들을 휩쓸었다.
언제부터인가는 천무방의 이름을 앞세우면 알아서 기었다.
그러면서 그의 검은 녹슬어 갔다.
근자에는 삼도문이 유일하게 끝까지 저항한 문파다.
조배극은 오랜 세월 구연강과 함께 천무방을 위해 싸웠던 공신이었으나 줄을 잘못 섰다.
그는 마씨 부인과 구양운을 지지하였다. 마씨 부인 세력이 몰락하며 그는 무한지부 호법장로로 발령이 났다.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었다.
‘이제 가자. 구 대형, 먼저 가서 기다리겠소.’
그는 요즘 부쩍 먼저 간 형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챙!
조배극이 검을 뽑았다.
“대문을 넘으려면 나를 쓰러뜨려야 할 게다.”
연화심이 나서려는데 그보다 앞서 초지항이 걸어 나왔다.
초지항은 연성결의 직전 제자나 마찬가지다. 최후의 복수는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다.
보기에는 뒷방 늙은이 같으나 초지항은 조배극이 절정을 넘어선 고수라는 걸 직감하였다.
연화심의 무공이 자기보다 뛰어나다는 건 안다. 허나 상대는 산전수전을 겪은 늙은 고수다.
한 번이라도 더 생사 격전 경험이 많은 자신이 나서는 게 맞았다.
“문주님, 회천십이도로 대문을 열게 해 주십시오.”
초지항이 도를 거꾸로 쥐고 연화심에게 예를 취했다.
연화심이 고개를 끄덕이자 초지항이 앞으로 나섰다.
“좋소. 당신의 검을 부러뜨리고 대문을 넘겠소.”
초지항이 도를 세웠다.
조배극이 비스듬히 검을 들었다.
“와라!”
초지항은 사양하지 않았다.
-쉬이익!
초지항의 대도가 우직하게 허공을 베어 갔다.
조배극의 검이 빙그르르 돌며 초지항의 도면을 살짝 쳤다.
-채앵!
초지항의 일수는 선공으로서 예를 취한 것.
조배극 역시 선배가 아니라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초지항의 예에 답했다.
예가 끝나자 도세가 급변하였다.
-쉬쉬쉭!
도세가 허공을 가르더니 도풍이 거세게 몰아쳤다. 이어서 도광이 조배극을 향해 쭈욱 뻗어 나갔다.
조배극은 내심 흐뭇했다. 오랜만에 검을 겨룰 상대를 만나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은 도법이다! 나의 검도 받아 보거라!”
그가 평생 수련했던 조양검법(調陽劍法)이 펼쳐졌다.
-퍼엉!
앞으로 찔러 간 검에서 밝은 빛이 터지고 사방으로 퍼져 갔다. 빛 속에 가는 선들이 일렁였다.
검기다.
그는 전력을 다했다. 검기를 이루고도 싸워 볼 상대가 없어 늘 그 자리에 머물렀던 늙은 무사.
그는 유감없이 싸우려는 듯 전신 내력을 모두 끌어 올렸다.
-쾅!
일렁이는 검기와 초지항의 대도가 연달아 격돌하였다.
도격은 연속하여 같은 곳을 집요하게 두드렸다. 막히면 하늘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두드렸다.
-쾅! 콰쾅! 쾅!
늙은 무사의 검은 정교했고 서른 중반 도객의 대도는 강맹하였다.
팽팽한 접전이었다.
어느 순간.
초지항의 우직했던 도가 급변하였다. 허공에 수많은 도영이 일렁이더니 무리를 지어 조배극을 향하여 쏟아졌다.
“좋구나!”
조배극은 구연강과 연성결의 생사결에서 이 도법을 보았다. 그때도 꽤나 유려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 보니 유려함 속에 강맹함이 들어 있다.
-콰콰쾅!
도격이 연달아 터지며 정교한 검세가 결국은 깨졌다.
-퍼억!
최후의 일도가 조배극의 마른 가슴을 훑고 갔다.
조배극의 검이 멈췄다.
“…?”
초지항도 도를 내렸다. 그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마지막 도격.
조배극과 같은 고수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배극은 검세가 깨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왜?”
초지항이 물었으나 조배극은 답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큭큭큭. 구 대형이 당할 만하군.”
조배극의 머릿속에는 구연강이 이 한 수에 등을 베이던 순간이 떠올랐다.
-쿨럭!
조배극은 말을 마치자마자 피를 토했다. 도기가 훑고 가며 내장이 갈리고 뒤틀렸다.
비틀.
조배극은 검을 지팡이 삼아 짚고 간신히 버텼다.
눈앞이 점점 어두워지며 사물이 어둠속으로 묻혀간다.
“연 낭자!”
조배극이 연화심을 불렀다.
연화심이 한 발 앞으로 나섰으나 조배극은 이미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기척을 느끼고 연화심 쪽을 향해 말했다.
“삼도문 세 문주의 묘는 장원 뒷산에 있네.”
조배극이 입에서 피를 연신 뿜으려 말했다.
“강호의 은원을 따지자면 끝도 없이 피를 봐야 하지. 이 늙은 목숨은 별게 아니지만 천무방과의 은원은 이걸로 끝내 줄 수 있겠나.”
조배극은 삼도문을 치는 순간 천무방이 정점에 올랐다가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구연강을 말리고 싶었으나 천하일통의 야욕에 사로잡힌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구 대형, 연 문주와의 싸움이 무인으로서 마지막 싸움이었을 것이오. 그걸로 우리 시대는 끝난 것이었을 게요.’
조배극은 딱히 연화심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천무방의 시작부터 쇠퇴까지 지켜본 공신으로 마지막 희망을 이야기한 것뿐이었다.
“그럴 겁니다. 천무방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 한, 복수에 매달려 헛된 피를 흘릴 생각은 없습니다.”
연화심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조배극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늙은 무인이 검과 함께 쓰러졌다.
***
화양객잔 반점에 손님은 그들뿐이다.
“장 노대도 객잔을 접을 때가 됐나보군. 손님이 너무 없어.”
노이칠이 중얼거리며 술을 따랐다.
“자시가 가까워졌는데 누가 오겠습니까?”
강소군이 자신의 잔을 들어 마시고는 말했다.
“장웅, 그 녀석 끝내 집을 나갔다더군. 무슨 방파에 들어갔다던데.”
장 노대의 손자 장웅은 결국 강호에 뛰어들었다.
“그놈이 올해 안에 시신으로 돌아온다에 이 잔을 걸겠네.”
노이칠이 주방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장 노대를 보며 안타까워하였다.
“저는 그가 자신의 꿈을 이룬다에 이 잔을 걸겠습니다.”
강소군이 말했다.
노이칠이 놀란 듯 강소군을 가만 보다 피식, 웃었다.
“자네는 참 여러모로 놀라게 하는군.”
“….”
“여기서 자네를 만났지. 아니, 허깨비를 처음 본 거지.”
노이칠은 많은 사람을 만났다.
강소군을 처음 본 순간 영혼이 없는 존재를 본 듯했다.
“그때 자네는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괴물이었다고.”
눈앞의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자, 앞을 막으면 가타부타 말도 없이 베어 버리는 살귀, 맹목적으로 연화심의 안위를 챙기던….
“대체 연 낭자를 그토록 챙긴 이유가 뭔가?”
노이칠이 느닷없이 투덜거리듯 물었다.
“중랑이나 자네나 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강소군이 무슨 뜻인지 몰라 노이칠을 봤다.
“아, 오해하지 말고. 나도 연 낭자를 아낀다고. 하지만 자네나 중랑이 하는 걸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아.”
‘남녀 간의 정도 아닌 것 같고….’
노이칠은 마지막 말을 삼켰다.
중랑은 연화심의 안위를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그 때문에 노이칠이 그렇게 회유하는데도 대정무각 일각주의 자리를 거부하고 있다.
노이칠은 중랑이 어린 시절 누이를 잃었던 사연은 모른다.
남녀 간의 정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옆에서 본 바에 의하면 그것도 아니다.
정말 도원결의에 버금가는 의남매로 선을 넘지 않았다.
혹시 남녀 간의 정이 있는지 슬쩍 떠보았다가 중랑이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모른다.
노이칠은 강소군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하자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아! 내말은 그때 자네는 뭐랄까, 그야말로 마인 같았지. 그런데 지금은….”
노이칠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자 술잔을 들어 훌쩍, 마셨다.
“아무튼 자네가 인간이 되어서 좋다고. 선배에게 꼬박꼬박 존대도 하고. 정말 마음에 든다고. 됐나?”
강소군은 실소를 흘렸다.
노이칠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그래, 이 밤중에 술자리를 청한 이유가 뭔가?”
간밤에 피투성이가 되어 들이닥친 강소군과 팽씨 형제는 온종일 객방에서 요양을 하였다.
노이칠은 졸지에 그들을 지키는 호법 신세가 되어 객잔을 떠나지 못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강소군이 나오더니 그에게 술자리를 청한 것이다.
강소군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단기간에 무공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도가 있습니까?”
강소군의 물음에 노이칠이 술잔을 들다 말고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자네 무공이 뭐가 부족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가?”
강소군이 불취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노이칠은 천황성 천주라는 자가 무인을 절대지경으로 끌어주는 비법을 지니고 있다는 말보다 지금 있다는 고수의 숫자에 놀랐다.
“절대지경에 든 고수가 일백이라고?”
노이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봉황수에 의해 백정무가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런 자가 일백이나 된다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노이칠이 한참 생각하고는 말했다.
“소림에 개정대법(開頂大法)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네. 고수가 자신의 내공을 이용하여 정문(頂門)을 열고 체질을 바꿔 무공을 단기간에 끌어올린다고는 하는데… 실제로 행해졌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네.”
“아예 없는 건 아니군요.”
“사파에도 이형체환술(移形體環術)이라는 무공이 단기간에 내공을 급증시켜 줄 수 있다고 하지. 채음보양술이나 마교의 흡정대법도 그런 효과가 있다고도 하고.”
말을 하는 노이칠도 확신을 할 수 없었는지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었다.
“이 모두가 강호에 떠도는 이야기일 뿐 그런 방법으로 고수가 나왔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네.”
“겨뤄 본 바에 의하면 정상적인 수련으로 경지에 이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천주라는 자에게 뭔가 비법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강소군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으음.”
노이칠은 그런 게 가능하겠냐고 부인하고 싶지만 강소군이 직접 겨뤄 보며 느꼈다고 하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안채에서 팽일소가 나오더니 강소군에게 다가왔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형님을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팽일소가 나가려는데 노이칠이 물었다.
“이 밤중에 나가다니. 혹시 개방을 찾으려는 거요?”
팽일소가 깜짝 놀라 노이칠을 보았다.
강소군과 안면이 있는 상인 정도로 생각했는데 무림인이었나 보다.
“개천가에 있는 용왕묘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요.”
팽일소가 포권을 하였다.
“무림의 선배님을 몰라 뵈었군요. 존함이 어찌되시는지?”
“에이, 무림은 무슨. 그저 차를 사고파는 상인이오. 눈치가 좀 빠르다고나 할까?”
팽일소는 상대가 정체를 밝히기 꺼리는 걸 알고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노이칠이 팽일소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대파와 세가가 요즘처럼 뭉친 일은 참으로 드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