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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다!”
누군가 외쳤다.
강소군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손이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피로 물든 혈수로만 보인다.
강소군이 가볍게 탄식하였다.
피의 굴레를 벗을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천황성의 무력대가 온다고 하여 수뇌부 동정을 살피고자 왔다. 가능하면 수뇌부만 처치할 생각이었다.
남궁악을 대신하여 봉황수와 싸울 수는 없었다. 봉황수는 남궁악이 무인으로서 서기 위해 넘어야 할 벽이다. 넘지 못하고 죽는 것 또한 무인으로서 남궁악의 운명이다.
하지만 무력대는 그가 개입할 수가 있다.
강소군은 봉황수에 이어 무력대까지 보낸 것을 보고 천황성이 무림맹 결성을 적극 저지할 생각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남궁세가를 도와 무림맹을 추진할 경우, 천황성은 계속하여 자신들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기에 찾아왔는데 지휘소에서 들려 오는 음성이 낯익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였다.
어렴풋이 짐작은 가지만 확실치가 않아 결국 강소군은 모습을 드러냈다.
강소군이 자신을 에워싼 무사들을 보다 문득 기도가 낯익다는 걸 깨달았다.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 그 또한 확실치가 않았다.
강소군이 십이지대와 부딪힌 건 마가보와의 싸움이 있었을 때였다. 그때는 심마에 빠졌기에 온전히 적을 살피지 못했다.
그러나 연이어 낯익은 느낌이 들자, 그제야 지휘소에 있는 인물에 대해 확신이 들었다.
강소군이 자신을 에워싼 무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 수뇌부에게 보자고 해라.”
나직하지만 내력을 실은 음성이었다. 지휘소의 인물에게 보낸 것이다.
지휘소 천막문 휘장이 걷히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조개량이다.
조개량과 강소군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조개량에게 강소군은 남다른 존재였다. 자신의 대계를 망치는 한편 기회를 준 인물이다.
조개량은 애초에 구양운을 천무방의 후계자로 삼아 패권을 쥐고자 했다.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가장 확실한 계획이었다.
강소군이 구양운을 죽이자 계획을 바꿔야 했다.
먼저 구연강의 분노를 부추겨 강소군을 쫓으며 천무방의 무력을 절반이나 날렸다.
그러고 나서 십이지대를 이용해 구연강을 제거하고 천무방의 패권을 직접 차지하려 시도했으나 구양수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의도야 어쨌든 천무방의 무력대를 날린 경험은 조개량에게 남아 있다.
조개량은 남궁세가를 치기 위해 오면서 심어 놓은 세작으로부터 정황을 보고받았다.
강소군이 있다는 말에 백 리 밖에서 멈추고 대책을 마련하던 중이었다.
십이지대는 천무방 무력대와 달리 함부로 잃을 수 없는 그만의 무력대다.
남궁세가를 상대하기 위해 서너 대의 희생을 감수할 생각이었는데 강소군이 참전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과거 경험으로 보아 적어도 칠팔백 명은 손실을 볼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남궁악을 봉황수에게 맡기고 남궁천만 쓰러뜨리면 된다고 여겼으나 변수가 생긴 것이다. 당연히 조개량도 따로 대책을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소군이 단신으로 찾아왔다.
“죽음이 두렵지 않나? 단신으로 오다니.”
조개량이 강소군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여기에는 일천 무인이 있네.”
강소군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기를 바라나?”
강소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일천 무인을 모두 죽일 수는 없지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사실은 조개량도 알고 있다.
조개량이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강소군이 남궁세가를 위해 나설 줄은 몰랐다. 생각지 못한 변수다.
잠시 고민하던 조개량이 먼저 말을 꺼냈다.
“들어오게.”
뜻밖에도 조개량이 강소군을 자신의 지휘소로 들였다.
“모두 물러나라.”
십이지대 무인들이 길을 터주었다.
강소군이 천막으로 들어가자 십이지대 무인들이 지휘소를 겹겹이 에워쌌다.
“앉지.”
두 사람은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았다.
조개량의 뒤로 제자이자 심복인 홍의발과 호위들이 줄지어 섰다.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가?”
강소군은 물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천무방의 군사가 천황성 사람이었다니 놀랍군.”
“애초에 천무방은 수단에 불과했지.”
조개량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내심은 쓰렸다.
대정무각과 도룡회가 저렇게 스러질 줄 알았다면 천무방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강호일통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의 강소군에게 더없는 살의가 일었다.
하지만 내심을 감추고 담담하게 말했다.
“남궁세가를 위해 나설 것인가?”
이번에도 강소군은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처음부터 천황성 사람이었던 건가?”
조개량이 말을 멈추고는 강소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를 찾아온 게 아니었군.”
조개량이 주위에 있는 호위들에게 손짓을 했다.
“모두 나가 있어라.”
홍의발이 주저하였다.
“저자와 단둘이 계시면 위험합니다.”
“너희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가 죽이려 들면 어쩔 수 없지.”
조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호위들이 나가자 조개량이 말했다.
“천황성에 대해 뭘 알고 싶은 건가?”
확실히 조개량은 머리가 뛰어났다. 강소군이 찾아온 목적을 짐작해낸 것이다.
“천황성은 어디 있소?”
“천주가 있는 곳을 천황성이라 한다면 나도 모르네.”
공손 노야는 조개량을 믿지 않았다. 그러기에 조개량을 부른 곳은 외딴 장원이었다.
“사실 나도 아는 바가 없네. 천주 휘하에 무공을 측량할 수 없는 고수들이 있다는 것, 삼태상이라는 자들이 일선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정도밖에 아는 바가 없지.”
조개량은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건 천황성의 책사 공손 노야가 머물고 있는 곳 정도지.”
“그 말은 당신이 천황성 사람은 아니라는 말인가?”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애매하군.”
조개량이 에둘러 대답했다.
“답을 했으니 나도 한 가지 묻지. 천황성에 대해 알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나를 죽이려 했으니까.”
조개량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강소군이 답을 피하려는 걸 알아챈 것이다.
“의외로 솔직하지 못하군.”
“모든 걸 말해 줄 만한 상대는 아니지.”
강소군의 말에 조개량이 피식, 웃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죽이려는 자도 많군. 나와 손을 잡아 보는 건 어떻겠나?”
“….”
강소군은 조개량을 주시하였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아무래도 공동의 적이 있는 것 같으니까.”
“공동의 적?”
“공손 노야가 있는 곳을 말해 주겠네. 대신 자네는 남궁세가를 떠나게.”
강소군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사람들이 나를 혈마라고 부르더군. 그래서인가 이 손은 항상 피에 젖어 있지.”
강소군이 앉아 있는 조개량에게 말했다.
“일천 무인이라고 했나? 그 피를 더 묻힌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겠지.”
강소군이 돌아서 지휘소를 나왔다.
십이지대 무인들이 포위망을 풀지 않았다.
강소군이 말없이 걷자 주춤주춤 길이 열렸다.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달려들며 검을 찔렀다.
강소군은 검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검광이 난무하는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켁!”
무인은 멱살이 잡혔다.
강소군이 무인의 멱살을 쥐고 십이지대 무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아니다. 너희가 남궁세가로 향하는 날!”
강소군이 무인의 멱살을 밀쳤다.
-콰당탕!
무인이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강소군이 말했다.
“지옥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겠다.”
강소군의 전신에서 거센 기파가 터졌다.
십이지대 무인들은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강소군은 천천히 걸어 십이지대 진영을 빠져나왔다.
***
이른 봄을 시샘하듯 차가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겨울의 끝자락과 성급한 봄 사이로 내리는 비.
생사결을 하루 앞둔 남궁세가는 음울한 비로 인해 회색빛에 잠겨 있었다.
초저녁.
강소군은 자신의 거처를 나와 남궁세가의 내원으로 갔다.
내원 깊숙한 곳.
남궁악의 연무장이 있다.
강소군이 다가가자 지키고 있던 무사가 말없이 길을 열어 주었다.
벌써 근 한 달째 강소군이 찾아왔으니 이제 익숙해진 것이다.
남궁악은 연무장 한가운데 좌정하고 앉아 있었다.
강소군이 들어섰으나 남궁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강소군은 천천히 다가가 앞에 앉았다.
서른 중반의 절대 고수.
그러나 아직까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무인.
강소군은 부러웠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삶이 자신의 손에서 끝을 맺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슬픈 눈이 여전히 그의 뇌리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 눈에 답을 했다.
‘운명이다.’
남궁악과 그의 삶이 다른 건 처해 있는 자리가 달랐기 때문이다.
강소군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남궁악이 돌연 눈을 떴다.
“왔군.”
강소군은 매일 저녁마다 남궁악의 연무장을 찾아왔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군. 아쉽네.”
남궁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벽에 걸린 검 두 자루를 가져왔다.
창룡과 무애.
남궁세가에서 간직하고 있는 두 자루의 보검이다.
남궁악이 무애검을 강소군에게 건넸다.
두 사람이 마주하였다.
남궁악이 창룡검을 세웠다.
남궁세가의 절학 창궁무애검법.
절대지경에 이르러 초식을 버린 남궁악이 다시 창궁무애검법을 수련한 것은 강소군의 조언 때문이었다.
강소군이 무당에서 마음공부를 하였을 때 현치자로부터 얻은 바는 ‘초식의 의미’였다.
현치자는 수많은 초식을 만들고 버렸다.
현치자는 말했다.
‘진정한 버림은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상관무영이 현치자를 찾는 것 또한 무공을 익히거나 비무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현치자가 말하는 초식 그 자체가 되는 걸 얻고자 함이었다.
상관무영은 강소군과의 대치에서 현치자의 오의를 깨달았다.
강소군은 그 심득을 남궁악에게 전했고 그는 지난 한 달간 남궁세가의 기본 검법부터 창궁무애검법까지 하나하나 다시 익혔다.
남궁악이 창궁무애검법의 기수식을 취하더니 곧바로 제일식 개황창천을 펼쳤다.
누런 허공이 열리고 푸른 하늘이 나타나듯 푸른 검광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내력도 없이 펼치는 검이건만 마치 하늘의 그물처럼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강소군이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지난 한 달간 무애검을 가지고 남궁악과 상대하였다.
무애.
막히거나 거칠 것이 없는 경지.
검은 그 이름처럼 고고하였다. 강소군은 검을 휘두르며 자신의 뇌리 속에서 맴도는 심마를 수없이 베었다.
지난 한 달간은 강소군에게도 적지 않은 심득을 가져왔다.
강소군은 남궁악의 검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심마와 싸웠다.
형체가 없는 감정도 집중을 하면 머릿속에서 형상이 된다.
애잔한 혈육의 정은 어린 소녀의 슬픈 눈이다.
죽어 가는 무사의 공포는 악귀의 형상을 띠었다.
삶에 대한 미련이 남은 몸부림은 절망의 벽으로 형상화하였다.
일초 일초.
강소군은 거침없는 무애검의 기운으로 심마를 베어냈다.
강소군은 남궁악의 푸른 검광 한가운데 검을 찔러 넣었다.
심마의 정면에 꽂아 넣은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검풍조차 일지 않건만 연무장은 검압으로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소리도 없는 두 사람의 움직임은 마치 무언극을 보는 듯했다.
“후우!”
어느 순간 남궁악이 검을 내렸다.
남궁악은 오늘 창궁무애검법과 기어이 하나가 됐다.
강소군은 자신의 마지막 심마.
어린 소녀의 슬픈 눈에 검을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