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39화 (13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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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은 검을 늘어뜨린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시선은 의미가 없었다. 실상 자신들의 내면을 관조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강소군이 먼저 깨어났다. 뒤이어 남궁악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남궁악의 얼굴은 담담하였다.

생사결에 대한 압박감은 찾을 수 없고 대신 평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짝! 짝! 짝!

가볍게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왔는지 남궁천이 연무장으로 들어서며 박수를 보냈다.

“해냈구나!”

남궁천은 직감적으로 아들이 수년간 매달렸던 벽을 넘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남궁악이 미소를 지으며 강소군을 보았다.

“강 아우, 덕분입니다.”

남궁천이 강소군에게 예를 취했다.

“고맙네.”

“아닙니다. 저 또한 얻은 게 많습니다.”

강소군이 남궁악에게 무애검을 돌려주었다.

“소가주. 무애 검집을 가져와라.”

남궁악이 벽에 걸려 있는 무애 검집을 가져왔다.

남궁천이 무애검을 검집에 꽂더니 두 손으로 정중히 강소군에게 건넸다.

“이건 남궁가의 성의라네.”

“…?”

창룡과 무애는 남궁가에서 중히 여기는 보검들이다. 가히 가보급이라 보아도 무리 없을 정도.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닐세. 자네에게 필요한 것이니 건네는 걸세.”

남궁천 역시 절대지경의 고수다.

무공의 경지란 묘한 것이다.

자신은 벽에 부딪혀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면서 남의 벽은 잘 보인다.

마치 높은 봉우리 위에 서면 다른 봉우리는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지만 자신이 선 봉우리는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궁천은 강소군이 심마에 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애! 남궁가의 창궁무애는 푸른 하늘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검법이네. 무애검은 그 뜻을 담고 있지.”

“….”

“자네가 가는 길에 거침이 없기를 바라네. 인과응보를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나?”

남궁천은 강소군이 무애검처럼 거침없이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검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어느 날 이 검은 남궁세가로 돌아올 것입니다.”

강소군이 검을 받아들며 말했다.

“하하. 그것 역시 먼 훗날의 일이 되겠지. 오늘은 더없이 기쁜 날이니 고이 간직했던 술을 따야겠군. 같이 가세.”

남궁천이 앞장섰다.

남궁천의 별원에 술상이 마련되었다.

남궁천이 강소군과 남궁악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이 한 순배 돌자 남궁천이 말했다.

“오래전 일이네. 소가주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지. 장강 일대에 교룡방이라는 흑도 방파가 생겼다네. 남궁세가의 상단과 마찰이 잦았지.”

지역의 패권을 두고 남궁세가와 교룡방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런 와중 막냇동생이 정혼자와 함께 길을 가다 교룡방에 의해 죽고 말았다네.”

남궁악이 진중한 얼굴로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가문의 비사였으나 그도 처음 듣는 일이다.

“당시 나는 복수한다는 일념하에 세가의 전력을 끌고 교룡방을 쳤지. 무려 한 달여 격전 끝에 최후의 저지선을 뚫고 교룡방의 본거지로 쳐들어갔네. 거기서 무얼 봤는지 아는가?”

“….”

“정작 본거지를 지키는 이는 방주와 몇몇 늙은 무인에 불과했네. 단숨에 처지하고 본거지로 들어갔지. 그런데 남아 있는 자들은 아낙네와 아이들뿐이었네.”

남궁천이 장탄식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달여 격전을 하는 와중에 교룡방의 방수들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던 걸세. 최후의 방어선이 사실은 교룡방의 끝이었던 것이지.”

“결국 승리를 하셨군요.”

남궁악이 말했으나 남궁천은 더욱 안색이 어두워졌다.

“승리를 했으나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남궁천이 소가주와 강소군을 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시 우리는 연이은 격전으로 피에 젖은 살귀가 되었지.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뛰어든 무사들이네. 눈앞에 있는 자는 무조건 베었다네.”

“….”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을 때는 본거지에 있던 아낙네와 아이들 절반이 희생된 후였다네.”

남궁천의 말에 남궁악의 얼굴이 굳었다. 흑도방파라지만 아낙네와 아이들까지 해친 것은 선을 넘은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남궁세가는 무림의 일에 나서지 않았네.”

남궁천이 남궁악을 보며 말했다.

“소가주가 태어난 이후는 아예 검을 버렸지. 검을 버리니 오히려 검이 눈에 들어오더군.”

강소군은 남궁 삼남매가 이제껏 생사를 넘는 싸움을 겪지 못한 반쪽 무인으로 성장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궁천은 자식들이 살인하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무가! 넘보는 자가 있다면 그건 용납할 수 없지. 나 자신이 아니라 가족과 남궁세가에 의지한 수많은 목숨을 위해서!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고 변명이라고 해도 좋네. 나는 기꺼이 혈로를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네.”

남궁천이 긴 말을 끝내고 말했다.

“내일 소가주와 봉황수의 생사결이 끝나는 순간 저들이 쳐들어올 걸세. 손님들에게 떠나라 했건만 아직 남아 있는 자들이 적지 않더군. 하지만 자네는 떠났으면 하네.”

강소군이 남궁천을 보았다.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떠나라고 한다.

남궁악 역시 의외라고 생각했으나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내일의 격전은 무인 대 무인의 싸움이 아니네. 전쟁처럼 죽고 죽이는 무의미한 살상전이 될 것이야. 자네는 이미 충분히 많은 피를 봤네. 본가의 일로 자네에게 더 피를 보라고 할 수는 없지.”

남궁천은 강소군의 심마를 염려한 것이다.

“나와 소가주에게는 명분이 있네. 가족과 식솔을 지켜야 한다는. 하지만 자네는 그렇지 않네.”

남궁천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살인의 기억은 지울 수가 없는 것이네. 그러다 중독이 되어 마의 길로 들어선 이들이 한둘이 아니지. 자네만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네.”

“….”

강소군은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

이튿날.

봉황수는 객잔을 나왔다. 그는 생사결이라 쓰인 깃발을 등에 꽂고 있었다.

거대한 팔뚝에는 검붉은 철장갑을 끼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장과도 같은 기세였다.

“크하하. 살인하기 딱 좋은 날이로구나!”

밤새 부슬부슬 내리던 봄비가 그쳤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잔잔했다.

봉황수는 객잔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수많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그와 남궁악의 생사결을 보러온 이들이다.

무림에서 고수들의 격전을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절대고수 간의 비무는 더더욱 그렇다.

비무, 특히 생사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악한 자들은 자신의 무공을 한층 높일 수 있다.

그러니 정사지간을 불문하고 수많은 무인들이 모였다. 이는 봉황수가 노린 수이기도 했다.

“남궁악은 오늘의 결전을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봉황수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러자 모인 군중들이 함성을 질렀다.

“옳소!”

“남궁악은 나와라!”

봉황수가 남궁세가를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르며 잔뜩 기대감에 부풀었다.

남궁세가의 정문 앞은 널따란 광장이다. 그 한복판에 남궁악이 서 있었다.

창룡검을 들고 표표히 서 있는 모습이 준수하기 그지없다.

명문의 기품이 전신에서 흘러내렸다.

그에 비하면 봉황수에게서는 마치 한 마리 야수와도 같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피에 굶주린 듯 야수.

환사를 죽여 처참하게 저잣거리에 매단 그에게서 혈향이 진하게 풍겼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더욱 흥분하였다.

“하하하. 이번에는 숨지 않았구나!”

봉황수가 커다란 눈을 번뜩이며 광소를 터뜨렸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명문가의 콧대 높은 귀공자를 꺾을 생각을 하니 절로 흥이 돋았다.

남궁세가의 정문을 두고 사람들이 반원형으로 공간을 만들었다.

남궁세가의 문에서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천과 호가장로 남궁휴, 그리고 개방 태상장로 오개 등이었다.

남궁천이 모여든 사람을 향해 외쳤다.

“모두 십 장 밖으로 물러나시오!”

사람들이 흥분하여 너무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절대고수들의 싸움은 주변 지형까지 초토화시키고 만다. 가까이 있다가 휩쓸려 죽는 이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 사람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쯧쯧, 결국 호기심 때문에 죽는다니까.”

오개가 모여든 군중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남궁천은 내심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 아들의 무공이 한 걸음 더 나아갔으나 그렇다고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봉황수를 직접 보니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여간 거친 게 아니다.

남궁천 자신이 직접 나선다 해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른바 절대지경의 고수는 대개 무공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게 보통이다.

그런데 봉황수는 그렇지 않았다. 한 걸음 한 동작마다 극강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무공마다 특성이 있고 사람마다 성취가 다르니 알 수는 없지만 특이한 무공을 익힌 게 분명했다.

“자신 있느냐?”

남궁천이 아들에게 물었다.

남궁악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불승불패의 경지.

남궁악이 지난 한 달간 강소군의 조력을 받아 이른 경지다.

“네가 죽더라도 복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가문은 그저 가문의 길을 갈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원치 않습니다.”

남궁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별의 말이 뭐 그리 긴가? 어서 시작하자!”

봉황수가 외쳤다.

남궁악이 돌아서서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삼 장여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와아!”

군중들이 기대에 찬 함성을 질렀다.

***

강소군이 거처를 나왔을 때 정원에는 매화향이 짙었다.

강소군은 등에 무애검을 매고 자신의 혈창을 엇갈려 맸다.

남궁세가의 장원은 텅 비다시피 하였다.

모두 정문에서 벌어지는 남궁악과 봉황수의 결전을 보러 갔다.

장원 내외의 매복만 남아 있을 뿐이다.

강소군이 문을 나서는데 앞에 남궁령이 서 있었다.

거대한 준마의 말고삐를 쥔 남궁령은 안색이 하얗게 굳었다.

차마 남궁악의 비무를 보지 못하고 대신 강소군을 배웅하러 온 것이다.

“어디로 갈 건가요?”

남궁령은 강소군을 잡고 싶었다.

남궁악이 이기면 같이 기뻐하고 지면 함께 슬퍼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강소군이 떠난다니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그에게는 그의 길이 있지. 내가 감당할 건 내가 해야지.’

남궁령은 자신의 마음을 추슬렀다.

“무한에서 기다리겠다.”

봄이 절정에 이른 오월.

무한에서 천하비무대회가 열린다.

무림맹주를 선출하고 강호 대파와 세가는 물론, 원하는 문파들은 모두 참여한 무림맹이 정식으로 출범한다.

무림 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남궁령이 희미하게 웃었다.

늘 쾌활한 남궁령이지만 지금은 웃을 수가 없었다.

큰오라비는 생사대적과 겨뤄야 하고 가문을 향해 거대한 적이 밀려들고 있다.

“볼 거다. 반드시.”

강소군이 짤막하게 답하고 말 위에 올랐다.

강소군은 남궁세가의 옆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남궁악과 봉황수의 결전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 자리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랴!”

강소군이 말고삐를 채자 화들짝 놀란 말이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고는 앞발을 구르다 튀어 나갔다.

-두두두두.

남궁령은 멀어지는 강소군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그녀의 검은 머리에 하얀 매화 한 송이가 내려앉았다.

남궁령은 매원결의의 밤이 떠올랐다.

그 좋았던 밤은 지나고 한 사람은 생사결을 펼치고 다른 한 사람은 떠났다.

-또르륵.

남궁령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오늘에서야 그녀는 풋내 나는 소녀에서 삶의 신산함을 어렴풋이 느낀 여인이 되었다.

****

-착! 착! 착!

일천여 무인들이 관도를 메우고 경보로 질주하였다. 발맞춰 달리는 소리가 관도를 울렸다.

“잠시 멈춘다!”

선두를 달리던 십이지대 백서대대주가 손을 들었다.

관도 저 멀리 한 필의 말이 서 있었다.

말 위에는 붉은 장창과 검을 등에 맨 사람이 타고 있었다.

강소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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