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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가 검을 내밀었다.
허허로웠다.
이에 맞서는 강소군의 검에도 내력이 실리지 않은 듯 부드럽게 나아갔다.
-챙!
검과 검이 가볍게 부딪쳤다.
마치 서로의 기세를 타진하듯 가벼운 마주침이었다.
순간 사내의 검이 사라졌다. 동시에 강소군의 검도 자취를 감췄다.
-따따다다당.
두 사람의 검은 보이지도 않건만 허공에서 연달아 격돌하는 타격음이 터졌다.
검뿐만이 아니다.
점차 사람의 신형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지독한 쾌검이었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그림자들이 붙었다 떨어지고 그 사이사이 검과 검이 부딪치는 기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만일 누군가 그들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다 하더라도 누가 승기를 잡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쪽에서 검을 찌르면 저쪽에서 베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 검도 부딪치지 않았다. 한쪽이 공격을 하면 다른 한 쪽이 빈틈을 노렸다. 그러면 공세의 방향이 바뀌고 상대 또한 노리는 지점을 바꿨다.
두 사람의 신형은 점차 느려져 모습이 드러났으나 둘러싼 기세는 더욱 촘촘해져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사내도 강소군도 서로의 검법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은 거진 반 시진 가까이 내력보다는 검세에 의지하여 부딪쳤는데 승부를 가리기 어려웠다.
“하하하! 역시 먼저 찾아오기를 잘했구나!”
사내가 크게 외치더니 검을 거둬들이는 듯하다 쭉, 내밀었다.
허허로웠던 기세가 돌연 폭발하듯 터지더니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듯 사방에서 경기가 몰아쳤다.
“광검세라고 한다!”
마치 받아 볼 수 있으면 받아 보라는 듯 외치며 사내가 검과 함께 천천히 날아왔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듯하였으나 그 기세가 남달랐다. 사방에서 검기가 일어나 장벽처럼 강소군을 덮쳤다.
강소군의 검도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러자 청광을 발하는 별빛 하나가 솟아 밀려드는 검기의 장벽으로 날아가 박혔다.
-퍽!
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쏴아아아!
뒤이어 수십, 수백의 별이 강소군의 검끝에서 쏟아져 나왔다. 별들은 무리를 지어 검기의 장벽으로 날아가 박혔다.
-퍼퍼퍽!
이번에는 장벽도 흔들렸다.
그러나 다가오는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강소군은 검기의 장벽이 덮쳐 오는 순간 오히려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타타탕!
무형의 검기가 날아와 강소군의 검을 쳤다.
순간, 강소군의 검이 궤적을 그려 나갔다.
마치 유영을 하듯 검로를 따라가는 검끝에서 수많은 별무리가 탄생하였다.
-퍼퍼퍼퍽!
별무리가 검기와 충돌하며 허공을 덮은 검기의 장벽이 점차 밀려났다.
마침내 장벽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 자리엔 검 한 자루만 둥둥 떠 있었다.
강소군은 사내의 진신 절기가 드디어 나왔음을 직감하였다.
검을 거둬들이고 금룡기를 주입하며 검과 일체를 이뤄 가던 강소군이 흠칫, 멈췄다.
‘초식을 버린다고? 초식의 굴레를 느껴 보기는 했나?’
현치자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강소군은 옥허동천에서 현치지와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무당산을 떠나고 나니 그와 무수한 대화를 나눴다는 느낌이 든다.
강소군은 언젠가 중랑에게 천성육십사식은 검법을 수련하기 위한 초식일 뿐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초식을 익힌 뒤 버리라는 뜻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검법을 창안한 현치자는 오히려 초식의 완성을 강조했다.
‘초식의 굴레?’
순간적으로 강소군의 머릿속으로 무언가 스치는 듯했으나 더 이상의 여유가 없었다.
어느새 사내의 검이 날아왔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가볍게 호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검.
그 순간, 강소군은 금룡기를 쏟아내는 대신 천성육십사식을 펼쳤다.
사내의 눈이 꿈틀하였다.
자신의 검에는 칠성의 공력이 들어 있다.
검에 강기가 실려 있다고 해도 막아낼 성질의 검이 아니다. 상대 역시 공력을 퍼부어 응대함이 마땅했다.
그런데 강소군이 이제까지처럼 초식으로 맞서려 하니 의아했던 것이다.
천성육십사식의 검로를 그어가는 강소군의 검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검식에서 발산하는 기세가 무형의 기를 이루며 천천히 날아오는 검을 흔들었다.
사내의 검은 흔들리지 않았다. 실려 있는 경력의 무게는 태산과도 같았다.
“…!”
어느 순간 강소군의 검이 멈췄다. 아니, 거의 멈췄다 싶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동시에 검식에서 두텁고 진득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검이 아니라 검식 자체에서 기운이 형성되어 사내의 검과 부딪쳤다.
-쿠웅!
기운과 기운이 부딪치며 거대한 범종을 친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맞은편 절벽이 흔들렸다.
두 사람의 옷깃은 비산하는 기세의 여파로 사정없이 흩날렸다.
“….”
사내는 의혹의 눈길로 자신의 검과 강소군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강소군도 방금 자신이 펼친 초식을 되새겼다.
무수히 반복했던 초식과 기의 운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마치 검식이 강소군의 금룡기를 빨아들여 일정한 무형의 기운을 이뤄 상대의 검을 받아친 것 같았다.
사내의 검은 심검의 초입이었다. 이기어검의 단계를 넘은 그 검을 막을 수 있는 자는 강호에 몇 없다.
“놀랍군.”
사내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말한 미친놈이란 고수가 그랬소. 초식을 완성해 보았느냐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방금 깨달았소.”
“흐흐. 그걸 지금 이 순간, 이 찰나의 순간에 깨달았다고? 나보고 믿으란 말인가?”
사내는 뇌까리듯 말을 하였으나 이미 사실로 인정한 표정이었다.
사내는 묵묵히 검을 들었다.
“좋은 승부였다.”
사내가 다시 검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다시 허허로운 검이다. 그러나 그에 담긴 의도는 진중했다.
일검으로 끝을 보자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강소군도 검을 찔러 갔다.
두 자루의 검이 서로를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틱!
놀랍게도 두 검의 끝이 정확히 맞부딪쳤다.
검과 검.
그리고 검을 쥔 사람과 사람의 대결이었다.
사내는 일검에 끝을 볼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전신공력이 밀려 왔다.
강소군도 금롱기를 모두 끌어냈다.
-쿠웅!
기와 기가 격돌하며 허공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주위로 반원형 기막이 형성되었다.
-쿠쿵!
허공이 갈리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
“….”
두 사람은 아예 눈을 감았다.
그렇게 무려 반 시진 동안 대치하였다.
시간이 가면서 두 사람을 에워싼 기막의 크기는 점차 줄어들고 옅어져 갔다.
기가 소진되며 기막 또한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두 사람은 모든 내력을 소진하고 동귀어진할 터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안색은 무심했다. 두 사람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과 사.
삶과 죽음이 갈리는 극명한 순간, 두 사람은 자신의 끝을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기막이 사라졌다. 두 사람의 내력이 바닥이 난 것이다.
그때 허공에서 쇠된 음성이 들렸다.
“흐흐. 뭐야? 혼자 와서 재미를 보다니.”
뒤이어 마흔쯤 되어 보이는 장한이 나타났다. 민소매에 짧은 바지를 입은, 옷차림이 특이한 자였다.
마치 쇠로 된 사람인 듯 얼굴은 물론 전신이 검붉었다. 몸에서 윤기가 흐르는 모습이 기이했다.
장한은 허리춤에 두 자루의 짧은 도를 차고 있었다.
장한이 두터운 입술을 꿈틀거리며 웃었다.
“불취(不醉), 내가 좀 거들어 줄까?”
강소군과 맞서는 사내의 별호가 불취인 모양이다.
장한이 능글맞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태연히 다가오는 듯했으나 걸음걸이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불취를 무척 경계하는 듯했다.
불취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두 사람은 이제 마지막 내력을 쏟아붓고 있다. 여기서 한 사람이 내력을 거두면 그건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다.
지금 이 순간 내력이 다한 두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건 삼류무사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장한이 삼 장 가까이 다가왔다.
고수들이라면 일초에 상대를 거꾸러뜨릴 수 있는 거리다.
“불취, 내 말이 안 들리는 건가? 고개라도 끄덕여 보라고.”
장한의 눈알을 굴리는데 음험한 빛이 흘러나왔다.
“잠시만 기다리게. 내가 저놈을 죽여 줄 테니.”
장한이 갑자기 몸을 회전하였다. 장한의 허리춤에 찬 두 자루의 짧은 도가 벼락같이 튕겨 나와 강소군과 불취를 덮쳤다.
장한은 두 사람 모두를 죽이려 한 것이다.
장한은 도를 날리고 아주 잠시,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도에 실린 경력은 그가 전력을 다한 것이다. 그는 불취가 결코 만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순간.
강소군과 불취의 검이 떨어지는 동시에 날아드는 도를 튕겨냈다.
-쾅!
짧은 도에 실린 경기는 어마어마하였다.
강소군은 태극의 원리를 이용하여 짧은 도에 실린 경력을 흘려냈으나 모두 해소할 수는 없었다.
“크윽!”
강소군이 서너 걸음 뒷걸음질 쳤다.
놀랍게도 불취는 짧은 도를 피하거나 막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검을 빛살처럼 쏘아냈다. 그에게 이럴 수 있는 내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진원지기를 쏟아부은 게 틀림없었다.
불취의 검은 장한이 도를 날리고 잠시 미소를 짓는, 그 짧은 방심의 틈을 파고 날아들었다.
-콱!
장한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가슴에 박혀 있는 검.
어지간한 도검은 그대로 튕겨 내는 그의 피부를 뚫고 심장을 관통한 검을 움켜잡았다.
“으아악!”
장한이 괴성을 지르며 검을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 이 새끼가!”
“크흐흐. 천주가 나를 제거하라고 명을 내린 걸 알고 있었지. 이럴 거라고 여겼는데 너는 한 치의 틀림없이 행동하는군.”
불취가 비틀거렸다.
그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장한의 도가 야수의 발톱처럼 그의 가슴팍을 훑고 지나갔다.
이미 가슴은 피투성이다.
“크악!”
장한이 괴성을 지르며 가슴에서 뽑아 낸 검을 겨누고 불취를 향해 달려갔다.
심장이 관통되었음에도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퍽!
강소군의 무애검이 날아와 장한의 가슴에 박혔다.
강소군은 한 번의 호흡으로 금룡기를 모아 검을 던졌다. 미약한 내력이었지만 이성을 잃은 장한의 가슴을 뚫기에는 충분했다.
“크윽!”
장한이 검붉은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크크크. 고맙군. 목이 잘리는 흉한 모습은 피하게 되었나?”
불취가 비틀거리더니 절벽 바위로 걸어가 기대어 앉았다.
강소군은 선 채로 운기를 하였다. 약간의 기운을 모았을 때 미약한 음성이 들렸다.
“검을 가져다줄 수 있나?”
강소군이 천천히 가서 장한의 가슴에 꽂힌 무애검을 뽑고 손에 들린 보검을 가져다 불취의 무릎에 놓았다.
불취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게 달라는 말이 아니야. 남궁가에 가져다주라고.”
“남궁세가?”
불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안 검이니까. 창천검이라고 하지.”
불취가 말했다.
“남궁가에는 세 자루의 보검이 있었지. 창천, 무룡, 무애… 쿨럭.”
불취가 말하다 말고 피를 토했다. 갈라진 복부 사이로 역시 끊어진 내장이 보였다.
불취는 죽어 가면서도 눈빛은 형형했다. 술에 취했을 때보다 맑아 보였다.
“그게 창천검이야.”
강소군이 창천검을 보았다.
“가주가 큰아들이 태어나자 세 자루의 보검을 만들고 창천, 무룡, 무애라고 이름 붙였지.”
강소군은 몰랐지만 남궁세가는 창천검을 잃어버리자 무룡검을 창룡검이라 고쳐 불렀다.
강소군이 불취를 가만 바라보다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