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29화 (12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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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길은 더욱 힘들 겁니다.”

연화심의 목소리는 차분하였다.

초지항은 연화심이 달라졌음을 확연히 느꼈다.

불과 일 년 만에 삼도문의 아가씨에서 한 사람의 무인이 된 것이 느껴진다.

“그러니 자원하시는 분만 받겠습니다. 그만두시는 분께는 지금 그동안 수고하신 보상을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연화심의 말에 초지항이 화를 냈다.

“아가씨,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화천대입니다.”

다른 대원들도 서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와서 떠나라니 그게 하실 말씀입니까?”

적잖은 동료를 잃고 악만 남은 화천대원들이다. 연화심의 말에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그런 화천대를 보는 연화심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그들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것 같았다.

“가야 할 길이 멀기에 한 번 더 확인한 것뿐입니다. 천무방이 갑자기 세를 거두었으나 여전히 그 힘은 강호 대파 이상입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니 제 입장을 헤아려 주세요.”

“아가씨, 모르시는 게 있군요.”

초지항이 끼어들었다.

“아가씨를 호위하는 임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삼도문에서 죽었을 겁니다.”

연성결과 함께 남아 천무방과 싸웠을 거란 이야기다.

연화심이 자리에서 일어나 초지항과 화천대에게 예를 취했다.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목숨 덕분에 제가 살아 있음을. 그럼에도 또다시 목숨을 요구해야 하는 제가 염치가 없군요.”

초지항이 마주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제 말을 곡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한 번 죽었는데 앞에 도산검림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할 화천대가 아닙니다.”

나머지 대원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심이 화천대를 보고는 말했다.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어 연화심이 초지항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삼도문의 아가씨가 아닙니다. 삼도문의 문주입니다.”

결기에 찬 목소리에 초지항이 움찔, 하였다.

“아, 본대주가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초지항이 벌떡 일어나더니 포권을 하였다.

“화천대주 초지항! 문주님을 뵙습니다!”

다른 화천대원들도 일제히 일어나 예를 취했다.

연화심이 초지항과 화천대원을 보며 말했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제가 삼도문주의 자리를 맡겠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초지항과 화천대원들이 그런 걸 왜 굳이 말하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언제까지가 될 지라는 연화심의 말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연화심은 지금 그것까지 일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연화심은 말을 이어 갔다.

“무한으로 가기는 가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연화심이 놀라는 초지항과 일곱 대원을 보며 말했다.

연화심이 품에서 책자를 꺼냈다.

“이건?”

“회천십이도입니다.”

회천십이도.

연씨가문의 비전절기.

연화심은 회천십이도를 익히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오는 길에 이를 필사한 것이다.

십이식의 회천십이도는 강호 일대절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익히는 게 무척 까다롭다.

회천십이도의 본체는 최초 삼식(三式)이다.

그 삼식이 경지에 오르면 그걸 바탕으로 변식이 더해진다. 새로운 삼식이 아니라 원래의 삼식에 변식이 더해져 완전히 새로운 도법으로 거듭난다.

다음 삼식도 마찬가지. 그렇게 해서 네 번의 탈바꿈된 도식이 회천십이도다.

초지항은 연성결의 대제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아낌없이 가르쳤으나 아직 구식에 머무르고 있다.

“아버지도 회천십이도의 네 번째 변식을 대성하지 못하셨어요. 만약 대성하였다면 구연강에게 몰릴 이유가 없었지요.”

연화심이 초지항에게 말했다.

“회천십이도를 익힌 다음에야 무한으로 갈 겁니다. 적어도 모두 구식까지는 완벽하게 익혀야 하고 초 대주께서는 십이식까지 익히셔야 합니다.”

초지항이 책자를 받아들었다.

삼도문은 무문(武門)이기는 했으나 무에 치중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여러 가지 사업을 했다.

그 사업을 통해 주위 양민들과 함께 부를 나눴다.

연성결은 무가 아니라 부(富)가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자연 무공 수련은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흑회나 상단을 위협하는 산적들은 감히 삼도문을 범접하지 못했다.

천하사패 천무방이 아니었다면 삼도문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시한은 내년 봄까지. 반년입니다.”

“반년 만에요?”

지금 남은 초지항과 일곱 대원은 생사격전을 뚫고 살아남은 만큼 뛰어난 인재들이다.

하지만 반년 만에 회천십이도를 대성한다는 건 무리다.

“제가 준비를 한 게 있습니다. 수련에만 전념하시면 됩니다.”

연화심은 오는 길에 나름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연화심은 연성결로부터 적잖은 돈을 물려받았다. 후사가 없었던 척무량과 황의채도 연화심에게 자신의 몫을 넘겼다.

연화심은 동약사에게 적잖은 돈을 치르고 근골과 내공을 보하는 약방문을 받았다.

연화심은 얼마가 들더라도 약재를 구해 초지항과 화천대를 절정으로 끌어올릴 생각이다.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으면서도 삼도문 사람으로 남고자 하는 화천대원들이다.

그들에게 이만한 보상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초지항이 일곱 대원에게 말했다.

“길이 열렸다. 가지 않으면 화천대가 아니지!”

일곱 대원이 일제히 화답했다.

“형제들이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서른 명의 화천대.

다른 무력대보다 인원이 적었기에 그만큼 끈끈한 정을 나눴던 그들이다.

화천대원들의 눈은 죽어 간 동료들의 한을 풀 수 있다는 희망으로 빛났다.

***

“나까지 무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건 없을 것 같네. 자네는 나의 경지를 넘어서지 않았나?”

노이칠이 말했다.

중랑은 관중을 비롯한 대정무각의 각주들과 돌아가며 논검(論劍)을 하는 중이다.

중랑은 대연의결과 천성육십사식으로 초절정의 경지에 들었다. 굳이 다른 무공을 익힐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각주들과 논검을 하는 것은 달랐다. 그건 강호에서 누구도 얻지 못한 기연이다.

무인이 자신의 심득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전하는 경우는 없다. 심지어 제자에게도 완벽하게 전하기 어렵다.

제자의 경지가 못 따르는데 상승 무리(無理)를 전해 봐야 오히려 망칠 뿐이다.

각주들과의 논검을 통해 중랑은 비로소 진정한 무의 세계에 든 느낌이었다.

중랑은 무의 세계가 넓고 깊으며 수많은 무리(無理)가 각기 본연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 그는 절대지경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무공의 경지가 무를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중랑이 말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조직이네.”

“조직이요?”

“무문(武門)은 무엇으로 유지되는지 아는가?”

중랑은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였다.

“흔히 자금을 떠올리지. 맞네. 자금도 중요하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네.”

중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소리다.

“사람은 위를 본다네. 자기보다 강한 자를 좇지. 대정무각이 단기간에 천하사패에 올랐던 것은 천하 십대고수 백 대형이 있었기 때문일세.”

노이칠은 중랑을 대정무각의 정점에 올려놓고자 하였다.

이인자였던 대약무검이 대정무각의 일각주가 되는 것과 후대에서 새로운 일각주가 나오는 것은 차이가 크다.

“관 대형의 무공은 사실 백 대형과 그리 차이가 나이 않았지. 하지만 오랫동안 이인자로 머물렀네. 조직에 몸담고 있는 자들의 머릿속에 새겨진 인상은 무시할 수 없네.”

이인자가 일인자를 꺾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일인자가 사라지고 물려받는 것은 무인들에게 주는 인상이 다르다.

조직의 마음에는 사라진 일인자에 대한 동경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문파에서 이인자가 아니라 다음 대의 최고수를 장문으로 삼는다.

차라리 새로운 대의 최고수를 정점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무문은 정점에 누가 있는가 하는 것으로 성쇠가 좌우된다네. 그건 과거 천하사패를 보면 알 수 있지.”

중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방의 구연강, 요천루주 풍가채, 도룡회 우문극, 대정무각 백정무.

모두 십대고수의 일원이었다. 그런 고수가 있었기에 사람들이 모였고 조직에 충성을 다했다.

무인은 결국 힘을 숭상하는 자들이니까.

만일 연성결이 십대고수에 들었다면 삼도문 또한 천하에서 주목하는 문파로 거듭났을 것이다.

풍가채와 백정무가 죽고 구연강과 우문극이 은거를 하며 천하사패는 빠르게 쇠락하고 있다.

“무림이란 그런 곳이지. 강자존의 세계란 말일세.”

노이칠이 중랑을 주시하며 말했다.

“대정무각의 정점이 되어 주게. 우리에게는 구심점이 필요하네.”

대정무각은 수면 아래로 흩어졌다.

칠각주 유문광은 그가 아끼는 거처 청련지까지 버렸다.

각주들은 뒤처리를 위해 당분간 모여 있지만 중랑과의 논검이 끝나면 역시 잠적할 것이다.

무인들은 강호로 스며들어 갔다. 그들과 노이칠이 천황성의 실체를 파악하기 전까지 대정무각은 잠들 것이다.

흩어진 조직은 유지하기 쉽지 않다. 무인들도 사람이니까. 그러기에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다.

노이칠은 중랑을 점찍었다.

***

강소군의 일과는 아주 간단했다.

아침에 물을 길어와 밥을 지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옥허동천 앞 절벽 끝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옥허동천이 있는 옥판봉은 반원형의 절벽 한쪽에 있다. 그렇기에 앞은 절벽이고 좌측이 툭 터진 공간이다.

그 공간으로 무당산 아래와 너머 세상이 보였다.

강소군은 그 앞에 앉아서 절벽과 세상을 마주하였다.

저녁이면 검을 들고 수련을 하였다. 새로이 검을 익히는 게 아니었다.

천성육십사식을 꾸준히 되풀이하였는데 몸의 근육을 단련하고 감각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단풍이 지고 낙엽이 들고 서북풍이 불더니 눈이 내렸다.

옥판봉의 절경도 바뀌었건만 강소군의 일과는 변함없었다.

현치자 또한 여전히 무수한 무공을 창안하고 지웠다.

겨울이 깊은 어느 날. 옥판봉 빙벽 길을 청무진인이 올라왔다.

청무진인은 현치자와 도관으로 들어가 한참 있다가 나왔다.

강소군은 여전히 절벽 끝에 앉아 맞은편 옥판봉을 보고 있었다.

눈벼락을 맞은 옥판봉은 곳곳이 희끗희끗하였다.

청무진인이 그런 강소군의 뒤에 섰다.

한참 동안 강소군과 함께 맞은편 옥판봉을 보던 청무진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려서 무당에 들어와 오십 성상이 지났는데 옥판봉이 이리 생겼다는 걸 오늘에야 알게 되다니….”

“….”

청무진인이 알 수 없는 탄식을 하였다.

절벽 앞에서 길을 찾는 강소군의 심정이 절박하게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일러줄 수가 없었다. 절벽도 길도 모두 강소군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무당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길을 가기로 했네. 많이 망설였지. 하지만 내가 먼저 가면 그게 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네. 무당이 가면 무당의 길이 되겠지.”

“….”

“그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네. 다만 그 길을 가며 정도를 잃지 않고자 노력할 뿐이네.”

청무진인은 중얼거리듯 자신의 심사를 흘리고 돌아서 내려갔다.

강소군은 옥판봉 절벽을 가로질러 난 좁은 길을 내려가는 청무진인을 지켜보았다.

절벽길은 한 사람 간신히 내디딜 길이다. 멀리서는 길이 보이지 않아 마치 허공을 밟고 내려가는 것만 같아 보였다.

선풍도골의 도사가 눈과 얼음이 박힌 절벽을 내려가는 광경은 한 폭의 신선도와 같아 보였다.

청무진인은 표표히 빙벽길을 내려갔다. 누가 봐도 신선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강소군에게는 무당이라는 사문의 짐을 이고 가는 늙은 도사의 발걸음이 힘겨워 보였다.

“그런 게야. 아무리 신선놀음을 한다 해도 결국은 인간이지.”

뒤에서 현치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소군은 오래도록 청무진인이 내려가는 모습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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