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대정무각의 후인.
대정무각의 각주들이 자신들의 절기를 전수하겠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공동전인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이는 후일 대정무각의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중랑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기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중랑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게는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여러 각주님의 뜻은 감사하나 감히 받들기 어렵겠습니다.”
노이칠 등은 크게 놀랐다.
설마 중랑이 자신들의 뜻을 거절할 줄 몰랐던 것이다.
누가 있어 대정무각 후계자의 자리를 마다할 것인가.
노이칠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생각해보게. 이는….”
노이칠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 대청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연화심이었다.
연화심은 들어서자마자 대정무각 각주들에게 예를 취했다.
“중대한 일을 논하는데 갑자기 들어와 죄송합니다. 오라버니께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연화심은 곧바로 중랑을 향해 물었다.
“여러 각주님의 뜻은 오라버니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거절하시는 건지요?”
“….”
중랑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연화심이 왜 나서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해한 것이다.
중랑은 연화심과 함께 복건으로 가서 삼도문을 재건할 생각뿐이다.
천하사패 대정무각의 각주 자리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연화심은 그런 중랑을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혹 저 때문이라면 사양하겠어요. 이제 저는 제 길을 가고자 합니다.”
“너의 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너와 나의 길이 다르단 말이냐?”
중랑이 오히려 되물었다. 연화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다르지요. 한 뿌리에서 난 나뭇가지도 어느 순간 갈라져 자기의 길로 뻗어 나갑니다. 언제까지 오라버니의 그늘에 있을 수는 없지요.”
연화심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말은 매정하게 하고 있지만 중랑의 마음을 알기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솟은 것이다.
연화심은 자기 때문에 중랑이 기연을 놓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중랑의 길을 막는 장애물이 아닌가 생각했다.
중랑이 이미 남다른 검의 길에 들어섰음을 연화심은 알고 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연화심도 안다.
절대지경으로 가는 무인의 길은 혈육의 정을 끊고 출가하는 수도자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화심은 결코 중랑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중랑은 연화심의 말에 당황하였다.
그녀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랑에게 연화심은 죽은 누이의 환생이다. 평생 지켜주겠다고 스스로 맹세한 바 있다.
대정무각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일신의 성공이지만 그에게는 가족을 지키는 게 더욱 중요했다.
연화심은 그가 지켜야 할 혈육과 다름없었다.
“네가 오해를 하고 있구나. 그건 내가 돌아가신 연 문주께 맹세한 길이기도 하다. 나를 스스로 한 맹세조차 지키지 못한 부끄러운 이로 만들 셈이냐?”
중랑 또한 단호하였다.
중랑과 연화심의 말을 들은 대정무각의 각주들은 두 사람의 사연이 깊음을 짐작하였다.
관중이 일어나며 말했다.
“사내라면 천하를 질타하고자 하는 웅심을 품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나? 당장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니 며칠 생각하고 답을 주게나.”
관중이 여러 각주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하기로 하지.”
대정무각의 각주들이 삼삼오오 나가는데 반여월이 연화심에게 다가왔다.
“네가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반여월은 연화심을 제자로 여기고 아끼고 있다.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연화심은 아버지의 유해조차 수습하지 못한 불효를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중랑과 말을 나누다 격동한 마음에 다시 울컥, 하여 눈물을 보였다.
반여월이 연화심의 어깨를 다독였다.
“결정은 한순간이지만 후회는 오래간단다.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중랑이 다가왔다.
“화심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갈 길이 다르다니.”
“말 그대로예요. 저는 오라버니가 각주님들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화심은 말을 하고 돌아서 가 버렸다.
중랑은 연화심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유문광이 다가왔다.
“남녀 간의 정이란 건 때로는 오해가 있을 수도….”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예요?”
반여월이 유문광을 잡아끌고 대청을 나갔다.
다음 날 연화심은 서신을 한 장 남겨 놓고 사라졌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를 위한 오라버니의 마음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일을 생각하면 이러지 않을 수 없네요. 진정 저를 위한다면 오라버니께서 자신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삼도문주 연화심 배상.」
‘삼도문주?’
중랑은 연화심이 삼도문주를 자처하자 깨닫는 바가 있었다.
연화심은 홀로 삼도문을 재건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중랑이 곧바로 행장을 갖춰 쫓으려 했는데 노이칠이 말렸다.
“연 낭자의 뜻을 모르겠나? 연 낭자가 삼도문을 재건하고 나서 필요한 게 무엇이겠는가? 고수 중랑인가 아니면 대정무각의 각주겠는가? 그때도 천무방 같은 존재가 있다면 어떤 이가 더 필요하겠나?”
노이칠의 말은 중랑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었다.
중랑이 멍하니 서서 생각에 잠겼다.
만일 천무방이 마수를 뻗쳤을 때 대정무각이 나섰다면 연 문주가 그리 허망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자신이 강소군과 같은 고수였다고 하면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기에 이를 악물고 수련을 했다. 하지만 초절정의 경지는 깊고도 깊어 언제 끝을 볼지 모른다.
물론 그의 나이에 정도에 이른 것만도 놀라운 것이다. 대개의 경우 절정의 문턱도 넘지 못하지 않는가.
초절정의 경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사실 대부분이다.
노이칠 또한 초절정의 경지를 수련하는 자이기에 중랑의 상황을 알고 있다.
“절대의 경지는 쉽게 넘을 수 있는 게 아니네. 그랬다면 너도 나도 절대고수가 되지 않았겠나? 초절정의 경지에 오래 머물수록 오히려 절대지경과는 멀어지네. 절정 이후의 경지는 시간을 쌓아 가는 게 아니란 말일세.”
노이칠은 확실히 달변이었다.
“대정무각의 각주 가운데 백 대형만이 절대고수의 경지에 들었지. 최근 관 대형도 그 초입에 들어섰으나 천황성 고수와의 접전에서 동수를 이루고 내상까지 입었네. 누군가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하네. 누구보다 자네가 잘 알지 않는가?”
중랑은 말없이 듣기만 하였다. 노이칠은 쐐기를 박았다.
“대정무각의 이목을 총동원해서 연 낭자를 지켜보겠네. 벌써 반 누님이 사람을 붙였다네. 연 낭자의 안위는 반 누님에게 맡기고 그 사이 자네는 힘을 기르게.”
***
연화심은 경성을 떠나기 전 강소군의 집을 들렀다.
강씨 남매는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집을 비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남경 강부로 떠나려는 것이다.
“주군께서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가셨습니다. 장 아가씨도 떠나셨고요.”
강하가 말했다.
“그렇군요.”
연화심은 자신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난 강소군이 왠지 서운했다.
강하가 그런 연화심의 속을 짐작했는지 말했다.
“남경 강부로 기별을 주면 연락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연화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강부를 나와 경성을 벗어났다.
탁 트인 관도를 따라 말을 달리니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중랑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 깨달았다.
지난 일 년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그녀는 아직 스물이 채 되지 않은, 나이다.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다.
다만 한 가지 얻은 확신은 한 발 한 발 나아가지 않으면 삶도 없다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에 사로잡혀 끝내 미쳐 버리고만 마씨 부인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연화심은 오로지 앞날만 생각하기로 하였다.
길게 뻗은 관도를 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이제 홀로 서는 거야. 아버지, 반드시 삼도문을 재건할 거예요.’
연화심은 복건으로 가서 화천대를 찾고 무한으로 갈 생각이다.
***
강소군은 무당파 객사 앞에 있는 석탁에 앉아 있었다.
객사에 묵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산을 오르내리기 전 하루 이틀 쉬었다 가는 곳이다.
남궁세가는 아침 일찍 무당산에 올랐다.
남궁령이 같이 오르기를 원했지만 무당파 도사가 고개를 저었다.
“장문인께서 따로 뵙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강소군은 석탁에 앉아 기다리는 중이다.
객사 앞으로는 무당산으로 오르는 큰길이다.
향화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무심히 길을 바라보는 강소군의 눈에 한 무리의 젊은 남녀가 들어왔다.
명문가의 자제들인 듯 차림새가 남달랐다.
대여섯 명의 일행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 모습이 강소군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지난 시간 언젠가 자신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날은 극히 드물긴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문과 무공을 익히느라 보냈으니까.
문관 집안 태생인 강소군이 무공을 익힌 것은 장선백 덕분이기도 했다.
장선백의 집을 찾았다가 그가 창을 쓰는 모습을 보고 빠져들었다.
찌르고 흘리고 후려치는 장선백의 동작은 힘이 넘치고 절도가 있었다. 무술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어쩌면 예정된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는 집을 벗어나 천하를 주유하는 꿈을 꾸곤 하였다.
무공을 익히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집안의 호위 무사에게 기초를 배우고 무공서를 구해 익혔다.
“하하하. 너 정말 재밌구나. 무공을 책으로 익히다니.”
그런 강소군을 장선백이 놀렸다.
“무공도 결국 원리를 알아야 제대로 익히는 거라고. 몸만 쓰면 도부수나 다를 게 없지.”
“무슨 헛소리야. 이리 와 봐. 이 형님이 몸으로 가르쳐 드리지.”
그래서 시작된 비무가 몇 년을 이어졌다.
장선백은 체구가 건장하고 힘이 남달랐다.
전장으로 나가기 위해 장창과 대도를 주로 익혔다.
하지만 당시 책만 읽어 유약했던 강소군에게는 맞지 않았다. 십팔반 병기를 섭렵했지만 결국 비도와 검으로 귀결하였다.
장창술은 장선백과 겨루다 보니 늘었다. 하지만 장선백의 대도를 대도로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택한 병장기가 검이었다.
강소군은 장선백의 패도적인 대도와 맞설 검법을 찾기 위해 황궁 서고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러다 현치자가 남긴 금단진공과 대연의결 등을 접했다.
황궁서고의 무서들은 군문의 장수들을 위한 것으로 대개가 힘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현치자가 남긴 무서들은 무당의 무공을 바탕으로 하였다. 적은 힘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유능제강의 원리에 강소군은 빠져들었다.
천무방주 구연강과 겨루고 난 뒤 강소군은 자신의 무공의 뿌리가 무당이라는 생각을 했다.
구연강의 내력을 가득 싣고 날아온 검을, 삼 푼의 내공을 담은 조약돌을 들어 올려 깬 것은 사량발천근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당은 수행을 중시하는 문파다. 심마를 극복할 수행법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심마에 들었음을 깨달은 뒤 강소군은 무당을 찾을 생각을 하였다.
절대지경에 든 백정무가 봉황수에게 패한 것은 강소군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절대고수 간의 싸움에서 약간의 내상이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물며 심마를 벗지 못하고 겨룬다면 결과는 자명할 것이다.
그래서 무당산부터 찾았지만 사실 막막했다. 아는 이 하나 없으니 현치자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강소군도 그가 아직 살아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무당 장문인을 만나 심마를 벗어날 단초만 얻는다면 만족할 것이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남궁우와 남궁령이 산을 내려왔다.
뒤이어 따라온 도사가 강소군을 청했다.
“이리 오시지요. 장문인께서 기다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