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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 통천관.
평범한 사람이라면 객사에서 통천관까지 올라오는데 한나절이 넘게 걸린다.
안내하는 도사는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신법을 펼쳤다.
마치 구름이 흘러가듯 유유히 산을 오르는 유연한 신법은 제운종이었다.
앞서가던 도사가 잠시 뒤를 보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소군이 따라 올라오는데 그 신법이 제운종을 연상케 하였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제 신법을 따라 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비슷하기는 하나 제운종과는 다르지요.”
도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비슷한 신법이다. 그러나 어딘가 다르다는 걸 그 역시 느끼고 있다.
강소군이 펼친 추운선(追雲仙)은 현치자가 남긴 무서에 있는 신법이다.
두 사람은 다시 신법을 펼쳐 통천관에 올랐다.
무당산하가 한눈에 들어오는 도관이다.
청무진인은 통천관 객청에 앉아 강소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놓인 찻잔에 담긴 찻물이 노랗다.
산이 높은 만큼 어느새 단풍이 들었다.
하늘은 푸르고 산하는 맑았으나 청무진인의 가슴은 답답하였다.
무당 장문직에 오른 지 십 년.
그간 무탈하게 지내 왔으나 최근 들어 그의 도심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무당 장문에 오른 만큼 그의 수양은 깊다. 그럼에도 왠지 모를 불안함이 그를 위축시키고 있다.
지난 정변이 있을 당시 뽑은 점괘 때문일지도 몰랐다.
천하를 두고 점을 쳤는데 명이(明夷)괘를 뽑았다. 천지가 어둠에 휩싸일 때 처신해야 할 도를 논하는 괘다.
이후 벌어지는 일도 심상치 않았다. 세속의 격변이 청정한 무당산에까지 밀려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장로들이 속가문파를 무당산하로 받아들이자는 의견을 수락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도인으로서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여야 하나 장문인으로서는 무당산만은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멀었구나. 청무야, 고작 이 정도였느냐?’
청무진인은 현치자를 만난 뒤 미련을 버렸다.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나무는 그저 자리를 지킬 뿐이나 바람이 가만두지를 않는구나.’
청무진인은 지금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없음을 느끼고 있다.
현치자의 말대로 오는 걸 막을 수 없고 가는 걸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남궁세가가 가져온 서찰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흔들었다.
무림맹!
남궁세가는 무림맹 결성을 위한 비무대회가 있음을 알려 왔다.
천하사패가 몰락하고 무림의 정세가 혼란스러우니 강호 대파와 세가가 무림맹을 결성하여 무림의 질서를 지키자는 뜻은 좋았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무림을 장악하는 패자가 출현한다는 뜻이다.
단지 남궁세가의 뜻이라면 무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미 유력한 강호의 세가들과 대파들이 동조하고 있다고 하였다.
‘무당의 길은 어디인가?’
장문인으로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을 때 수좌도사가 강소군과 함께 당도하였다.
“모셔왔습니다.”
강소군이 청무진인을 보자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무당 장문인 청무라네.”
청무진인이 마주 예를 취했다.
청무진인은 강호에 혈명을 날리는 혈마가 이렇듯 준수한 젊은 청년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강소군 역시 무림에서 명성이 높은 무당파의 장문인이 이렇듯 소탈한 사람이라는 것이 의외였다.
“이리 앉으시게.”
청무진인이 객청 객석으로 강소군을 앉게 하고 주인의 자리에 앉았다.
무당의 장문과 나란히 앉는다는 건 크나큰 영광이다.
강소군의 무명이 강호에 퍼져 나가고 있으나 배분으로 따져도 까마득한 후배다.
강소군은 산을 올라오면서도 솔직히 이런 대우를 받을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두 사람 앞으로 통천관 작은 마당이 있고 무릎 높이 담 너머 무당산하가 펼쳐져 있다.
청무진인이 손짓을 하자 도동 둘이 다가와 식은 차를 가져가고 새로 다구를 가져왔다.
청무진인이 손수 물을 끓여 차를 우려 냈다. 그동안 강소군은 묵묵히 눈앞에 펼쳐진 무당산을 보았다.
“들게.”
청무진인이 차를 건네며 물었다.
“강부의 후인으로 온 것인가, 강호인으로 온 것인가?”
강소군은 청무진인의 물음에 일시에 답을 못했다.
그러자 청무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몰랐나 보군. 이 통천관은 영안공주께서 지어 준 것이네.”
강소군이 흠칫, 놀랐다.
“무당산에 도관을 하나 지어 강 국공을 기려 달라고 하셨지.”
강소군이 통천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서야 청무진인이 직접 자신을 맞아 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강소군이 차를 마시고 말했다.
“강부의 후인도, 강호인으로서도 아닙니다. 그저 길을 묻고자 하는 후인으로 왔을 뿐입니다.”
청무진인이 강소군을 잠시 보더니 시선을 돌려 무당산하를 보며 말했다.
“저 아래 수많은 길이 있으나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 나 역시 모르는데 어찌 알려 줄 수 있단 말인가.”
거절의 뜻으로 들릴 수 있었으나 지금 청무진인의 솔직한 심사이기도 했다.
방금 전까지도 무당의 길에 대해 고심했으니까.
강소군이 청무진인의 말에 담긴 여운을 헤아리다 말했다.
“현치 노사께서 남기신 자취를 따라 왔습니다.”
“….”
“뵐 수 있겠습니까?”
“대도(大道)를 따라왔다면 가던 길로 계속 가시게.”
청무진인은 전날 현치자의 말을 들은 뒤 두 사람의 만남을 인연에 맡기기로 하였다.
청무진인의 시선이 다시 통천관 아래 펼쳐진 무당산하로 향했다.
“무당산은 넓지. 하지만 대도를 안기에는 한참 모자라다네.”
그의 말에 왠지 씁쓸한 여운이 담겨 있었다.
강소군은 산중에도 번민과 고심이 있음을 깨달았다.
무당 장문인이라면 세간에서는 반선(半仙)으로 불린다. 이미 반은 신선이라는 뜻이다.
강소군은 청무진인이 무엇 때문에 고심하는지는 몰랐으나 결코 작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당 장문인의 심사를 뒤흔들 일이라는 게 얼마나 있을까?
강소군도 다시 펼쳐진 무당산을 봤다.
그때 아래쪽에서 작은 폭음성이 터졌다. 분명 강력한 기가 터지는 소리였다.
청무진인이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아도 어디서 들려왔는지 그는 알았다.
해검지였다.
기파 터지는 소리가 청무진인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결국 무당은 멈출 수 없는 길로 가는구나!’
올 것은 온다!
현치자가 한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동시에 그간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일이 벌어졌으니 그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청무진인이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단호한 광망이 번뜩였다.
“무당에 변고가 생긴 것 같군. 더 이상 대접하기가 어려울 것 같네. 대도는 자네가 알아서 찾으시게.”
청무진인이 객청을 나가는가 싶더니 그대로 낮은 담을 넘어 뛰어내렸다.
통천관이 워낙 높으니 아래까지는 천장이 넘는다. 그럼에도 청무진인은 유유히 하강하였다.
‘…!’
강소군이 보니 한 마리 학이 날아 내려가는 것 같았다.
***
-콰앙!
-쩌저적!
해검지에서 들려 오는 소리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객사까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남궁령이 자신의 객방에서 튀어나왔다.
남궁우도 검을 챙겨 나왔다.
“고수가 무당산에 온 모양이다.”
“왔으면 왔지? 왜….”
남궁령이 말하다 말고 입을 딱 벌렸다.
멀리 보이는 해검지 전각이 무너지고 있었다.
“뭔 일이래?”
호위무사 넷은 벌써 무장을 하고 두 남매의 옆에 섰다.
“검대를 부를까요?”
호위무사 하나가 남궁우에게 말했다.
남궁우를 은밀하게 따라온 창궁검대를 부르자는 소리다.
남궁우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무당이다.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야.”
객사에는 무림인도 몇몇 있었다.
모두 병장기를 들고 나와 해검지 쪽을 보고 있었다.
-땡땡땡!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관마다 종이 있는 듯 종소리는 연이어 울리며 온 산을 울렸다.
뒤이어 푸른 도포를 입은 도사들이 해검지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방에서 도사들이 해검지를 향해 날아가는 모습은 청학 떼가 모여드는 듯 장관이었다.
“무당산에 강적이 왔나 보구나.”
남궁우가 돌아보며 말하는데 남궁령이 보이지 않았다.
“얘, 어디 갔지?”
호위무사들도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기, 아가씨 아닙니까?”
멀리 해검지를 향해 질주하는 남궁령을 가리키며 호위무사가 말했다.
“이런, 아우! 저 미친 계집애가?”
남궁우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그 뒤를 호위무사들이 따라갔다.
남궁령은 해검지에 당도하자 가슴이 마구 뛰는 걸 느꼈다.
무당파 해검지 전각 기둥이 박살이 나서 전면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그 앞에 사냥꾼으로 보이는 거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이미 해검지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였다.
무림인들은 물론이고 향화객들도 꽤 모였다.
무림인들이 싸움을 할 때 평범한 이들은 대개 자리를 피한다. 그러나 여기가 무당산이니만큼 믿는 구석이 있어 구경을 하는 것이다.
사냥꾼 앞에 무당의 도사들이 줄지어 섰다.
“이게 무슨 짓이오? 무당산에 올라 다짜고짜 손을 쓰다니!”
해검지를 관장하는 수좌도사가 사냥꾼들을 향해 말했다. 눈썹이 부르르 떨리는 것으로 보아 억지로 노기를 누르는 듯 보였다.
“흐흐흐. 사슴 한 마리가 여기로 뛰어들었는데 이 산을 다 뒤질 수는 없지 않나? 나오라고 해야지.”
구레나룻이 무성한 사냥꾼이 자신의 대도를 흔들며 말했다.
그가 도기를 날려 해검지 전각 기둥을 박살낸 것이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오? 여기가 어딘지 알고….”
터무니없는 말을 들은 도사의 목소리에 노기가 한가득 실렸다.
보는 이들이 없다면 바로 손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도사는 말을 맺지 못했다. 먼저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구레나룻이 무성한 사냥꾼이 대뜸 대도를 휘둘러 왔던 것이다.
-쉬이익!
도사가 손에 든 불진을 올렸으나 사냥꾼의 대도는 너무나 빨랐다.
-쩌억!
살과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도사는 사선으로 몸이 잘려 나갔다.
“으악!”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챈 향화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무림인들도 처참하게 죽은 도사의 시신과 무자비한 사냥꾼의 손속에 놀라 은근 뒤로 물러났다.
남궁령은 그만 토할 뻔했다.
“사형!”
죽은 도사의 뒤에 있던 도사들이 놀라 일제히 검을 뽑았다.
“흐흐, 나는 말이야, 말이 많은 놈들은 딱 질색이야. 너희의 입에서 나와야 할 소리는 딱 하나지. 죽기 전에 지르는 비명소리.”
사냥꾼은 마치 짐승이라도 죽인 듯 태연하게 말했다.
“살인마다!”
누군가 외쳤고 무당 도사들이 간격을 넓히며 검을 겨눴다.
“크크크. 토끼들이 무리 지어 있구나. 오늘 제대로 사냥을 하겠군.”
구레나룻 사냥꾼이 뒤에 선 자를 보며 말했다.
뒤에 선 사냥꾼은 호피를 걸쳤는데 턱이 긴 말상이었다.
“적당히 해. 명색이 무당이다. 체면은 살려 줘야지.”
말상의 사냥꾼이 말했다. 두 사람은 무당파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도사들이 격분하여 일제히 검을 겨누는데 허공에서 장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러나라!”
뒤이어 푸른 도포를 입은 도사들이 날아들었다.
“장로님! 저놈이 사형을 해쳤습니다.”
도사들이 울분에 차 고했다.
갑작스런 경종에 먼저 날아온 이는 무당의 삼장로 청진이었다.
청진은 이대제자가 몸이 반쪽이 나서 죽은 걸 보고 격동을 금치 못했다.
청정한 무당산에 제자의 피가 뿌려질 날이 있을 줄은 몰랐다.
“잔혹무도하구나!”
청진이 사냥꾼들을 보는 눈에 살기가 일었다.
“흥! 도사가 수양이 얕군. 고달픈 세상을 벗어나라고 등선을 시켜 주었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구레나룻 사냥꾼이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