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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정원이었다.
주고수는 연못 옆 정자로 올라갔다.
정자에는 청수한 노인이 기보를 보고 바둑을 두고 있었다.
노인은 주고수가 왔음에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주고수가 친왕의 신분임을 감안하면 흔치 않은 일이다.
오히려 주고수가 노인에게 예를 취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왕야께서 이리 급하게 오다니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노인이 하얀 바둑알을 들어서 한 고에 놓았다.
-딱!
바둑알이 놓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본성에서 보내 준 고수들이 죽었습니다.”
노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쌍렵(雙獵)이 대단한 자들은 아니지만 그리 쉽게 죽을 자들도 아닌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요?”
“강소군을 잡기 위해 무당에 난입했다가 오히려 죽고 말았답니다.”
“흐흠. 그래서….”
노인이 바둑판에서 눈을 떼어 주고수를 보았다.
“그들이 죽었다는 걸 전하러 오신 거로군요. 그거참, 간단합니다?”
노인의 말속에 뼈가 들어 있었다.
“그들이 독자적인 행동을 하였는데 말릴 수가 없었답니다.”
주고수는 조개량에게 들은 대로 말했다.
“마치 남의 말 하듯이 하는군요. 애초에 고수를 청한 건 왕야입니다. 그렇다면 적절하게 써먹었어야지 이 바둑판 사석 버리듯 버리고 와서 알리기만 하면 답니까?”
주고수의 얼굴에도 살짝 노기가 스쳤다.
“공손 노야,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들은 오만하여 도무지 명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자를 보낸 건….”
“이보세요. 왕야!”
공손 노야가 주고수의 말을 끊었다.
“그들이 고수라 하나 우매한 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런 이들조차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그 책임을 노부에게 묻다니 정말 놀랍군요.”
주고수의 안색이 굳었다.
“이래서야 왕야를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공손 노야는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근래 들어 계속 실망스러운 일이 이어지는군요. 너무 안이하게 대국을 바라보는 것 아닙니까?”
주고수는 내심 울컥, 하였으나 반발하지 못했다.
공손 노야는 천황성의 두뇌와도 같은 사람이다.
“이번 일은 면목 없게 됐소. 책사가 상대의 무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실책이었소.”
“쯧!”
공손 노야가 혀를 찼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인 것이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해서야 어찌 군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모욕적인 말이었으나 한 번 기세가 꺾인 주고수는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천황성은 무림의 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픕니다. 집안일은 알아서 처리하면 좋았을 텐데… 본성의 고수가 죽었으니 일이 커졌군요.”
“….”
“강소군이라고 했습니까? 이제 그자는 본성에서 알아서 처리하지요.”
“그래 주면 감사하지요. 그런데 골치 아픈 무림의 일이란 게 뭡니까?”
“어차피 왕야도 알아두어야 할 일이니 말씀드리죠. 몇몇 불순한 자들이 무림맹이라는 걸 만들 모양입니다. 그래서 본성도 아예 양지로 나가는 것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양지로 나간다 하심은?”
“차차 보면 아실 겁니다.”
공손 노야는 다시 기보로 시선을 주었다. 말 끝났으니 가라는 뜻이다.
주고수는 모욕감에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내심 억눌렀다.
‘참자! 내가 보위에 오르는 날 너부터 죽여 버릴 것이다!’
주고수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쌍렵이 당했으니 본왕도 뭔가 천황성에 체면치레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저를 따르는 이 가운데 철권호라는 고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을 천주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만.”
“호오. 철권호를 진상하시겠다?”
공손 노야가 관심을 보였다.
“그의 말이 자신의 경지가 절대지경 문턱에 있다고 합니다. 천주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벽을 돌파하고 천황성의 힘이 될 자입니다.”
“왕야의 힘이 될 자이겠지요.”
공손 노야가 정정하듯 말했다.
“어찌 됐든 그런 고수가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좋은 일이지요. 보내세요.”
주고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공손 노야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왕야의 밑에 있는 책사 말입니다. 이름이 뭐라고 하셨지요?”
“조개량 말입니까?”
“그자가 좀 맹랑하더군요. 죽여 버리세요.”
“예?”
“자기 야망이 있는 자입니다. 그런 자를 책사로 쓴다는 건 독사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죽이라니요?”
“제대로 다룰 수 없는 검은 오히려 스스로를 해치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주고수는 이미 심기가 비틀려 있었기에 삐딱하게 받았다.
“그 말씀은 제가 조개량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맞습니다.”
공손 노야는 기보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생각해 보지요.”
주고수는 내뱉듯 말하고는 몸을 돌려 정자를 내려갔다.
-딱!
바둑알이 놓이는 소리가 주고수를 배웅하였다.
***
“어서 쾌차하셔야지요.”
구양조가 아버지 구연강의 머리맡에 앉아 말했다.
구연강은 눈꺼풀만 떨 뿐 말을 하지 못했다.
“조개량, 그 간악한 놈을 반드시 잡아 올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구양조가 아버지 구연강을 문안하고 나왔다.
거실에서 구양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양조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도무지 차도가 없구나. 아무래도 조개량을 잡아와야겠다. 그놈이 쓴 독이니 해약도 가지고 있겠지.”
“그러시든가. 근데 그놈이 어디 있는지 알고?”
구양수가 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십이지대가 무당산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내가 직접 가야겠다.”
“그건 곤란하지.”
구양수가 손을 저었다.
“형은 이제 천무방주야. 지금 한창 방을 정비 중인데 형이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
“그럼 어쩌란 말이냐?”
“내가 가지 뭐.”
구양조가 임시 방주를 맡은 뒤 천무방은 일체의 대외활동을 접고 체제를 정비하고 있다.
구양수가 조개량 대신 책사 역할을 하고 있다.
구양수가 옥갑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드셔.”
“이게 뭐냐?”
“공령단이라고 내공을 삼십 년쯤 증진시켜 줄 거야.”
“그럼 이걸 아버님께 드리자.”
“에헤이. 아버지가 그거 드셨다간 바로 돌아가실 거야. 내공이 폭주하는데 운기 못하면 끝장이잖아. 알만한 분이 왜 이러셔.”
“으음. 그럼 보관해 두기로 하지.”
“내 말대로 하라니까. 형이 먹어야 한다고.”
구양수가 옥갑을 건네며 말했다.
“지금 세가와 대파들이 연합하여 무림맹을 만든다는 거 알아?”
“나도 들었다. 정파가 연합하면 좋은 일이지.”
“어이구. 정인군자 나셨네. 답답한 형님아.”
“이놈이?”
구양조가 눈살을 찌푸리고 구양수를 야단치려 하였다.
“그놈들이 정말 말처럼 무림의 안녕을 위해 맹을 만든다고 생각해?”
“….”
“천하사패가 흔들리니 이 기회에 패권을 잡아 보려고 그러는 거야. 무림맹을 만들면 제일 먼저 우리부터 칠걸?”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느냐? 나는 무림맹을 만든다면 우리도 참가하는 게 마땅하다고 본다.”
“어휴. 말이 안 통하네. 아무튼 무슨 의도인지 모르니 형이 강해져야 돼. 그러니 이거 먹고 수련이나 열심히 하고 있으라고. 다른 일은 내게 맡기고.”
***
강소군이 옥허동천에 머문 지도 한 달이 넘었다.
남궁 남매가 무당산을 떠나기 전 들렀고 청무진인이 한 번 다녀갔다.
청무진인은 강소군이 현치자의 도동 노릇을 하는 걸 이상히 여겼으나 별말 하지 않았다.
강소군은 아침에 일어나 물을 길어와 밥을 지었다. 현치자가 목숨을 구한 무공 값이라며 시킨 일이다.
아침식사를 한 뒤 차를 내어 현치자와 함께 마시고 이후 맞은편 절벽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온종일 지냈다.
현치자는 하루 한 끼만 먹었는데 자연 강소군도 그렇게 되었다.
현치자는 늘 마당을 서성이며 뭔가를 궁리하고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손짓 발짓을 하였다.
“이리 와 봐라.”
가끔 현치자가 강소군을 불러 자세를 취하게 하였다.
“그렇지, 이렇게 하면 되겠군.”
현치자가 강소군의 자세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무슨 무공입니까?”
“뭐라고 할까? 양화의 기운과 음수의 기운을 섞었으니 음양벽력수(陰陽霹靂手)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놀라운 건 다음 날이면 전날 창안한 무공은 까맣게 잊고 다른 무공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옥허동천에서 매일같이 고절한 무학이 탄생하였다가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청무진인이 알았다면 제자들을 보내 기록을 시켰을 것이다.
강소군은 현치자의 무공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무공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 기이할 따름이었다.
백 살이 다 된 노인은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기 여념 없는데 아직 젊은 그는 관조하듯 바라보고만 있으니 서로 역할이 바뀐 듯했다.
어느 날 강소군이 현치자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무공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집착이라니? 이건 내 유일한 즐거움이란 말이다. 너야말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냐? 사람이라면 뭔가를 해야지.”
강소군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라면 뭔가를 해야지.’
아주 평범한 말인데도 여운이 남았다.
“뭘 할 수 있을까요?”
아주 어리석은 질문이었으나 현치자는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되물었다.
“그동안 뭐 하고 살았는데?”
강소군은 그 말을 듣고 늘 앉던 자리로 갔다.
‘뭘 하고 살았지?’
갑갑했던 태후전에서의 나날들이 먼저 기억났다.
수시로 찾아오던 손님들도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 대부분이 죽었다.
어린 기억에 아버지가 백성을 위한 국사에 몰두하는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천황성이라는 곳을 상대하기 위해 그렇게 분주했던 게 아닐까 싶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걸어오던 장영영도 생각났다.
그녀를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집안에서 정해 준 정혼자였으니까.
그것 또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다고 믿었던 것 같다.
장영영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에 공허함이 느껴진다.
염기창이 죽고 난 뒤 장영영은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정식으로 불제자가 된 것이다.
‘선백….’
장선백과 마음이 통해 지기가 된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문득 가까운 또래가 그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자 그 또한 자신의 착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외할아버지 황제의 총애, 그러나 반항하듯 들어간 동북군, 무총….
강소군의 머릿속에서 지난날이 천천히 흘러갔다.
그때는 그랬다고, 당연히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들었다.
끝내 강소군은 자신이 뭘 하고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의문만 들었다.
‘살기는 살았던 건가?’
그런 생각과 동시에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떠올랐다.
부모님과 진운초의 죽음과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천황성을 찾는 중이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당연히?
무엇을 위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걸까?
강소군의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강소군은 그렇게 마음공부에 들어섰다.
“에휴, 말년에 편해질 줄 알았더니 뒤치다꺼리해야 할 놈일 줄 누가 알았겠나.”
현치자는 온종일 꼼짝 않는 강소군을 보고는 투덜거리더니 물지게를 지고 절벽을 내려갔다.
물을 길러 간 것이다.
***
“아가씨!”
복건에 당도한 연화심은 곧바로 아버지가 남긴 장원을 찾아갔다.
초지항과 화천대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천무방 놈들이 어느 순간 철수했습니다.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초 대주님!”
연화심이 초지항과 화천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불과 일곱 명이 남았다.
“예!”
“우리는 무한으로 돌아갑니다. 삼도문의 장원을 찾을 겁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