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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가는 중요치 않아.”
불취가 말하더니 강소군이 마시다 남겨 둔 술병을 가리켰다.
“술이나 주지?”
죽어 가는 순간에도 기어이 술을 찾는 걸 보니 불취가 아니라 주귀임이 틀림없었다.
강소군이 술을 가져다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젊어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는 서른 중후반은 되어 보였다. 그래도 제법 준수하고 젊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불취가 술병을 들어 벌컥, 마셨다. 술이 들어가자 창백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불취는 술병을 든 채 건너편 절벽의 노란 꽃무더기를 쳐다보았다.
강소군이 물었다.
“천주가 왜 당신을 죽이려는 거요?”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까?”
“….”
“남궁가에 갈 자는 원래 나였거든. 그런데 싫다고 했지.”
“왜 거절한 거요?”
“마침 마시던 술이 많이 남아 있었거든.”
불취는 진짜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검이나 가져다줘. 나는 워낙 게을러서 먼 길은 딱 질색이라고.”
“알았소.”
강소군이 창천검을 검집에 꽂았다.
불취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천주는 만나지 마. 좌우사자라는 놈도. 아, 그렇지. 삼황이란 노인들하고 오제라는 무식한 놈들도 피하는 게 좋아.”
“삼황오제? 광오하군.”
“그뿐인가? 십왕도 있다고. 봉황수 같은 자들은 천황성전에 이름도 못 올리지.”
강소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고수가 있기에 봉황수조차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말일까.
“크크크. 그렇게 놀란 표정을 하지 말라고. 어울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불릴 만하지. 천황성 백 명의 절대고수가 다 붙어도 그들을 죽이기 힘들 거야?”
“….”
불취는 다시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정말 다 마시고 죽을 모양이다.
“대체 그 많은 고수들이 왜 천황성을 따르는 거요?”
불취가 큭큭, 거렸다.
“질문이 틀렸어. 따르는 게 아니라 복종하는 거지.”
“대체 왜?”
“생각해 봐.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어. 심지어 삼류 뜨내기 같은 놈도 있었지. 그런데 천주를 만나 화경에 든 고수가 된 거야. 그리고 말만 잘 들으면 현경을 넘어 생사경까지 이를 수 있지. 너라면 어떡하겠나?”
“….”
“게다가 명을 거역하면 끝장이지. 지금 내가 왜 이 꼴이 됐는지 보면 모르나?”
“천주가 절대고수로 만들어 주었단 말이오? 당신도?”
“….”
불취는 대답하지 않았다.
“천황성은 어딨소?”
“왜? 죽으려고?”
불취는 입을 닫았다. 알려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잠시 후 불취가 쓰러진 장한을 흘깃 보더니 말했다.
“저놈은 별게 아니야. 두꺼운 피부 거죽만 믿고 설치는 놈이지. 아마 한 놈이 더 올 거야. 그놈은 참 지독하거든? 당장 목숨이나 붙일 생각하라고.”
불취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방금 너와 겨루며 생사경을 본 것 같았지. 그런데 보자마자 이리 되다니.”
“당신 같으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강소군도 내상을 입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장한의 도를 쳐냈다.
“큭큭. 저놈이 별거 아니더라도 화경의 고수야. 저놈이 방심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이미 죽었어.”
불취가 희미하게 웃었다.
“게다가 말이지. 내가 죽이려고 한 놈이 나를 죽이는 건 괜찮아. 하지만 나를 죽이려고 한 놈은 가만둘 수 없잖아? 그게 강호의 도라고.”
불취가 돌연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절벽 끝에 가서 섰다.
그러고는 술병을 들어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술병이 비자 불취가 절벽 아래로 던졌다.
술병은 이전처럼 떨어져 바위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야아, 날씨 좋다!”
하늘을 보고 크게 외친 불취는 그대로 몸을 기울였다. 마치 꽃잎 지듯 미련 없이 아래로 떨어져 갔다.
강소군의 눈에 맞은편 절벽 노란 꽃무더기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이 몸을 날리더니 떨어지는 불취를 잡았다. 그리고는 함께 떨어져 갔다.
“….”
***
강소군은 불취가 있던 바위에 앉아 운기조식하였다.
불취의 경고대로라면 한 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역시 고수일 것이다.
그자가 실패하면 또 누군가 찾아올 것이 뻔했다.
강소군이 바라던 바다. 막연하게 천황성의 꼬리를 잡으려 다니는 것보다 직접 부딪히는 게 나았다.
수족을 깨고 또 깨다 보면 결국은 수뇌부가 나올 것이다.
운기조식을 하는데 불현듯 불취와 겨루며 자신의 내력이 바닥나던 순간이 떠올랐다.
공포였다.
마지막 남은 내력이 소진되는 순간 닥쳐올 죽음.
무총에서 느낀 죽음의 공포와는 확연히 달랐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가올, 예정된 죽음.
그 순간 여러 사람의 얼굴이 스쳤던 것 같다.
동시에 이름 모를 산속 절벽에 쓰러져 있을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불취도 그랬을까?
이제는 알 수 없다. 그는 죽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
절벽에서 떨어지던 불취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강소군은 불취가 자신을 죽이려 온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스스로 죽으러 온 것이다.
처음 봤을 때 허허로웠던 느낌이었는데 마지막 절벽에서 떨어질 때도 똑같이 허허로웠다. 마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듯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절벽 아래를 보지 않았다.
불취가 허허로이 떨어져 내려가던 순간 맞은편 절벽에서 노란 꽃 쏟아져 내리듯 몸을 날리던 여인.
그 여인이 불취의 몸이 술병 깨지듯 처참해지도록 놔두지 않았으리라 믿었다.
강소군은 불취에 대해 자신이 왜 그리 신경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 처음 본 낯선 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던 적.
술 몇 모금 나눈 사이였을 뿐이다.
어쩌면 두 사람의 대결에서 그는 자신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취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사람이면 사람의 길을 가야지.’
현치자의 말이 떠올랐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니, 사람의 길이란 게 무슨 의미일까.
어느 순간 강소군은 피식, 웃었다.
선사는 달을 가리키는데 자신은 손가락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소군이 눈을 떴다.
머릿속을 맴도는 상념에 더 이상 운기를 할 수가 없었다.
사위는 고요하고 어둠이 깊었다.
그럼에도 앞은 등이라도 켠 듯 환했다.
달이 떴다.
달빛을 받은 맞은편 절벽이 허옇게 빛났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절벽이 마치 하늘에 등을 단 듯했다.
천등(天燈).
낮에 본 절벽은 하얗고 붉고 노란 꽃들로 형형색색 화려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오로지 한 가지 빛으로 밝다.
“…!”
강소군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하니 맞은편 절벽을 바라봤다.
***
사내도 이름을 쓰지 않았다.
천황성에 들어온 이들은 지난날을 잊었다. 그래서 봉황수니 쌍렵이니 불취니 별호로 불렀다.
동료들은 그를 무흔이라고 부른다.
무흔은 강소군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귀식대법은 화경에 올라 지척에 있어도 감지할 자가 그리 많다.
지금 강소군과의 거리는 십여 장.
무흔은 엎드려서 갈등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심 검은 피부의 사내, 흑사를 원망하는 중이다.
‘머저리 같은 놈!’
그가 말릴 새도 없이 튀어 나갔다.
천주는 무공을 화경으로 끌어올려 주기는 하나 사람의 오성까지 높여주지는 못한다.
무공은 깨달음의 경지라는 화경에 이르렀으나 내면은 삼류무인보다 못한 놈도 꽤 있다.
흑사는 그런 놈이다.
무흔은 기다릴 줄 알았다. 그는 살수 출신이다. 살수로 화경에 든 자는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그는 상대를 대함에 있어 가볍게 여겨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그게 죽어야 할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배웠다.
무흔은 강소군을 내려다보았다.
벌써 세 시진이 넘게 바위 위에 앉아 있다.
‘내상이 깊은 건가?’
그렇다면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확실치 않다.
확실하지 않은 살행은 모험이다. 무흔은 모험을 해 본 적이 없다.
원래 계획은 불취와 강소군이 먼저 싸우는 것이었다. 불취가 이기면 좋고 양패구상하거나 질 경우 흑사가 나서는 수순이었다.
무흔은 그 와중에 결정적 기회가 있을 때 강소군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물론 그 역시 불취도 제거하라는 명을 받았다.
명을 받았을 때 그는 불취를 죽이는 일이 가장 힘들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눈앞의 결과는 정반대였다. 불취와 흑사는 죽고 강소군은 살아 있다.
‘지금은 아니다.’
정면으로 살수를 펼치는 건 이미 틀렸다. 무흔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쏴아아아.
갑자기 밤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지나고 간 뒤 무흔의 신형이 사라졌다.
***
팽일소는 막막한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강을 나룻배 한 척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적당한 데서 내려 피하면 좋으련만 중상을 입은 팽일호가 의식을 잃고 있다.
팽가의 야영지를 덮친 세 나무꾼의 도끼질은 무시무시하였다. 한 번 도끼질에 사람이 반으로 쪼개져 나갔다.
팽가 제일기재라는 팽일호가 전력을 다했음에도 무인들을 모두 잃고 말았다.
팽일소가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팽일호와 팽일소 두 사람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팽일소는 체질적으로 팽가의 패도적인 도법이 맞지 않았다. 게다가 호기심이 많았다.
가문의 어른들이 눈총을 주었건만 좌도방문의 잡기(雜技)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나무꾼들도 명문세가의 자제인 팽일소가 은형탄과 산공독을 섞어서 터뜨릴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용케도 그 자리를 빠져나왔으나 나무꾼들은 끈질기게 쫓아왔다.
어쩌면 쫓는 걸 즐기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도주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정신없이 도주하다 보니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팽일소는 처음으로 팽가를 떠나 멀리까지 나왔다.
하북에서는 팽가의 이름만 대면 만사형통이었으나 여기서는 달랐다.
팽일호가 의식을 잃고 있으니 다가오는 사람 모두가 적으로 보였다.
‘어서 배를 버려야 하는데.’
마차를 쫓아간 나무꾼들이 허탕을 친 것 알아차리는 데 한 시진. 포구까지 되돌아오는 데 반 시진. 그리고 강을 따라오는 데 한 시진.
팽일소는 최대한 두시진 반은 벌었다고 봤다.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포구에서 눈치채고 강을 따라 쫓아온다면 한 시진밖에 여유가 없다.
나름 시간을 계산하고 강가를 살피며 도주로를 찾던 팽일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앞 강가에서 피에 젖은 도끼를 물로 씻고 있는 나무꾼 하나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룻배쪽을 바라보는 나무꾼과 팽일소의 눈이 마주쳤다.
나무꾼이 씨익, 웃자 하얀 이가 보였다. 그러니 더욱 소름이 끼쳤다.
팽일소는 장대로 바닥을 밀어 나무꾼이 있는 강가 반대편으로 배를 몰아갔다.
나무꾼은 굳이 급하게 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후 팽일소는 그 이유를 알았다. 반대편에도 나무꾼이 하나 서서 다가오는 나룻배를 보고 있었다.
‘아! 하북제일세가 팽가가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팽일소는 기가 막혔으나 상황은 엄중하였다.
그동안 무공을 소홀히 했던 것이 후회되었으나 이미 늦었다. 적은 눈앞에 있다.
팽일소가 다시 장대로 나룻배를 밀어 강복판으로 배를 몰아갔다.
강은 그리 넓지 않았다.
나무꾼들의 실력이면 바로 날아와 공격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배를 따라 걷기만 하였다.
‘제기랄! 물 한 방울 묻히기조차 싫다는 건가?’
팽일소가 이를 우드득 갈며 시선을 배 한가운데 누워 있는 팽일호에게 향했다.
“형님, 죄송해요. 여기까지인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