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30화 (130/250)

130

새벽부터 내리던 눈은 아침 햇살이 비치자 그쳤다.

강소군이 마당을 쓸다가 문득 옥허동천으로 올라오는 길을 내려다보았다.

무당 장문인이 한껏 무거운 짐을 지고 내려간 길.

그 길로 한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장대한 체구를 지닌 장한이었는데 걸음 걸음은 허허로웠다.

등에 커다란 보따리를 지고 있었으나 이 세상 그 무엇도 그를 잡을 수 없을 것같이 가벼운 걸음이었다.

얼어붙은 좁은 계단 길은 굉장히 위험했다. 겨울에는 무당 제자들도 오가지 않는다.

장한은 전혀 위험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 길을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또 왔군. 올해는 그냥 넘어가나 했더니.”

현치자가 투덜거리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장한이 옥허동천 마당으로 들어섰다.

장대한 체구로 인해 젊은 사람이라 생각했건만 가까이 보니 오십은 넘어 보이는 장년인이었다.

평범하면서도 어딘가 깊이가 담긴 얼굴이었는데 유난히 빛나는 눈빛이 인상적이다.

장한은 마당에 쌓인 눈을 빗질하던 강소군을 유심히 보았다.

강소군 역시 빗질을 멈추고 장한을 보았다.

마치 옥판봉을 보는 듯했다. 거대한 절벽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사의 제자인가?”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식객입니다.”

“그러시군.”

장한이 보따리를 지고 도관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묻지도 않고 들어오는 거냐?”

현치자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언제는 들어오라 한 적 있습니까?”

“대체 언제까지 나를 못살게 굴 건데.”

“등선이 멀지 않으셨으니 그럴 날도 별로 남지 않은 것 같군요.”

“이놈이?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잖아.”

“등선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게 그거지. 그건 뭐냐?”

“아시면서 뭘 묻습니까? 매년 가져오는 차죠.”

장한이 이고 온 보따리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오호? 괜찮군.”

“괜찮기는요. 이건 극상품입니다.”

“일단 마셔 보고 말해 보지.”

옥신각신하면서도 다구를 만지는 소리가 딸그락, 들려 왔다.

빗질을 마친 강소군이 자신의 자리가 된 절벽 끝 바위로 갔다.

늘 그렇듯 앉아서 맞은편 절벽과 세상을 보고 앉았다.

이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머릿속은 백지와도 같았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무심히 절벽을 보는데 도관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올해는 공정하게 평가해 줄 사람이 있으니까 군말 없겠지?”

현치자가 강소군을 불렀다.

장한이 강소군을 보고 먼저 이름을 밝혔다.

“상관무영이라 하네. 잘 부탁하네.”

“강소군이라 합니다.”

강소군이 담담하게 받았다.

그런 강소군을 현치자가 의아한 눈길로 보더니 클클, 웃으며 상관무영에게 말했다.

“이제 네 명성도 다 된 모양이구나.”

비천신검 상관무영.

십대고수란 말이 세상에 나돌 때부터 이제까지 늘 서열 일 위로 꼽혔던 인물이다.

간혹 다른 사람들은 순위가 바뀌고 사람 자체가 바뀌기도 했지만 상관무영은 늘 그 자리였다.

그런 고수를 눈앞에 두고도 강소군은 강호의 필부 대하듯 담담하였다.

“원래 별거 아니었습니다.”

상관무영이 강소군을 유심히 보면서 현치자의 말을 받아쳤다.

사실 그도 궁금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신을 경원시하였다.

기도를 내보이지도 않았건만 그 앞에서 숨조차 쉬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가 사람을 피해 살았다. 그가 무공을 익히는 건 결코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고자 함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그저 무의 궁극을 보고자 하는 한 사람의 무인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사람은 홀로 사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반응을 보인 강소군을 보니 내심 흥미가 일었다.

“언제 이런 제자를 두었나 궁금했지요.”

“제자라니. 밥이나 축내는 손님일 뿐이야. 너보다 더 귀찮은 놈이지. 너는 일 년에 한 번 오지만 저 녀석은 아예 눌러붙어 있다고.”

“하하. 그럼 저도 붙어 있을까요?”

현치자가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끔찍한 소리는 그만둬.”

두 사람은 옥허동천 작은 마당에 마주 섰다.

언제 빼 들었는지 상관무영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비천신검.

그제야 강소군은 그의 별호가 떠올렸다.

현치자는 맨손이었다. 그러나 상관무영은 신중하게 검을 세워 현치자를 향해 겨눴다.

“검이 좀 무디어졌군.”

현치자가 중얼거렸다.

상관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수록 무뎌지고 있습니다.”

강소군은 두 사람이 말하는 의미를 알았다.

상관무영은 그가 짐작하기 어려운 고수다.

그런 고수도 자기만의 벽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벽을 깨뜨리지 못하니 오히려 퇴보를 하고 있었다.

“그럼 해볼까?”

현치자의 양손이 움직였다. 내력이 실리지 않은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단순하면서도 유려한 선을 그리던 현치자의 손이 어느새 상관무영의 검 앞으로 다가갔다.

옆에서 보면 손바닥으로 검을 치려는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상관무영은 마치 독사라도 본 듯 바로 검을 빼고는 빙그르르 꺾어 현치자를 찔러 갔다.

검은 우직하고 빨랐다. 당연히 현치자는 검에 꿰뚫렸어야 했다.

-팅!

어느새 현치자의 손바닥이 검을 쳤다.

튕겨진 검의 형세 그대로 상관무영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비스듬히 꺾인 검으로 목을 베려 했다.

현치자가 상관무영의 품으로 들어가는 듯하더니 옆으로 흘러 빠져나갔다.

초식과 초식의 대결이었다.

흔히 초절정을 넘어 절대지경에 이르면 초식을 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상관무영과 현치자는 내력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초식으로만 겨루는 중이다.

강소군은 두 사람의 비무를 유심히 보았다.

두 사람은 마치 어울려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현치자의 양손은 느린 듯하지만 상관무영의 검을 적절하게 옭아맸다.

상관무영의 검은 단순하고 빠른 듯 보였지만 시시각각으로 기세와 검로가 바뀌었다.

두 사람은 무려 두 시진이나 겨루며 온갖 초식을 나눴다.

“그만!”

현치자가 자신을 향해 찔러 오는 검끝을 붙잡았다.

“아직 좀 남았는데요?”

상관무영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더 펼쳐 봐야 거기서 거기지.”

“그렇긴 하죠.”

상관무영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치자가 강소군을 보고 말했다.

“누가 이긴 것 같으냐?”

강소군은 방금 비무가 누가 이기고 지는 걸 가르기 위한 게 아니라고 여겼다.

누가 보더라도 사부와 제자가 초식을 익히기 위해 비무를 한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눈빛을 반짝이며 자신을 보는 상관무영을 보니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모르겠습니다.”

강소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찌르면 막고, 막으면 베고, 베면 쳐내고. 두 사람은 손발을 맞춘 약속대련이라도 하는 듯했으니 승패를 가름한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했다.

어찌 보면 무성의한 대답일 수도 있었으나 현치자가 만족스러워하였다.

“역시 이번에도 무승부로군.”

“내년에는 비장의 수를 가져올 것입니다.”

“작년에도 그랬잖나? 이제 그 비장의 수는 아껴 뒀다가 나중에 적에게나 써먹게.”

“하하하. 그럴 적이 있다면 노사를 찾아오겠습니까?”

상관무영이 크게 웃었다.

광오한 말이었으나 그는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자였다.

그러나 현치자는 바로 무시했다.

“흥!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이제 적도 없다면서 왜 그리 무공에 열을 내는 것이냐?”

“노사야말로 진정한 적수니까요.”

“힘없는 늙은이와 겨우 비겨 놓고 그게 할 소리냐?”

현치자가 강소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자신 있다면 저놈하고 붙어봐라.”

상관무영이 강소군을 보았다.

“좋기는 한데 지금은 허깨비 같군요. 다음에 하지요.”

상관무영은 이미 강소군의 경지와 상태를 알고 있었다.

옥허동천에 올라오자마자 그가 지나온 길 어디쯤에 서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랬기에 현치자의 제자냐고 물은 것이다.

현치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앞서간 선배로 한마디쯤은 해 줄 수 있지 않느냐?”

“노사께서도 못하는 걸 제가 어찌 합니까?”

강소군은 두 사람의 말을 가만 듣고 있다가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상관무영의 검을 받아들었다.

“…?”

너무나 자연스럽게 검을 가져가니 상관무영도 순순히 내주었다.

무인이 검을 내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관무영은 사실 검이 필요 없는 경지다.

현치자와 논검을 하려고 가져온 것뿐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순순히 검을 내준 것에 대해 스스로도 놀랐다.

강소군이 몇 발짝 걸어가더니 상관무영을 향해 겨눴다.

현치자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일었다.

상관무영이 어이 없어 하다가 쓴웃음을 짓고 강소군과 마주 섰다.

강소군의 시선이 상관무영의 시선과 얽혔다.

순간 상관무영의 전신에서 기세가 터져 나왔다.

-쿠웅!

마치 옥판봉 전체가 울리는 듯한 소리가 퍼져 나갔다. 실제로 일어난 소리가 아니라 강소군이 그렇게 느낀 것이다.

폭풍과도 같은 기운이 강소군을 향해 밀려들었다.

강소군의 체내에서 자연스레 금룡기가 일었다. 강건한 기운이 퍼져 나가며 상관무영의 폭풍과도 같은 기도를 맞이하였다.

-두웅!

두 사람의 기운이 부딪쳤으나 폭음도, 기파가 터지는 충격도 일지 않았다.

다만 거대한 기운이 서로 닿은 듯 잠시 허공이 일렁거렸을 뿐이다.

강소군은 상관무영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한 자루 검이 떠 있는 걸 보았다.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강소군이 손에 든 검을 놓았다.

놀랍게도 검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떠 있었다.

그렇게 대치하기를 반 시진.

어느 순간 강소군 앞에 떠 있던 검이 서서히 기울더니 땅에 꽂혔다.

-푹!

검이 바닥에 꽂히는 순간 강소군은 상관무영의 기운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

상관무영도 강소군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선정에 든 것이다.

“으음. 춥군.”

지켜보던 현치자가 몸을 추스르더니 도관 안으로 들어갔다.

상관무영이 먼저 깨어났다.

그의 눈빛에는 놀람과 기쁨, 의아함 등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갔다.

상관무영이 도관을 보았다.

현치자는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강소군과 겨뤄 보라고 한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지난 몇 년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하였다.

매년 옥허동천을 찾아와 현치자와 초식을 겨루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미 초식을 버린 그였으나 현치자와 겨루기 위해 일 년 동안 초식을 연구하고 익혔다.

그 나름대로 벽을 넘기 위한 방법이었으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줄 몰랐다. 그랬기에 지금의 그가 있는 것이다.

오늘도 그는 현치자와 온갖 초식을 교환하였다. 벽은 깨지 못했지만 무공의 무한함을 느꼈다. 다시금 열정이 솟구쳤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하고 내려가려는데 현치자가 강소군을 자극한 것이다.

“이제 그만 와라.”

도관에서 현치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치자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강소군과의 대치에서 벽을 깰 단초를 얻은 것이다.

상관무영은 잠시 강소군을 보았다.

그 역시 선정에 든 것이다.

처음에는 심마에 든 초절정고수라고 여겼는데 다시 보니 그 단계는 넘어선 것 같다.

강소군이 워낙 공허한 세계에 머물러 있었기에 상관무영 같은 절대고수조차 그 기도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상관무영은 속으로 한탄하였다.

‘어렵겠군.’

누구나 똑같은 과정을 거쳐 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나온 사람은 그냥 알 수 있다.

그가 지나온 길이기에 안다.

상관무영이 보기에 강소군의 심마는 단순한 심마가 아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경지란 게 그렇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하는 경지.

상관무영은 가만히 서 있는 강소군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옥허동천을 내려갔다.

저녁 무렵이 되자 다시 눈이 내렸다.

강소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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