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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호가 협명이 높지만 과연 그만한 실력이 되겠소?”
등 노사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천주께서 이끌어 주셔서 절대지경을 넘었소. 성취가 이미 봉황수를 넘어섰다고 하셨소.”
그러자 위 태사가 또 토를 달았다.
“그는 협의지사로 알려져 있소. 게다가 조왕부의 식객 아니오? 그런데 순순히 우리 말을 듣는다는 말이오?”
공손 노야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조왕은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천황성과 협조하는 자이지 자신들처럼 직접 천주를 따르는 수하가 아니다.
위 태사는 그 점을 지적하였다.
“조왕이 직접 천거하였소. 철권호의 병든 아내가 조왕부에서 연명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조왕은 지금 젊은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급급하니 본성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게요.”
한왕이 꺾이고 난 뒤 젊은 황제의 기세가 등등하다. 조왕 주고수는 팽덕 조왕부에 처박혀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위 태사의 입김이 조정에 들어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젊은 황제는 조왕까지 잡아넣었을 것이다.
조왕으로서는 천황성의 도움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기에 철권호와 조개량, 십이지대를 내주었다.
“대파와 세가는 물론이고 재야의 고수까지 맹주의 자리를 노리고 모여들고 있소. 철권호가 절대지경을 넘었다지만 가능하겠소?”
“그 점은 염려 마시오. 이미 손을 쓰고 있소.”
공손 노야가 말을 자르고 끼어든 등 노사에게 말했다.
“무림맹의 일은 노부가 직접 처리할 것이오. 등 노사께서 흑천맹을 맡아 주시오.”
“흑천맹을?”
“흑천맹을 추진하는 고선과 안면이 있는 걸로 알고 있소.”
“으흠.”
등 노사가 불쾌한 듯 헛기침을 터뜨렸다.
공손 노야가 무림의 일에 나서는 것도 마뜩잖은데 자신을 수하 부리듯 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정파와 달리 흑도는 모이기가 쉽지 않소. 제멋대로인 놈들이라 모아두면 쌈박질만 하니.”
“그래서 등 노사께서 나서 달라는 말이오. 십이지대를 드리겠소. 일천 무인이면 고선이 흑도를 제패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고선은 그럴 만한 위인이 못 되오.”
“그건 등 노사가 알아서 하시면 되오. 고선을 내세우든 다른 놈을 그 자리에 앉히든.”
“그래도 문제는 남소. 흑천맹이 들어서는 귀주는 과거 요천루가 패망하고 천무방이 장악하고 있소.”
“그러니 십이지대를 드리는 것 아니오. 천무방을 쫓아내든 아예 깨버리든 그것 역시 아무 상관 하지 않겠소.”
등 노사가 자꾸 토를 달자 공손 노야는 짜증이 극에 달했다.
“천주께서도 아시는 일이오?”
“오늘 노부의 말은 모두 천주의 승인을 받은 것이오.”
천주의 명이라는 소리에 등 노사는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공손 노야는 위 태사를 향해 말했다.
“천주께서, 한왕이 옥에 갇혀 있는데 조만간 석방하여 운남에 유폐를 하라는 명을 내리셨소.”
천주는 한왕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남아서 젊은 황제를 견제하도록 할 생각이다.
“알겠소.”
천주의 명이라니 위 태사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 노야가 이번에는 종 선생에게 말했다.
“무림맹과 흑천맹을 장악하려면 자금이 필요하오. 황금 이백만 냥이 가능하겠소?”
종 선생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천주의 명이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공손 노야는 그 기색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 본성이 노출되었소. 따라서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이셔야 할 것이오.”
그때 밖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 왔다.
“누구냐?”
“침입자다!”
공손 노야와 삼태상이 놀라 황급히 일어났다.
공손 노야가 재빨리 한쪽 벽면에 다가가 기관장치를 작동하며 삼태상에게 일렀다.
“비밀통로를 이용해 나가시오.”
삼태상의 신분은 절대 노출되면 안 된다.
아무것도 없던 벽이 스르르 밀리며 문이 열렸다.
등 노사 등이 문으로 들어가자 공손 노야가 비밀문을 닫았다.
그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적이 자신의 장원까지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공손 노야가 문을 열고 나가자 전각 앞마당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주위로 천호위 네 명이 사방을 점하고 섰다.
“무슨 일인가?”
공손 노야가 천호위 수장에게 물었다.
“이자가 염탐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손 노야가 천호위에게 둘러싸인 사내를 보았다.
등에 한 자루 붉은 창과 검을 교차하여 매고 있다.
공손 노야의 미간이 좁혀졌다.
‘혹시?’
머릿속에 강소군이라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홍의발과 십이지대를 추적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적을 달고 오다니 이런 한심한 놈!’
강소군이 자신을 에워싼 천호위들을 보았다.
일문의 문주에 버금가는, 초절정에 이른 고수들이 호위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게 의외였다.
“무슨 일로 본 장원을 찾은 겐가?”
공손 노야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당신이 천주의 책사란 자인가?”
강소군은 전각 안에서 나눈 말은 듣지 못했다.
공손 노야 등이 기막을 쳐서 말이 새어 나가는 걸 막은 까닭이다. 하지만 네 사람이 있다가 세 사람이 어디론가 사라진 건 알고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공손 노야는 노회한 자였다. 강소군이 어디까지 알고 왔는지 떠보려 했다.
“얼굴을 봤으니 됐다!”
강소군이 담담하게 한마디 하더니 돌연 몸을 솟구쳤다.
“어디를 가려고!”
천호위들이 일제히 강소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소군이 등 뒤의 검을 뽑아 후려쳤다.
-쾅!
강소군을 덮쳐 가던 천호위들이 일제히 튕겨 나갔다.
초절정 고수 네 명을 동시에 물린 것이다.
강소군은 반탄력을 받아 십여 장이나 날아갔다.
-슈슉!
사방에서 화살과 암기가 날아왔다. 강소군의 착지 지점에는 매복조가 튀어나와 도검을 겨눴다.
강소군은 마치 예상한 것처럼 허공에서 검을 내리쳤다.
-쾅!
검기가 쏟아진 지면에서 폭음이 터지고 강소군은 재차 반탄력을 받아 또다시 삼십여 장을 날아갔다.
그다음에는 나뭇가지를 밟고 추운선을 펼쳐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강소군의 종적이 사라졌다.
공손 노야가 눈썹을 찌푸리고 강소군이 간 곳을 바라보다 갑자기 놀라 소리쳤다.
“이런!”
강소군은 기관장치를 통해 빠져나간 삼태상을 쫓아간 것이다.
“쫓아라! 삼태상이 위험하다!”
공손 노야가 천호위 수장에게 일렀다.
“어서 경계신호를 보내라!”
화살이 솟아오르다 폭죽이 터졌다.
***
장원에서 약간 떨어진 낡은 우물.
삼태상이 솟구쳐 날아올라 왔다.
비밀통로로 나온 삼태상들은 장원에서 솟아오른 경계신호를 봤다.
적이 이미 들어왔는데 경계신호를 보낸다는 건 자신들에게 보내는 경고다.
“추적자가 있을 모양이오.”
“대체 감히 누가?”
-스르륵!
그새 세 사람의 암중 호위들이 나타났다.
“상황을 모르니 일단 흩어집시다!”
등 노사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 노사가 먼저 몸을 날리고 나머지 둘도 사라졌다. 암중 호위들이 흔적을 지우고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강소군이 우물 주위에 나타났다.
전각의 위치와 주위 형세를 보고 비밀통로의 출구가 있음 직한 곳을 찾아온 것이다.
적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강소군은 낡은 우물을 보고 주변 산세를 보더니 곧바로 몸을 날렸다.
강소군이 쫓는 곳은 위 태사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
-두두두두!
사두마차가 미친 듯이 관도를 질주하였다.
위 태사는 마차 안에서 창문 휘장을 걷고 뒤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지독한 놈!’
천황성의 무인들이 결사적으로 막고 있는데 적은 아랑곳하지 않고 쫓아오고 있었다.
자신의 신분은 절대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공손 노야도 이를 알고 있으니 장원의 무사들을 총동원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적이 쫓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제가 막겠습니다.”
허공 어둠 속에서 은밀한 소리가 들려오고 한 사람이 관도에 내려섰다.
위 태사의 좌호위였다.
뒤이어 마차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위 태사의 우호위였다.
“안심하십시오.”
우호위가 위 태사에게 말하고는 창문 휘장을 걷어 밖을 보았다.
위 태사가 그런 우호위에게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자네도 함께 막는 게 어떤… 큭!”
위 태사가 말하다 말고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삼태상 가운데 가장 무공이 약한 위 태사이지만 그래도 초절정의 고수다.
그런 그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한 건 상대가 우호위였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절대 신분을 노출하지 말라는 천주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위 태사가 눈을 부릅떴으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서걱!
우호위가 위 태사의 목을 잘랐다.
그러고는 품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내 위 태사의 몸에 부었다.
-푸시식!
위 태사의 몸이 빠르게 타들어 갔다.
우호위는 가죽 자루에 위 태사의 머리를 담고는 마차 문을 열고 사라졌다.
-두두두두.
마차는 여전히 어둠 속으로 질주하였다.
우 호위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강소군은 마부도 없이 질주하고 있는 마차를 따라잡았다.
마차 안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녹아내린 시신만 남아 있었다.
강소군은 곧바로 오던 길로 되돌아 달렸다.
강소군이 다시 공손 노야의 장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불길이 하늘로 치솟은 뒤였다.
공손 노야가 장원을 태워 버리고 사라진 것이다.
낡은 우물 역시 메워졌고 주변 흔적도 훼손되었다.
***
강소군은 무한으로 향했다.
불타고 남은 공손 노야의 장원을 샅샅이 뒤졌으나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다.
다만 이번 일로 천황성이 무림에 개입하고자 하는 정황이 뚜렷해졌다.
천하비무대회가 열리는 무한에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강소군이 밤길을 갔다. 말을 타고 가니 굳이 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 알아서 멈췄다. 관도 바로 옆 공터에서 불빛이 보였다.
한 무리의 행렬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야영을 하고 있는 중이다. 마차가 한 대 있고 말들이 모여 있다.
강소군의 말이 무리를 보고 멈춘 것이다.
야영하던 무리도 강소군을 보고 몇 사람이 일어섰다. 그중 한 사람이 강소군의 창과 검을 보고 무인임을 알아채고 몇 걸음 다가와 외쳤다.
“누군데 팽가를 찾아온 것이오?”
무인은 강소군이 자신들을 찾아온 걸로 착각한 것이다.
‘팽가?’
강호에서 팽가를 내세우는 곳은 한 곳뿐이다.
하북 팽가.
오호단문도로 유명한 도의 가문이다.
“지나가던 길이오.”
강소군이 짤막하게 답하고 그냥 지나치려 하였다.
그런데 야영하던 무리에서 한 사람이 뛰쳐나와 말을 걸었다.
“급하지 않은 길 같은데 와서 술이나 한잔하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강소군이 보니 아직 앳된 구석이 남아 있는 청년이었다.
청년은 갸름한 얼굴에 눈빛이 맑았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소.”
강소군이 거절하려는데 어느새 청년이 다가와 말고삐를 잡았다.
“강호에 나서면 사해가 동도라는데 술 한 잔의 정조차 거절하는 겁니까?”
보기에 따라 무척이나 결례였으나 청년은 개의치 않는 듯 한쪽 눈까지 찡긋하였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이는 남궁령 이후 처음이었다.
‘세가의 자제들은 다 이런가?’
온실 속에서 자라 티가 없는 건 좋은데 상대를 경계하지를 않는다.
강소군이 마지못해 말에서 내렸다.
야영하는 무리는 대략 십여 명 정도였다.
청년은 스스럼없었으나 몇몇은 칼날 같은 예기를 뿜고 강소군을 주시하였다.
모닥불 한가운데 머리가 남보다 하나는 크고 체구도 두 배는 됨직한 장한이 앉아서 강소군을 주시하고 있었다.
청년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저는 하북 팽가 팽일소라고 합니다. 형님을 모시고 무한으로 가는 중이지요.”
강소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소군이오.”
짤막한 한마디에 좌중의 움직임이 멈췄다.
팽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