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22화 (12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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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무진인이 장로들을 보았다.

모두 뜻이 대동소이한 듯했다.

“으음.”

청무진인이 내심 탄식을 했다.

장로들은 속가제자들이 문파를 세우면 무당산하로 받아들이자고 하는 중이다.

속가제자들이 세운 몇 문파가 장로들을 통해 청을 한 것이다.

소림과 달리 그동안 무당은 속가제자들이 세운 문파를 인정하지 않았다.

속가제자들의 문파들과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로 지낼 뿐 일체의 은원이나 재정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

덕분에 무당산의 청정과 덕은 지킬 수 있었으나 소림에 비해 무림에 대한 영향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청무진인은 난감했다. 속가문파를 무당의 산하로 인정하면 강호의 시비가 무당산까지 들어올 것이다.

자신의 대에서 그런 불씨를 들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 일은 좀 더 생각하고 결론 내겠소.”

장문인의 명이 떨어지자 장로들은 못마땅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장로들이 일어나 우르르 대청을 나가는데 젊은 도사가 와서 청무진인에게 고했다.

“남궁세가의 자제가 장문인을 뵙고자 청해 왔습니다. 가주의 서신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남궁세가라는 말에 몇몇 장로가 관심을 가지고 돌아왔다.

“남궁세가?”

청무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남궁세가와 별다른 왕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온 혈마 강소군이란 자가 역시 장문인을 뵙고자 청했습니다.”

“혈마?”

피가 뚝뚝 흐르는 별호에 청무진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 자를 산에 들였다는 말이냐?”

옆에서 듣던 장로들도 놀라 말했다.

“아닙니다. 해검지에서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혹시 용건이 뭔지는 아느냐?”

“현치 노사님에 대해 묻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현치 노사?”

청무진인이 흠칫, 놀라 되묻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왜 그분을 생각지 못했지?’

현치자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어느 날 무당산에 돌아와 옥판봉 아래 은거하고 있다.

현치자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인근 도관의 도사들은 그저 무당산에 거하는 늙은 도사 중 한 사람이라고 여길 뿐이다.

청무진인은 강소군이 찾는다는 말에 현치자를 떠올리고 지금 부딪힌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은 듯했다.

“손님들을 객사로 안내하라. 내일 중으로 연락을 할 것이다.”

청무진인이 말하자 장로 하나가 말했다.

“장문인, 혈마란 자는 무공이 뛰어나고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 한다고 합니다. 그런 흉악한 자를 무당에 들이시는 건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겨우 객사일 뿐이오.”

청무진인이 장로의 말을 일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나를 찾지 마라.”

청무진인은 그 길로 옥판봉을 올랐다. 평소 옆을 따르던 도동도 물리고 홀로 산길을 걸었다.

‘너무 무심했던 게 아닌가.’

예전에는 매년 정초에 한 차례 현치자를 찾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몇 년에 한 번으로 줄었다.

무당산에는 크고 작은 수백여 도관이 있다.

현치자는 옥판봉 중턱 옥허동천에서 지내고 있다.

이름은 그럴듯한데 사실 도관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집 한 채에 불과하다.

옥판봉이 워낙 험해 도사나 향화객들도 찾지 않는다.

절벽 계단 길을 따라 돌아가니 절벽 틈에 작은 도관 하나가 나왔다.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전각은 절벽 틈 동굴을 파고 지었고 마당은 손바닥만 했다.

늙은 도사 하나가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청무가 조사님을 뵙습니다.”

청무진인이 예를 취하자 늙은 도사가 손을 흔들어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올라오는 걸 봤지. 마침 잘 왔네.”

현치자가 청무진인의 허리춤을 보더니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나?”

“무당산에서 검을 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보다 어찌 지내셨는지요?”

“멀쩡한 걸 보면 모르는가?”

현치자가 말하더니 절벽에 박힌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서 가지고 왔다.

그러더니 청무진인에게 내밀며 말했다.

“태극혜검을 펼쳐 보게.”

다짜고짜 태극혜검을 펼치라니 청무진인이 당황했다.

“제 성취가 부족하여 아직 보여드릴 수준이 못 됩니다.”

“어허. 장문인이 어울리지 않게 겸양을 하고 그러나? 어서 펼쳐 보게.”

현치자가 막무가내로 나오니 청무진인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무당 장문인이 나뭇가지로 태극혜검을 시연하다니.

하지만 현치자에게는 청무진인이 그저 까마득한 후배일 따름이었다.

그가 무당산을 떠날 때 청무진인은 입산도 하지 않았다.

청무진인이 늘어뜨린 나뭇가지로 반원을 그리며 들었다. 원의 정점에 이르자 나뭇가지가 꺾이며 비스듬히 내려오다 정중앙을 찔렀다.

정면을 찌른 나뭇가지의 끝이 원을 그리는가 싶더니 기운이 퍼져 나가며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듯했다.

나뭇가지가 이뤄낸 공간은 무엇이든 빨아들일 기세였다.

“엇!”

청무진인이 펼치는 태극혜검을 유심히 바라보던 현치자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회전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깨졌다.

나뭇가지의 끝이 현치자의 손에 잡혀 있었다.

“역시 그랬군.”

현치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청무진인은 그야말로 대경실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극혜검은 무당에서 최고의 절학으로 여기는 검법이다.

단순한 검법이 아니라 깨달음이 경지에 있는 검도라고 숭앙하는 태극혜검이 한순간에 깨졌으니 청무진인이 놀랄 만도 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청무진인이 자신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보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현치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왔다 갔다 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청무진인에게 물었다.

“가장 큰 것은 없는 것이다. 없다는 것마저 사라질 때 비로소 진정한 무(無)에 달한다. 하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태극혜검의 심결 가운데 하나였다.

“말 그대로 대도(大道)는 무(無)에서 비롯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닙니까?”

청무진인이 대답했다. 태극혜검의 심결을 논할 때 으레 풀이하는 답이다.

“그게 아닌 것 같다는 말이지. 예전에 조사께서 태극혜검을 펼칠 때는 이렇지가 않았어.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기운조차 없었지.”

현치자의 조사는 장삼봉이다.

무당산의 한 줄기 도맥에 불과했던 무당파가 오늘날 무림의 대파로 성장하였기에 무당의 중흥조사로 불린다.

“그렇다면 제 심득이 잘못되었다는 겁니까?”

“그게 자네 심득인가?”

현치자의 말에 청무진인이 얼굴을 붉혔다.

“대대로 내려온 심득 아닌가?”

“맞습니다.”

청무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문제라고. 도사들은 저 잘난 멋에 잔뜩 말을 붙여 본래의 뜻을 흐린다니까.”

청무진인은 돌아가신 사부가 현치자를 무치(武痴)라고 불렀던 것을 떠올렸다.

‘현치 사숙은 젊어서 무당을 떠나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황실에까지 들어갔다고 하더군. 무치라고 불릴 정도로 무공광이었다네. 황실에서 무당의 무공을 자기 나름대로 바꿔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걸 알고 사부께서 격노하여 잡아 와 옥판봉에 연금한 걸세. 어찌 됐거나 유일하게 남은 전대고인이니 가끔 찾아뵙게나.’

사부가 말년에 남긴 당부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더불어 머리가 아팠다.

‘아무리 무치라도 그렇지. 태극혜검 파훼법을 찾아내다니. 이 법이 새어 나가면 큰일이구나.’

청무진인이 걱정을 하는데 현치자는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말했다.

“이건 파훼법이 아니라 태극혜검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야.”

“예?”

“가장 큰 것을 대도(大道)라고 생각한 게 오류라는 거야. 태극혜검을 깨달음의 검이라고 여긴 나머지 실제 이상의 개념을 부여한 것이지.”

현치자가 자신이 다시 깨달은 심득을 마구 늘어놓았다.

청무진인은 자신이 온 이유도 잊고 현치자의 태극혜검 검해(劍解)에 빠져들었다.

서로 논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 저물었다.

“자고 가련가?”

현치자의 말에 청무진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런, 사조님께 상의드릴 사안이 있어 왔는데 검을 논하다 깜박했습니다.”

청무진인은 가슴이 뛰었다. 태극혜검의 진정한 무리를 방금 얻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청무진인이 무당파가 속가문파를 무당산하로 받아들이는 문제를 꺼냈다.

“그게 뭐 대수인가?”

청무진인이 그럴 경우의 폐해를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다 듣고 난 현치자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였다.

“청정산중에 있다고 올 사람이 안 오고 갈 사람이 안 간다던가?”

청무진인은 현치자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사실 맞는 말이다.

청무진인은 방금 태극혜검을 논하며 도심이 한층 깊어진 상태다. 현치자의 한마디에 고민이 사라졌다.

“제가 어리석어 사조님을 번거롭게 하였군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청무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강소군이 찾아왔다는 걸 기억해냈다.

“혹 강소군이란 자를 아시는지요?”

“강소군?”

“황실의 외척인 모양인데 강호에서는 혈마라고 불리는 패도적인 고수입니다.”

무당에는 수많은 향화객이 오간다. 앉아서 세상 소식을 다 듣고 있다.

청무진인은 오기 전에 강소군에 대해 좀 알아보고 왔다.

“모르겠는데? 왜 그런가?”

“그자가 사조님을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 물으니 청무진인은 할 말이 없었다.

“외인을 함부로 들여 사조님의 수행을 깨뜨릴까….”

“무당산이 무당의 것인가? 그가 오고자 하면 오는 것이지.”

청무진인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현치자를 보다 옥허동천을 빠져나갔다.

***

대정무각 경성 안가.

대정무각의 아홉 각주가 대청에 모였다.

중랑이 들어서서 예를 취했다.

“여러 각주께서 부르셔서 왔습니다.”

노이칠이 손을 저으며 다가왔다.

“이리 앉게. 우리 사이에 그리 예를 취할 건 없지. 사실 우리는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노이칠이 유문광과 중랑을 번갈아 보며 눈을 찡긋하였다.

그래도 중랑은 정중하게 서 있었다.

“분명 하실 말씀이 있으실 텐데 까마득한 후배가 어찌 동석하여 듣겠습니까?”

중랑이 깍듯하게 예를 취하자 대약무검 관중이 내심 마음에 들어 하였다.

군 출신인 그는 상명하복에 익숙했다. 강호에 나와 상하의 예를 제대로 취하는 젊은이를 보기 어려웠는데 중랑은 실력도 있는 데다 행동거지도 진중했다.

유문광 역시 흐뭇한 얼굴로 중랑을 보며 말했다.

“오늘 자네를 부른 건 중대한 일을 논하기 위함이네.”

유문광이 자리에 일어서서 아홉 각주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중 소협은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이자 사람 됨됨이 또한 진중합니다. 이는 제가 보증하지요.”

중랑은 유문광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문광이 자리에 앉자 상석에 앉아 있던 관중이 말했다.

“유 각주와 노 각주가 자네를 추천하였네. 길게 말할 것 없을 것 같군. 대정무각의 후인이 되어 주지 않겠나?”

“…!”

“자네가 초절정에 이른 고수라는 것은 아네. 하지만 여기 여러 각주의 무공은 강호에서 보기 힘든 절기이지. 자네가 전수를 받는다면 대성을 이뤄 절대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라 믿네.”

대약무검 관중은 이번 천황성의 기습에서 고수와 겨루다 내상을 입었다.

일각주 백정무 또한 천황성의 고수 봉황수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여러 각주들은 절대고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랑에게 힘을 모을 생각이었다.

중랑은 그제야 이 자리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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