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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은 밤새 무애검을 앞에 두고 좌정하였다.
무애검은 지난 한 달간 그의 손에 익었다.
그가 마지막 심마에 일검을 찌르는 순간 무애검이 부르르 떨었다.
마지막 심마.
일권삼각 봉무량의 어린 딸이 그를 바라본 눈빛.
강소군이 찌른 것은 그 눈이 아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못하고 연약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자들의 심장을 찌른 것이다.
-지잉!
무애검이 울었다.
내력을 주입하지도 않았건만 무애검은 은은한 검명을 울리고 있다.
드넓은 하늘을 가르고 나아가고자 하는 검의(劍意).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한 사람이 떠올렸다.
장홍 대장군.
그가 문관의 길을 접고 장선백을 따라 무관의 길로 들어선다고 했을 때 장홍은 그를 불러 말했다.
‘문(文)은 마음을 치고 무(武)는 육신을 벤다. 문(文)은 뜻을 일으키고 무(武)는 목숨을 구한다. 문무는 매한가지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그리고.
강소군은 진정으로 천황성과 맞설 결심을 했다.
젊은 황제를 위해서가 아니다. 부모와 진운초의 복수만도 아니다.
자신들의 뜻대로 세상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끊임없이 약자의 눈물을 빨아들여 자신들의 욕망을 이어가는 자들.
그들의 목을 치고 일러줄 것이다.
세상의 주인은 너희가 아니다!
***
십이지대 후위를 따르던 마차가 멈추고 조개량이 내렸다.
십이지대가 양쪽으로 갈라서며 길을 냈다. 그 길을 따라 선두까지 온 조개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
한 필의 준마에 올라타고 길을 막고 선 강소군을 보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가 직접 수결하여 보냈던 수많은 천무방의 무력대들.
응천대, 천성대 등 무력대를 비롯해 천무십객까지 보내는 족족 핏물에 담가 버린 혈마.
조개량이 의도했건 아니건 그에게 보낸 자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 기억은 여전히 살아 있다.
“으험!”
조개량은 말을 하려다 목이 메어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홍의발을 보며 말했다.
“저자가 미쳤구나. 일천이 넘는 우리를 상대하겠다는 뜻 아니냐?”
“오늘로 저놈과의 악연은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홍의발은 자신하였다.
십이지대는 세상과 연을 끊고 오로지 무공만 수련한 자들이다.
일만여 명이 들어가 열 명 중 하나가 남았다. 그 지옥 같은 수련을 이긴 자들이다.
십이지대는 과거 천하사패 그 어느 방파의 무력보다 강했다.
일천이백 명의 일류고수들.
대정무각과의 격전으로 손실을 입었지만 여전히 일천여 명을 헤아린다. 이들의 무력으로 깨뜨리지 못할 방파가 없다.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도 단숨에 깨 버릴 무림사상 최강의 무력대.
홍의발은 그렇게 믿었다.
조개량은 머리를 굴렸다.
조개량의 목적은 남궁세가를 차지하는 게 아니다. 남궁세가의 수뇌부를 궤멸시키고자 십이지대의 전력을 집중하였다.
아군의 전력은 최소화하고 수뇌부를 잡는 것.
그런데 강소군이 단신으로 관도를 막고 섰다.
‘적어도 이백의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지난 경험으로 보아 이백 명의 사상까지도 입을 수 있다.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
차라리 일부만 상대하게 하고 나머지는 강소군을 지나쳐 남궁세가를 치는 게 낫지 않을까.
조개량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 강소군이 말을 몰고 달려왔다.
단신으로 선제공격을 해 온 것이다.
조개량은 지난날 삼도문 앞에서 응천대가 궤멸당했다는 보고서를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강소군이 먼저 달려왔고 응천대주 우원송이 응전하였다가 거의 궤멸 수준으로 당했다.
“무시하고 남궁세가로 돌진하라!”
조개량이 결단을 내리고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강소군은 어느새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십이지대 선두가 맞서 달려나갔다.
열 명이 한꺼번에 허공을 몸을 날려 강소군에게 향했다.
뒤이어 열 명이 지면을 쓸 듯 강소군의 말을 공격하였다. 양옆으로 튀어나간 무인들은 옆에서 공격하였다.
절대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조개량이 특별히 훈련시킨 합공이었다.
-쉬쉬식!
-스사사삭!
검풍과 검광, 심지어 검기까지 강소군을 향해 쏟아졌다.
순간.
강소군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뒤늦게 날아올랐지만 허공으로 공격해 온 무인들보다 일 장은 더 높이 치솟았다.
-쉬이이익!
강소군이 붉은 핏빛 창을 그었다.
열 명의 무인들이 황급히 몸을 뒤채며 검과 도로 창을 막았다.
-파팍! 카카캉!
“컥!”
“크악!”
기음이 연달아 터지며 검과 도가 잘려 나가고 무인들이 피를 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강소군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아래와 옆에서 짓쳐들어오는 이들은 무시하고 삼 장여 거리를 그대로 뛰어넘어 착지하더니 창을 앞으로 세우고 달려나갔다.
내력을 실은 보법이었다. 한 걸음에 삼 장씩 쭉쭉 뻗어 나갔다.
일직선으로 뻗은 장창의 끝에는 조개량이 있었다.
순식간에 조개량의 앞까지 다가갔다.
“막아라!”
홍의발이 외치며 조개량을 잡아끌었다.
십이지대 무인들 역시 조개량을 앞을 막아서고 일제히 강소군을 향해 검과 도를 뻗었다.
그러나 강소군의 동작은 그들이 반응하는 것보다 빨랐다.
강소군의 몸을 노린 공격은 허공을 쳤다.
그리고 장창의 끝은 조개량의 목전에 이르렀다.
조개량은 혼신의 힘을 다해 뒤로 몸을 물렸다. 그러나 붉은 창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조개량은 반사적으로 옆에 있는 제자 홍의발을 끌어 창을 막으려 했다.
순간, 홍의발이 조개량의 팔을 뿌리쳤다. 그런 후, 오히려 조개량을 돌려세워 강소군의 창끝으로 밀어붙였다.
-콰악!
장창이 조개량의 등을 관통하였다.
“커억!”
조개량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순간 강소군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꼬치에 꿰인 형세가 된 조개량의 몸이 앞으로 꺾였다.
강소군이 허공에서 창을 뽑아 한 바퀴 휘두르며 착지하였다.
“크아악!”
조개량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핏빛 창을 비껴든 강소군이 엎어진 조개량을 내려다보았다.
“으으윽! 이 비겁한….”
조개량은 신음성을 뱉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순식간이었다.
강소군은 말을 달리는 순간부터 조개량을 노렸던 게 분명했다.
달려오다 선두의 무인들을 일창에 쓸어버리고 곧바로 조개량을 향해 찔러 왔다. 그 결과가 모두가 보는 지금의 상황이다.
홍의발은 물론이고 십이지대 무사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아무도 강소군을 향해 달려들 생각을 못 했다.
“사부님!”
홍의발이 조개량을 부축하려 하였다.
“놔라!”
홍의발의 손길을 뿌리치는 조개량의 눈에 원독의 빛이 어렸다.
마지막 순간 홍의발이 자신을 방패 삼지 않았다면 이렇듯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최선이었습니다. 일단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잖아요.”
홍의발이 조개량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조개량은 홍의발을 무시하고 강소군을 노려보았다.
“왜 나를…?”
“당신이 보냈던 자들의 원혼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
강소군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신기수사 조개량.
멸문한 가문의 후손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꿈을 꾸며 절치부심해 왔던 수재.
그의 최후로는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탁상 앞에 앉아서 수많은 목숨을 좌지우지한 대가라고 생각해라.”
강소군이 천천히 돌아섰다.
적장을 잡는 것.
그가 생각한 최선이었다.
하늘은 푸르렀다.
그 하늘 어디선가에서 마운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형은 최선을 다해 적장을 잡아야 돼. 적장의 목이 떨어지면 우리가 사는 거야.’
그랬다.
수백, 수천 아니 수만 대군과 격돌하더라도 장수의 목이 떨어지면 그걸로 승패가 갈린다.
장수를 잃은 쪽은 도주할 명분이 생기고 장수를 잡은 쪽은 위험을 무릅쓰며 애써 쫓지 않는다.
숱한 전쟁에서 군졸들이 목숨을 부지하는 방편이다.
강소군이 천천히 자신의 말을 향해 걸어갔다.
십이지대는 조개량이 친히 키우며 자신의 명령만을 듣도록 훈련시켰다.
명령권자가 사라진 십이지대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에게 내려진 명은 남궁세가의 멸문.
그러나 눈앞의 강적에 장수라고 할 수 있는 조개량을 잃었다.
그 복수부터 해야 할지 아니면 남궁세가로 향하라는 마지막 명을 따라야 할지 순간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물론 망설임에는 강소군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비인간적인 수련을 거쳤지만 그들 또한 목숨이 중요한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그때.
“모두 멈춰다!”
홍의발이 조개량의 시신을 안고 일어서며 외쳤다.
십이지대가 홍의발을 보더니 서로 눈짓을 하고는 검을 내렸다.
홍의발은 조개량의 제자이자 심복이다. 마지막 순간 조개량을 창끝으로 돌려세운 걸 본 자는 몇 되지 않는다.
그걸 본 이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부님의 시신부터 수습하고 다음 임무에 들어갈 것이다!”
홍의발이 외쳤다.
새로운 명령권자가 나온 것이다.
강소군은 십이지대 사이를 가로질러 자신의 말로 다가가 올라탔다.
“이랴!”
말이 곧바로 튀어나갔다. 미물이지만 엄청난 살기가 감도는 이곳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
소리마저 빨아들인 듯 고요한 공간.
검붉은 기운과 푸른 검이 부딪쳤다.
-콰콰쾅!
공간이 터져 나가는 듯한 엄청난 폭음과 함께 비명이 터졌다.
“크아악!”
“컥!”
비명은 멀리서 구경하던 군중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봉황수의 왼팔에 낀 검붉은 철장갑이 산산조각나 날아간 파편에 십여 명이 맞고 나뒹굴었다.
정작 격돌한 당사자는 말이 없었다.
“아!”
짧은 탄식성이 흘러나왔다.
봉황수의 오른손이 남궁악의 왼팔과 함께 땅바닥에 떨어져 펄떡거렸다.
봉황수의 왼팔 또한 팔꿈치서부터 축 늘어진 것이 뼈가 박살난 게 분명했다.
“으….”
봉황수는 지금의 결과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남궁악이 풀쩍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검을 검집에 꽂았다.
그의 왼팔 역시 팔꿈치에서부터 뜯겨 나갔다.
그는 자신의 왼팔을 지혈하며 봉황수를 보았다.
봉황수는 오른팔이 잘리고 왼팔마저 못쓰게 되었다.
불승불패.
남궁악이 예측한 결과였다.
아니, 봉황수가 양팔을 못쓰게 되었으니 남궁악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남궁악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싸움은 끝난 것 같소.”
양팔이 없는 봉황수는 더 이상 봉황수가 아니다.
“으드득!”
봉황수가 이를 갈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봉황수는 전신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에게는 아직 퇴법이 남아 있다.
봉황수가 남궁악을 향해 몸을 던지려는 순간 붉고 푸른 두 줄기 운무가 양쪽에서 덮쳐들었다.
“크윽.”
붉고 푸른 연기와 같은 운무가 스치는 순간 봉황수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졌다.
봉황수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 새끼들이….”
언제 나타났는지 봉황수의 양쪽에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서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창백한 얼굴이었고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요염하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가 놀랐다.
붉은 옷의 여인이 봉황수를 향해 말했다.
“사부님의 복수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는데 누군가 소리쳤다.
“환사의 제자다.”
“청홍쌍요!”
견식이 높은 자가 있던 모양이다.
“크으윽!”
봉황수가 기이한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더니 곧 거구의 몸이 서너 등분이 나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