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36화 (136/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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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뭡니까?”

“소가주에게 온 비무첩이네.”

“…!”

“어떤 놈이 이런 장난을 하나 했지. 그런데 배후에 천황성이 있더군.”

강소군이 배첩의 뒷면을 보았다.

봉황수.

“일전에 그놈이 소가주에게 비무를 청했지. 그때는 무시하라고 일렀네. 그랬더니 이런 걸 보내오지 않았겠나.”

작년 봉황수가 강남으로 넘어와 머물며 남궁악에게 공공연하게 도전을 한 적이 있다.

남궁천은 친분이 있는 개방에게 봉황수의 뒷조사를 부탁했다.

봉황수가 천황성의 고수로 백정무를 꺾었다는 사실이 개방을 통해 남궁세가에 들어왔다.

“저를 부르신 까닭을 듣고 싶습니다.”

“본가는 선대에서부터 조정과 무림의 일에 개입하는 걸 꺼려 왔네. 그럼에도 내가 무림맹을 추진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강소군이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강소군은 무림에 퍼진 천황성 세력을 파악하기 위해 나왔다.

동시에 불완전한 그의 절대지경을 완성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강소군은 갑작스레 무림맹을 결성하려는 남궁세가의 배후에 천황성이 있지 않을까 의심을 하던 차였다.

조정과도 인맥이 있고 상계와 무림에 걸쳐 퍼진 남궁세가는 충분히 의심할 만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막상 와서 남궁우를 보니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이제 남궁천을 만나니 확실해졌다. 남궁세가는 천황성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라고 보아도 좋을 듯했다.

왠지 안도하는 마음이 든 건 남궁 남매와의 인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돈처럼 정직한 게 없다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숨길 수가 없는 게 돈이라네.”

“….”

남궁천이 뜬금없이 돈 이야기를 꺼냈다. 강소군은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의아해했다.

“본가는 여러 상단과 친분이 있지.”

친분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몇몇 상단은 실질적인 주인이 남궁세가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좀 이상하더군. 막대한 돈이 어디론가 흘러가는데 알 수가 없었네.”

강소군은 그제야 남궁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천황성은 관계와 상계, 무림에 걸쳐 퍼져 있다고 했다.

남궁세가는 무가이면서도 강남 상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 정도 규모가 되면 자연 많은 정보가 흘러들어온다.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흐름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우아가 제법 똑똑하다네. 부자연스러운 흐름을 발견했지.”

남궁우를 바라보니 겸연쩍게 웃었다.

남궁천은 큰아들은 무의 길로 작은 아들은 상계로 이끌었다.

“대정무각이 천황성에 의해 깨졌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있었지. 그래서 무림맹을 추진하게 된 걸세.”

“무림맹으로 그들과 대적하겠다는 겁니까?”

남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을 추진하다 보면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리라 봤지. 그만한 세력이라면 반드시 개입하려 들 것이니까.”

남궁천은 대파와 세가를 설득하여 무림맹을 결성하고 남궁악을 맹주로 앉힐 생각이었다.

“당초 각 대파와 세가의 후기지수 위주로 출범하려 했네. 그런데 각 파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명실공히 무림맹이 되고 말았지.”

서른 중반의 나이로 십대고수의 일인에 오른 남궁악은 모든 후기지수들의 우상이다.

젊은이들로 맹을 꾸리면 그가 맹주가 되는 것도 당연했을 터였다.

그러나 여러 이익이 끼어들고, 판이 커지면서 남궁악의 맹주 자리가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아직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남궁악은 여전히 무림 십대고수이자 절대지경의 고수이니까.

무림의 선배라고 자처하는 이들 중에서도 그를 감당할 자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개입할 줄은 몰랐군.”

“이런 식이라 하면….”

“모르겠나?”

남궁천의 시선이 배첩으로 향했다.

강소군이 문득 깨달았다.

“그렇군요. 맹주 자리에 오를 만한 자를 미리 제거하겠다는 거로군요.”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 비무첩을 받은 이상 남궁세가의 명예가 달렸으니 이전처럼 외면하고 말 수는 없다.

“천황성에 대해 아는 바를 일러줄 수 있겠나?”

“저도 아는 바가 많지는 않습니다.”

강소군이 잠시 생각하고는 그가 아는 바대로 말했다. 다만 황제를 협박했다는 사실과 대정무각이 맞서고 있다는 건 빼놓았다.

조정과 상계, 무림에 걸쳐 배후에서 조종을 하는 세력이라는 것과 대단한 고수들이 있다는 정도였다.

“대체 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군.”

남궁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는 천황성의 고수를 쓰러뜨렸다고 들었네. 봉황수와 소가주가 싸우면 어떻게 되겠나?”

“소가주는 죽을 겁니다.”

강소군이 짤막하게 답했다.

남궁우가 흠칫, 놀랐다. 그에게 있어 형은 우상과도 같은 존재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형이 누군가에게 진다는 건 상상을 해 보지 못했다.

“이유는?”

“소가주가 살인을 한 적이 있습니까?”

“….”

남궁천은 자신의 아들이 절대지경에 든 이후 그 이상의 성취를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강소군에게 물은 건 무공의 고하였는데 살인을 거론하니 의외였으나 바로 깨달았다.

남궁세가와 같은 명문의 자제들은 직접 사람을 죽일 일이 거의 없다.

천하사패가 각축을 벌일 당시 세가와 대파는 자신의 영역만 지키고 있었을 뿐이고 천하사패는 이를 침범하지 않았다.

그러니 싸움다운 싸움을 겪어 보지 못한 것이다.

남궁천의 안색은 침중하였다. 그 역시 알고 있던 것이다.

당장 남궁천 자신만 해도 누군가와 겨뤄 본 지 십여 년이 넘었다. 그가 나선다고 해도 봉황수를 꺾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강소군은 남궁악을 봤을 때 검을 보았다. 그런데 그 검에는 살기가 없었다. 다만 무의 극의를 향한 열정만 있었다.

“봉황수가 강하다 하나 형님도 절대지경의 고수입니다. 적어도 양패구상을 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서로 부상을 입는 정도로 끝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남궁우가 말했다.

남궁천과 강소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로 끝날 수밖에 없다.

남궁천이 한숨을 쉬곤 말했다.

“비무가 한 달 정도 남았네. 자네가 비무의 공증인이 되어 주지 않겠나?”

남궁천의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면 무림맹을 추진한 걸 후회할지도 모른다.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결과가 되었으니까.

강소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섭섭지 않게 사례하겠네.”

“사례는 바라지 않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강소군은 진심이었다.

***

구연강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삐걱.

문이 열리고 구양수가 들어왔다.

“너희는 나가 있어라.”

옆에서 간병하던 시비들이 나갔다.

“약 드셔야죠.”

구양수가 환약을 물에 개어 구연강의 입에 흘려 넣었다.

구양수는 하루에 한 번씩 찾아와 계속해서 약을 먹였다.

구양수가 사천당가에서 큰돈을 주고 산 독은 마비산의 일종이었다.

절대고수도 피할 수 없었지만 대신 약효를 지속시키려면 계속 투약해야 했다.

구양수는 약을 먹이고 옆에 앉아 중얼거렸다.

이제는 일과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숨죽이고 있던 것들이 요즘 부쩍 설치고 있어요. 무림맹을 만든다는군요.”

구양수가 뭐가 그리 좋은지 킬킬거렸다.

“비무대회로 맹주를 뽑는답니다. 크하하. 이거야말로 앉아서 밥상을 받는 격이죠.”

“형님이 무림맹주가 될 겁니다. 제가 그리 만들 거거든요. 그러면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던 강호일통? 단숨에 끝나는 거라고요. 대단하지요?”

“듣고 계시는 거 다 알아요. 제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죠? 아마 모를 거예요.”

“어머니가 마씨의 독수에 돌아가시고 우리 두 형제도 언제 죽을지 몰랐죠. 그때 자기 목숨보다도 더 저를 챙겨주었던 형이거든요. 아시다시피 제가 좀 약했잖아요? 형 아니었으면 저는 죽었을 거예요.”

“바보 같은 형은 그 원한도 다 잊고 마씨를 용서하더라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형은 소림사로 가서 중이 됐어야 했어요.”

“그런데 요즘 형도 좀 독해졌더라고요. 조개량 그놈을 잡아 오라고 닦달이에요. 근데 그놈이 어디 숨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요. 클클, 사실 잡아 올 생각도 없어요. 형은 조개량이 아버지한테 독을 썼다고 생각하고 해약을 얻기 원하는데 조개량이 잡히면 곤란하죠.”

“그냥 마음 편히 누워 계세요. 그럼 무탈하실 거예요. 형이 무림맹주 되는 것까지는 보고 가셔야죠. 안 그래요?”

구양수는 중얼중얼 뇌까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가며 언제나처럼 시비에게 일렀다.

“푹 주무셔야 하니 저녁까지 아무도 들이지 마라.”

구양수가 나가고 얼마 뒤 구연강이 부시럭거리더니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좌정하여 운기조식을 하였다.

***

“재주가 뛰어나다더군.”

공손 노야는 바둑판을 보는 시선조차 거두지 않고 말했다.

옆에 선 조개량은 허리도 펴지 못하고 말했다.

“가진 바 재주는 용렬하나 조 왕야께서 좋게 봐 주신 겁니다.”

“그래? 재주도 없으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공손 노야가 대마가 서로 엉켜 싸우는 바둑판 한 곳에 흑돌을 놓으며 말했다.

“재주는 없지만 충심은 있습니다.”

조개량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 충심이 누구를 향한 것인가?”

“….”

조개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무방주는 그대를 믿었는데 지금 폐인이 됐더군.”

“….”

조개량은 모멸감을 느꼈다. 공손 노야는 그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간세에게 충심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 자네라면 그렇게 하겠나?”

공손 노야는 흰돌을 들고 한참 동안 바둑판을 들여다보았다.

홀로 흑백의 대결을 하는 중이다.

“흑이 살고자 맹렬하게 몸부림치고 있지. 이때 끊으면 약간의 흑돌을 얻어 낼 수는 있네. 하지만 대국을 놓고 보면 차라리 살려 주는 게 낫지.”

공손 노야가 중얼거리다 흰돌을 놓았다.

흑의 숨통을 끊는 자리가 아니라 백의 형세를 두텁게 하는 곳이다.

“이 귀퉁이 흑은 살았지만 실은 이 한 수로 대국은 끝났네.”

공손 노야가 바둑판을 물리고 조개량과 마주하였다.

“얄팍한 재주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놈에게 내가 뭘 기대해야 하지?”

조개량이 허리를 숙였다.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를 얻고 싶으면 가진 바 재주를 보여 봐라.”

“…?”

“네놈 때문에 쌍렵을 잃었다. 강소군이라고 했나? 그놈의 머리를 가져와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

공손 노야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조개량은 숙인 허리를 더 숙였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강소군을 잡으면 쌍렵을 잃은 체면을 살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승부수는 다른 곳에 있는데 어찌 그에게 힘을 쏟아야 합니까?”

“승부수가 어디 있다는 게냐?”

“무림맹!”

“….”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공손 노야가 지그시 웃었다.

“어떻게?”

“재주는 부족하지만 노야께서 깔아두신 판을 정리할 정도는 됩니다.”

조개량의 말에 공손 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는 빠르군.”

“믿어 주십시오!”

조개량은 그 자리에 엎드려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조개량은 주고수로부터 천황성에 대해 들은 바 있다.

천주가 있고 그 아래 무위를 측량할 수 없는 고수들이 있다고 했다.

이를 좌지우지하는 이가 공손 노야였다.

조개량이 판단하기로 주고수와 삼태상은 공손 노야의 바둑돌일 뿐이다.

‘네놈만 제거하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는 내 것이다.’

조개량은 공손 노야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다.

공신의 후예였으나 한순간 역적의 자식이 되어 죽을 지경에 처했던 조개량이다.

일족과 함께 죽을 뻔한 그를 살려준 건 주고수였다. 그 은혜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수년간 천무방 구연강의 수족 노릇을 했다.

그러나 진정 원하는 건 그가 올라갈 수 있는 최상의 자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였다.

주고수가 허수아비에 불과한 이상 조개량의 목표는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원하면 무릎을 꿇어 주마. 하지만 네 목은 내가 직접 칠 것이다.’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조개량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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