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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절벽이다.
절벽 아래로 강이 흘렀다. 맞은편은 기암절벽이다. 길은 절벽 위를 돌아 꺾어져 내려간다.
절벽 끝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아래 바위 위에 한 사내가 걸터앉아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 바위에 기대어 세워둔 검은 칙칙한 묵빛이다.
사내는 맞은편 절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마개가 열린 호리병이 놓여 있다.
꽤나 독한 술인지 봄바람에 주향이 퍼져 나간다.
-다각 다각.
강소군이 말을 몰아 오르막길로 올라왔다.
절벽 위에 올라 길이 꺾어지는 곳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제 오는가?”
강소군이 오는 쪽을 등지고 앉아 있던 사내가 목을 우두둑, 꺾더니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호리병을 집어 벌컥, 한 모금 마시고 돌아봤다.
강소군이 사내를 보았다. 처음 보는 자다. 풀어헤친 머리카락 때문에 좀처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마치 한 자루 검을 보는 느낌이었다. 상관무영과 남궁악을 봤을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다만 사내는 허허로웠다. 어딘가 모르게 강소군 자신의 기도와 닮았다.
사내도 그걸 느꼈는지 눈빛이 잠시 번뜩였으나 이내 사라졌다.
“아아. 꽤 오래 기다렸어.”
사내는 마치 친구를 만난 듯 말을 건네 왔다.
몹시 권태로운 눈빛이다.
“와서 한잔하지? 이제부터 갈 길이 먼데.”
강소군은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내는 절벽 끝 바위에 편안하게 널브러지듯 앉아 있었으나 기도는 절벽 길 전체를 덮고 있었다.
마치 무형의 벽을 쳐둔 것만 같았다.
“….”
잠시 사내를 보다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강소군이 다가가 사내가 앉은 바위 옆에 섰다.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다. 맞은편 절벽은 손에 닿을 듯 가깝다. 이름 모를 꽃들이 핀 절벽은 곳곳이 노랗고 하얗다.
좁은 협곡을 지나는 빠르게 지나는 물은 하얀 거품을 품고 있다.
“좋지 않아? 이런 자리에서 죽으면 천계에 올라가서도 좋은 곳으로 가지 않을까 싶군.”
사내가 호리병을 던졌다.
“괜찮은 술이야. 연하춘. 봄날에 마시지 딱 좋지.”
강소군이 호리병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주향이 코끝을 맴돌다 이내 사라진다.
“아쉽지? 순식간에 사라지는 주향이 봄날의 연무 같지 않은가?”
강소군이 술병을 다시 던져 주었다.
사내가 받아서 한 모금 더 마시고 나니 술이 동났다.
“이 술은 늘 아쉽게 만든단 말이지.”
사내가 술병을 절벽 아래로 던졌다. 그러면서 툴툴 웃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군. 하지만 다행이야. 제대로 겨뤄 볼 수 있어서.”
사내가 알 수 없는 말을 뇌까렸다.
강소군이 사내를 보다 술병이 떨어진 절벽 아래를 보았다.
까마득하다.
그럼에도 바위에 부딪혀 박살이 나는 술병을 볼 수 있었다.
“천황성에서 왔군.”
사내가 바위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네를 잡는 데 세 사람이나 보내더라고. 자존심 상하게 말이지.”
강소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먼저 온 거니까. 솔직히 나와 평수를 이룰 고수인 줄은 몰랐거든.”
“천황성에는 당신 같은 고수가 몇이나 있는 건가?”
“백 명쯤 되나? 다시 말해서 자네가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지. 천황성은 한 번 목표로 삼은 자는 놓치는 법이 없지.”
강소군을 잡을 때까지 계속해서 고수가 온다는 뜻이다.
강소군이 피식, 웃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던데?”
“크크. 남궁악? 이미 불구가 됐는데 굳이 목숨을 거둘 필요가 있나?”
사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자네가 스스로 한 팔을 자르고 무공을 폐한다면 살 수 있지. 어때? 그럴 생각 있나?”
“사양하지.”
“그래야지. 오랜만에 적수를 만났는데 그랬다면 아주 서운했을 거야.”
사내가 잠시 말을 멈추고 뭔가를 생각하다 물었다.
“남궁악은 어땠나? 자네와 겨루면 어찌 될 것 같았나?”
“지금 나와 당신 같을 거요.”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뜻이다.
강소군의 말에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랬군. 아쉽네.”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황성이라고 모든 정보가 맞는 건 아닌가 보군.”
“그게 무슨 뜻이지?”
“천황성에는 강호 고수들에 대한 정보가 꽤 많아. 그리고 상당히 정확하지. 남궁악은 봉황수보다 한 수 아래라고 평가됐거든. 그래서 내가 갈 생각을 접었지. 적어도 맞수는 돼야 싸울 맛이 나니까.”
강소군은 사내의 말이 흥미로웠다.
“그럼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던가?”
“그게 이상하더라고. 얼마 전까지는 분명 내 아래였는데 이제는 나와 동수라고 평가하지 뭐야.”
“그걸 알면서 온 건가?”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천황성은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아. 봉황수나 쌍렵 같은 경우는 아주 드물지. 자네에게는 셋이 붙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왜 혼자 온 거지?”
“믿을 수가 없었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쌍렵을 보냈겠지.”
“쌍렵?”
“무당산에서 죽인 무식한 놈들을 그새 잊었나?”
강소군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서운하군. 나를 그렇게 박하게 평가하다니. 그들은 내 상대가 아니었거든.”
“계획대로라면 그렇지 않았지. 원래대로라면 떨거지들이 달려들었을 거야. 한 이백 명쯤? 그리고 네가 지쳤을 때 쌍렵이 해치우기로 되어 있었지. 그런데 그 미친놈들이 그냥 뛰어들었다지 뭔가.”
강소군은 십이지대를 떠올렸다. 그들 이백 명이 동귀어진을 하겠다고 덤벼든 다음 쌍렵이 나섰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래도 그는 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강소군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자신의 말을 매어둔 곳으로 갔다.
그러더니 말 옆구리에 매어 둔 술병 둘을 가지고 왔다.
그는 요즈음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노숙을 주로 하는 편이라 술을 넉넉히 가지고 다니는 중이다.
사내가 반색하였다.
“애석하게도 이건 싸구려 술이요.”
사내가 빨리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잘 생각했어. 좋은 술이든 아니든 술이 남았다면 다 마시고 죽어야지. 안 그럼 저승 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을 거야.”
강소군이 한 병을 건넸다.
사내가 받아들자마자 벌컥 들이켜더니 카,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크으. 제법 괜찮은데?”
사내가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제법 운치를 아는군. 죽이기가 아쉽잖아.”
“….”
강소군도 자신의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좋아. 좋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좋다는 말을 하며 사내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더니 말없이 앞을 봤다.
강소군이 사내의 시선을 따라가니 절벽에 노란 꽃이 피어 있다.
사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남궁악이 봉황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
사내는 다시 남궁악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상스레 남궁악에 집착하였다.
“얼마 전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몰랐소. 그러나 한 달 사이에 그는 절대지경의 초입에서 문턱을 넘었소.”
강소군의 말투가 바뀌었다.
“절대지경? 크흐흐.”
사내가 비웃음을 흘렸다.
“천황성에서는 절대지경이라는 애매한 말은 쓰지 않아. 화경과 현경으로 정확히 나누지.”
“그렇게 나누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소.”
“화경에 든 고수는 제법 많지. 십대고수 대부분을 화경으로 분류하더군.”
“십대고수에 현경도 있었소?”
“상관무영을 현경으로 평가하고 있지.”
강소군은 상관무영을 떠올렸다. 그와 맞섰을 때 검만 보였다.
사내는 술이 들어가자 수다스러워졌다.
“천주 말이 상관무영 정도는 되어야 자신의 백 초를 받을 수 있다고 했지.”
“….”
“내가 충고 하나 하자면 천주는 만나지 마. 그는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이 아니라면 금수란 말인가?”
강소군의 말에 사내가 놀란 듯 보더니 클클, 웃었다.
“전혀 그렇지 않게 생겼는데 농도 하는군. 좋아. 좋아. 재밌어.”
사내가 다시 술을 벌컥 들이켰다.
“천주는 현경을 넘어섰지. 생사경이라고 하던가? 그게 무슨 경지인지 정말 궁금하지 않아?”
사내는 마치 자신에게 묻는 듯했다.
“생사경 다음도 있소?”
“몰라. 생사경도 모르는데 그다음을 어찌 알아.”
“그렇다면 당신은 적어도 현경이라는 뜻이겠군. 당신과 맞설 만하니 나도 현경인가?”
“크흐흐. 보기보다 머리를 쓰는군.”
사내가 강소군을 돌아보더니 눈빛을 번뜩였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해 주는지 아나?”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지.
“오늘 여기서 내려가는 사람은 둘 중 하나라는 거지. 자네가 죽으면 내가 이런 말을 해 줬다는 걸 아는 이가 없을 것이고 내가 죽으면 말했다고 책임을 물을 수 없잖아? 크하하하.”
사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한마디 하지.”
강소군이 천천히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만난 고수가 그랬소. 일류니 절정이니 심지어 절대지경이니. 다 사람이 지은 것이고 의미 없다고.”
사내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나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
***
아침부터 옥판봉 절벽을 내다보느라 밥 짓는 걸 깜박 잊은 날.
현치자가 작은 마당을 오락가락하다 중얼거렸다.
“심마? 심마라고 여기니 심마인 게지. 벽? 벽이라고 생각하니 벽이 떡 버티고 있는 거라고.”
“절대지경? 개나 주라지.”
“사람이면 사람의 길을 가야 하는 거라고.”
그래도 강소군이 꿈쩍하지 않자 끝내 현치자가 본심을 토로했다.
“밥 먹자. 배고프단 말이다!”
***
-피식.
강소군이 웃었다.
까맣게 잊었던 날이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자기 상상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남궁악과 검을 겨루며 각자의 벽을 넘어선 뒤였다.
홍의발과 십이지대를 쫓아 길을 가다 어느 날 문득 실제처럼 그날 현치자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고는 이상스레 뇌리 한구석에 그날의 풍경이 남아 있다.
그런데 사내의 말을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절대지경? 개나 주라더군.”
“하하하. 어느 미친놈이 그러던가?”
현경의 고수라는 상관무영이 매년 찾아오는 미친놈이라고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사내는 문득 웃음을 그치더니 뇌까렸다.
“그럼 뭐가 의미 있다는 건가? 분명 무공에는 고하가 있고 그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데. 생사가 의미 없다는 건가?”
강소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다시 광소를 터뜨렸다.
“좋아, 좋아! 누구나 제 생각이 있는 법이니.”
사내가 술병을 들어 마지막까지 벌컥벌컥 마시고는 절벽 아래로 던져 버렸다.
“술은 다 마셨으니 이제 갈 길 가자고.”
사내가 검을 들고 일어섰다.
강소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이 사내와는 생사결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동료들을 데려오는 게 어떻소?”
“크크. 그럴 수는 없지. 오랜만에 만난 술친구이니 내 손으로 보내주는 게 주도(酒道)가 아닌가?”
사내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강소군은 마지못해 등에 맨 창과 검을 풀었다.
창을 옆에 기대고 무애검을 들었다.
“창을 쓴다고 들었는데 검인가?”
“얼마 전에 좋은 검을 얻었소.”
“무애?”
놀랍게도 사내는 검을 알아보았다. 눈빛에 광망이 번뜩였다.
“남궁가에서 그걸 주던가?”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망연자실하여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미친 듯이 웃었다.
“좋아. 정말 재밌는 한판이 되겠군.”
웃음을 그친 사내가 싸늘한 얼굴로 내뱉었다.
-스르릉.
사내의 검이 뽑혔다.
은빛 광망이 보기 드문 명검이었다.
“조심하라고. 무애검 못지않게 날카로우니까.”
강소군이 검을 뽑고 천천히 세웠다.
“그건 무슨 검법인가?”
“검법 이름이 상관있소?”
“하기는. 기수식을 취하는 현경의 고수라… 참 오랜만에 보는군.”
사내가 검을 쳐들었다.
-지잉.
검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