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35화 (135/250)

135

-뚝.

주고수가 매화나무 가지를 잘라냈다. 잘린 나뭇가지가 땅에 떨어졌다.

“위로 뻗으려는 가지는 쳐내야 옆으로 뻗어 모양을 갖출 수 있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으나 뒤에 선 조개량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들을 시험하지 말게. 다음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걸세.”

조개량이 고개를 숙였다.

쌍렵이 폭주하여 무당산에 난입했다가 죽었다. 드러난 상황으로는 지시를 어긴 것이 그들이었으니 쌍렵의 성급한 성정 때문에 벌어진 일로 넘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천황성은 조개량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 냈다. 쌍렵의 성정을 파악하고 무당산까지 난입하도록 유도한 것은 조개량이다.

주고수가 아니었다면 조개량은 죽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주군을 모시는 자입니다.”

“….”

주고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과연 조개량이 자신을 위해 천황성을 가늠하려 들었을까? 그건 그의 머릿속을 열어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일이다.

주고수가 매화나무 가지를 다듬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강휘가 그랬지.”

‘나라를 경영할 기량이 있는 분이 정원 손질이나 하고 계시니 답답하시겠지요.’

남경 조왕부를 찾아온 강소군이 한 말이다.

“나는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네. 조급하게 굴지 말게.”

주고수는 천천히 나무를 다듬었다.

조개량은 그의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나뭇가지 손질을 모두 마친 주고수가 돌아보며 말했다.

“천황성에서 자네와 십이지대를 요구해 왔네.”

“…?”

“자네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이라 믿네. 적어도 사냥개는 되지 않겠지.”

***

대청 한 면이 온통 지도다.

중원을 그대로 옮겨 놓은 전도 앞에서 공손 노야가 서성거렸다.

한참 지도를 들여다보던 공손 노야가 손에 든 작은 깃발을 던졌다.

-팍!

깃발이 한 곳에 가서 꽂혔다.

노란 깃발이 있는 곳에 꽂힌 붉은 깃발.

그때 뒤에서 누군가 들어오며 말했다.

“결정을 한 모양이군.”

공손 노야가 돌아서며 예를 취했다.

나타난 이는 사십 대로 보이는 청수한 중년인이었다.

관옥 같은 얼굴에 더할 수 없는 고귀함이 흘러내렸다.

“천주님을 뵙습니다.”

천주라 불린 사내는 공손 노야가 던진 깃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황제가 결국 말을 듣지 않을 모양이군.”

“제 아비의 길을 따라갈 것 같습니다.”

공손 노야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십 대로 보이나 천주는 그보다 나이가 많다. 세월이 그를 비껴가는 것 같았다.

“대안은 조왕인가?”

“그자는 생각이 많고 조심스럽기가 여우같은 자입니다. 하나 시세를 아는 자이니 그럭저럭 내세울 만합니다.”

천주의 시선이 수많은 깃발이 꽂힌 곳으로 향했다.

“무림은 여전히 복잡하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개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노야가 직접 나서겠다고?”

공손 노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조왕의 책사가 제법 쓸 만합니다. 그자에게 일을 맡겨볼까 합니다.”

천주가 대전 상석에 앉았다.

“그자를 죽이려 하지 않았나?”

“조왕이 감싸고 도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십이지대라는 무력을 가지고 있더군요.”

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수만 가지고 전쟁을 할 수는 없겠지.”

“이번 기회에 무림을 확실히 장악하여 다시는 대정무각 같은 조정세력이 발붙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은 무림으로 놔두어야 하는 것을. 전대 황제가 욕심이 과했지. 조정에서 무림까지 장악하려 하다니.”

“대정무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계획은?”

“우선 무림맹을 장악하고자 합니다.”

“무림맹을?”

“철권호라면 무림맹주의 자리에 알맞을 겁니다. 그의 성취는 어떻습니까?”

“괜찮더군. 조금만 끌어주면 절대지경에 들 걸세. 하지만 대파와 세가들이 가만있겠나?”

“받아들이도록 해야지요. 그래서 흑천맹을 좀 밀어주고 봉황수로 하여금 고수들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천주가 공손 노야를 가만 바라보았다.

“노야, 단순한 게 좋은 것이네. 일을 복잡하게 하는 건 순리에 맞지 않아. 우리가 천하를 조율할 수는 있어도 장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공손 노야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호에 세력이 너무 많습니다. 혼란이 가중되면 상계나 조정도 곤란해집니다. 어느 정도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가 지도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군.”

천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그렇듯 개입은 적당해야 하네.”

“알고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흑천맹은 본성의 존재를 모를 겁니다. 봉황수 역시 십대고수만 손을 볼 겁니다.”

“알겠네.”

대전을 나가는 천주에게 공손 노야가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있어 천주는 신과 같은 존재다. 신의 침묵을 깰 생각은 없었다.

***

“아까는 실례가 많았네.”

남궁악이 말했다. 남궁령의 말을 듣고 대뜸 하대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편하게 대해 주시니 좋습니다.”

강소군이 말했다.

남궁악은 그보다 십여 살 위이니 후배인 셈이다. 덕분에 편하게 어울리게 된 것은 사실이다.

남궁세가 깊숙한 후원.

세가 사람들이 비원(秘苑)이라 부르는 정원에 이른 매화가 폈다. 역시 강남이다.

연못과 매화가 어우러진 정원이 내다보이는 널따란 마루 대청.

남궁세가의 삼남매와 강소군이 둘러앉았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정갈한 술상.

남궁세가는 무가이면서도 문가의 기풍이 물씬 풍겼다. 그래서 강소군에게는 익숙하다.

남궁세가의 삼남매는 꾸밈이 없었다.

특히 천하 십대고수의 일인이라는 남궁악이 순박한 무치라는 건 의외였다.

“호일도가 자네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궁금했지. 그의 무공이라면 어디 가서 맞지는 않을 거라고 봤는데 말야.”

지난해 주첨기의 사례회에서 강소군이 호일도를 쓰러뜨린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다.

호일도는 남궁세가에서 삼 년을 수련했는데 남궁악이 아끼던 자였다.

“큰오라버니! 그런 이야기는 왜 해요! 좋은 자리에 싸움 이야기나 하고.”

강소군이 난처해할 화제라고 생각한 남궁령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강 오라버니도 너무했어요. 그냥 가려고 했다면서요? 자기가 필요한 것만 묻고 그냥 가려 했다니. 다른 무가 같으면 무시했다고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남궁령은 이제 강소군을 자기 오라비 반열에 놓고 아주 편하게 대했다.

강소군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럴 이유가 있었소.”

“그 말투! 자꾸 거리를 두면 정말 섭섭해요.”

“맞아. 령아의 오라버니가 됐으니 제게는 형님이 되고 큰 형님에게는 아우가 되잖습니까? 말씀 편하게 하시죠?”

“오라비도 지금 그렇게 하잖아!”

남궁령이 남궁우를 흘겨보았다.

“아하하! 그런가? 형님, 말씀 편하게 하쇼! 이럴까?”

강소군에게 이런 분위기는 낯설었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좋지. 그렇게 하자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였다.

강소군은 문득 남궁 삼남매의 증조부가 관직을 마다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궁세가의 증조부도 태조를 도운 공신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관직은 물론 하사품까지 사양하고 강남에 은거하였다.

그 덕에 조정에 분 숙청의 피바람을 피했다. 그리고 이렇듯 무가로서 자리를 잡고 일가의 화목까지 도모하였으니 황제가 부러울 까닭이 없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서서 무림맹을 결성하려는 걸까?’

당대의 가주가 결정한 일이다.

강소군은 그 결정에 천황성이 연루되어 있지 않을까 하여 남궁세가를 찾아왔다.

하지만 남궁우의 설명과 태도에서 숨기는 게 없다고 판단하여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냥 가려던 이유가 뭔데요?”

남궁령이 재차 물었다.

강소군은 천황성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남경 강부에서 춘절만 보내고 떠나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린 진연이 죽을 뻔한 것도 자신을 노린 방일옥 때문이다.

강소군은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자신 때문에 옆에 있는 자들을 위험에 처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무당에서 일을 잊었소? 그들은 나를 노리고 온 것이오.”

편하게 말하자고 했지만 입에 붙은 말투는 어쩔 수 없었다.

“아, 그 잔인무도한 사냥꾼들!”

남궁령은 그날 일을 생각하자 다시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남궁세가는 무가였으나 오랫동안 싸움을 겪지 않았다.

세가의 무인들이 표행을 턴 산적 무리를 잡는 정도가 가끔 있을 뿐이다.

“대체 그들이 누구죠?”

“그들의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왔는지는 알고 있소.”

“어딘데요?”

“천황성.”

강소군의 말에 남궁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남궁우와 남궁악의 안색이 굳었다. 뭔가 아는 눈치다.

“그런 문파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네요. 사파가 분명하겠군요. 명칭부터 수상해요. 천황성이라니. 대체 어디에 있는 놈들이죠?”

“나도 모르오.”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끔찍한 놈들이었어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오늘은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해요. 자, 건배!”

남궁령이 참혹했던 기억을 떨치려는 듯 술잔을 들며 건배를 외쳤다.

술자리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이윽고 자리가 파하자 남궁우가 붙잡았다.

“본가에서 손님을 박대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습니다.”

강소군은 결국 남궁세가에서 며칠 머물기로 했다.

다음 날.

남궁우가 아침 일찍 찾아왔다.

“아버님께서 뵙고 싶어 합니다.”

머물기로 작정하면서 강소군이 예상했던 바다.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천은 후원 별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육십이 가까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눈빛은 형형하고 기도는 산악처럼 흘렀다.

“반갑군. 강 국공의 후인을 만나다니. 자네 아버지와는 면식이 있네.”

강소군이 예를 취했다.

“남궁세가의 가주를 뵙습니다.”

거센 기파가 강소군을 뒤흔들고 지나갔다.

강소군은 태연하게 기파를 흘려냈다.

“젊은이가 대단하군.”

남궁천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놀랍군요.”

강소군도 짤막하게 한마디 하였다.

남궁천의 기도는 아들 남궁악을 능가하였다.

십대고수에는 남궁악이 아니라 남궁천이 들어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순간 남궁천의 막대한 기도가 사라졌다. 이제 눈앞의 남궁천은 초절정에 이른 고수 정도로 보였다.

강소군은 감탄했다. 강소군은 절대지경에 이른 후 허허로워 무공을 익힌 자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듯 자신의 무위를 조절하여 보여 주는 수는 생각지 못했다.

남궁천의 이런 수는 배울 만했다.

“소가주를 만났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자네라면 눈치챘겠군. 뭐가 문제인지.”

남궁우는 아버지와 강소군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옆에서 다소곳하게 듣고만 있을 뿐이다.

“소가주가 절대지경에 든 지가 몇 년이 넘었네. 그런데 여전히 초입에 머물고 있지.”

강소군은 남궁악을 처음 보았을 때 잘 벼린 검을 떠올렸다.

상관무영은 검을 감출 수 있었으나 남궁악은 검 그 자체의 경지에 있다. 이는 검을 아직 버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에 비하면 남궁천이 오히려 상관무영의 경지에 가까웠다.

“언젠가는 검을 지울 수 있겠지. 하지만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네. 많은 고수들이 결국 절대지경의 초입에서 꺾이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얼마 전 들은 말이 있습니다.”

강소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절대라는 것도 구분하기 어렵고, 그렇기에 수많은 단계가 있다는 말이었지요.”

현치자에게 들은 말이다.

남궁천이 잠시 눈살을 찌푸렸으나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무인이 쌓아 올린 공부를 모두 허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자네 역시 스스로 걸어온 길을 알고 있지 않는가?”

강소군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과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은 그야말로 기연이다. 사실대로 말한다 해서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남궁천은 강소군과 같은 나이에 절대의 경지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의 무공 연원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남궁천은 화제를 돌렸다.

“실은 자네가 천황성을 언급하였다기에 보자고 하였네.”

남궁천이 배첩을 하나 꺼냈다.

생사첩.

붉은 배첩에 역시 피로 쓴 듯한 글귀가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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