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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산.
수려한 산세에 흐르는 기운은 부드러웠다.
중양절은 맞아 무당산 아래 균현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무당산 곳곳에 수없이 많은 도관이 들어서 있다.
무당파가 중흥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원래부터 무당산은 도가의 산으로 이름 높았다.
무당산 곳곳 도관에서 수행하는 도사들의 도력은 천하에 알려져 있다.
악귀와 병마를 쫓고 현세에 발복하고 후대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천하 각지에서 무당산을 찾는 향화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균현의 객잔은 늘 붐볐다.
강소군이 균현에 들어선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명절을 맞아 북적이는 균현 거리에서 마땅한 객잔을 찾기가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빈방이 없네요.”
전혀 아쉬운 기색이 없는 점소이를 뒤로하고 되돌아 나오려는데 안에서 누군가 불렀다.
“오라버니!”
뒤이어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남궁령이었다.
여전히 면사를 두르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남궁가의 표식을 지닌 무복을 입은 여인 중에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맞아줄 사람은 또 없다.
“이게 웬일이래요? 아하하!”
면사를 쓰고 대소를 터뜨리는 게 영 어색했다.
무엇보다 오라버니라는 호칭이 낯설었다.
‘언제 그렇게 됐지?’
강소군이 어리둥절해하는데 뒤이어 나오는 남궁우가 보였다.
왠지 해쓱한 얼굴이다.
남궁우가 여동생을 흘깃 노려보고는 강소군에게 포권을 하였다.
“이곳에서 뵙다니 반갑군요.”
“그렇군요.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강소군이 마주 예를 취했다.
강씨 남매를 구해 준 남궁가에 대한 기억은 나쁘지 않았다.
“하하. 이런 인연이 있나요. 오라버니,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남궁령이 착 달라붙어 강소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강소군이 가만 소매를 당겨 남궁령의 손을 놓게 하고 말했다.
“이 객잔은 만실이라더군요.”
“크하하.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가 방을 내주면 되거든요. 지금 균현에서 방 구하기 힘들어요.”
남궁령의 말에 남궁우가 황당해하였다.
“뭐라? 무슨 소리냐?”
“호위들과 자면 되잖아. 강 오라버니가 균현에서 방도 못 구해서 쩔쩔매는 걸 꼭 봐야겠어?”
남궁령의 말에 강소군과 남궁우 둘 다 할 말을 잃었다.
“쩔쩔매는 건 아닌데….”
“으헤헤. 그렇게 될 거라는 말이죠. 어서 들어오세요.”
남궁령이 다시 잡아끄니 강소군도 엉겁결에 따라 들어갔다.
홀로 남은 남궁우가 남궁령을 노려봤다.
‘아니, 저것이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오라비라니….’
사실 생판 모르는 건 아니다. 그래도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착 달라붙으니 기가 막혔다.
친오라비인 자기에게도 저렇게 살갑게 군 적이 없었다.
‘가증스러운 것!’
방금 전까지 면사를 쓰고 고상한 척 음식타령하던 남궁령이다.
갑자기 헤헤거리며 강소군 옆에 착 달라붙으니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남궁령은 남궁우가 노려보든 말든 자신의 자리로 끌고 가 앉혔다.
“이 동네는 정말 먹을 게 없어요. 역시 음식은 강남이죠. 언제 강남 오면 좋을 텐데. 왜 안 오셨어요?”
강소군으로서도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남궁령이다.
“크하하. 아참. 바쁘셨지. 다 들었어요.”
남궁령이 강소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한왕군 오만대군과 일전을 뜨셨다면서요? 한왕군이 풍비박산 나서 비 맞은 똥개처럼 도주했다면서요?”
강소군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강호의 소문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
그날 이후 황군은 계속 한왕군을 몰아붙여 승승장구하였다.
한왕은 산동까지 몰렸다. 조만간 패망할 게 분명했다.
강소군이 말이 없자 남궁령은 계속 떠들었다.
“일권삼각 봉무량을 박살 내셨다면서요? 천무방주와도 일전을 겨뤘다고 들었어요. 십대고수들과 연이어 격전을 벌여 이기다니. 오라버니야 말로 진정한 십대고수예요.”
남궁우가 끼어들었다.
“좀 조용히 해라. 여러 사람이 있잖느냐?”
그 말은 이미 늦었다.
한창 저녁때라 소란스러웠던 객잔 반점이 조용해졌다.
남궁령의 목소리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주위 사람이 듣기에는 충분했다.
“아하? 으헤헤헤. 못 들은 척하세요. 떠들면 죽어요. 나 누군지 알죠?”
남궁령이 눈을 부릅뜨자 모두 자기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보고 젓가락질하기 바빴다.
남궁령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날 반점에 있던 사람들은 강호에 혈명이 자자한 혈마와 남궁세가의 살짝 정신이 나간 여식을 보았다.
그리고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혈마가 남궁세가의 사위가 되었다!
***
해검지.
작은 연못 옆에 커다란 전각이 있었다.
무당을 오르는 무인들이 병장기를 맡기는 곳이다.
찾아온 목적을 밝히는 곳이기도 하다.
강소군은 병장기가 없었다.
남궁 남매와 호위들은 차고 온 검을 맡겨야 했는데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인이 검을 놓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에헤이. 고수는 무기에 집착하지 않는 거라고. 강 오라버니. 안 그래요?”
남궁령은 미련 없이 검을 풀어 맡겼다.
남궁우와 따라온 남궁세가의 무인들도 마지못해 검을 풀었다.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요?”
검을 받아 든 해검지의 도사가 물었다.
남궁세가의 표식을 달고 온 일행이다. 무당의 얼굴인 그로서는 예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궁우가 예를 취하고 배첩을 건넸다.
“남궁세가의 남궁우, 장문인께 전하는 가주의 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도사가 흠칫, 놀라더니 옆에 있는 젊은 도사에게 속삭였다.
젊은 도사가 황급히 사라졌다.
“말씀은 전했습니다. 장문인께서 하명을 하실 것입니다. 그 전에 객사로 모시겠습니다.”
도사가 정중하게 말했다.
남궁세가의 명성은 무림에서 작지 않았다.
그때 강소군이 나서서 말했다.
“나는 따로 왔습니다.”
도사가 강소군을 보더니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장문인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처사의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
“강소군이라 합니다.”
도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때 남궁령이 불쑥 나섰다.
“이 오라버니의 별호가 혈마예요. 아시죠? 혈마.”
도사의 안색이 급변했다.
해검지를 담당하는 도사가 강호의 소식을 모를 리 없다.
천무방과 혈마의 혈전은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도움을 주려는 남궁령의 의도와는 달리 도사는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혈마라는 별호에 붙은 마가 무슨 의미인가.
도사가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강 처사께서 무슨 일로 장문인을 뵙겠다는 건지요?”
“실은 장문인이 아니라 한 분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아무래도 장문인께서 그분의 행방을 아실 것 같아서요.”
“예?”
도사가 되물으며 강소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체 누구를 찾는다는 말인지요?”
해검지를 담당하는 도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무공과 경륜을 갖춘 자이니 평정심을 유지하고 침착하게 물었다.
“현치 노사를 뵙고자 합니다.”
“….”
도사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뜻밖의 말을 들은 것이다.
“지금 누구를 뵙는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무나 진지하게 물어보니 강소군도 정중하게 말했다.
“현치 노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도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등선하신 분을 찾아오셨다는 겁니까?”
현치자가 누군가.
무당의 중흥조사 장삼봉 진인의 진전을 이었다는 제자다.
장 진인의 여러 제자 가운데 무에 미쳐 세상을 떠돌았다는 현치자인데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현치자를 찾아오다니 도사가 황당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등선을 하셨다고요?”
“….”
도사가 머뭇거렸다.
사실 현치자가 오랜 세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등선했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그저 그럴 것이라고 모두 여겨왔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와서 이런 말을 했다면 곧바로 일축하고 물렸을 것이다.
하지만 묻는 이가 강호를 진동시킨 혈마라니 도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강 처사께서는 여기서 잠시 기다리셔야겠습니다.”
무당산으로 들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강소군은 그러려니 하는데 남궁령이 불쑥 나섰다.
“왜 그래야 하는데요? 저희랑 같이 가서 기다리면 안 되나요?”
도사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남궁령과 강소군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강 처사의 일에 남궁세가에서 나서는 뜻은 무엇인지요?”
도사의 표정에서 남궁령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천방지축이지만 강호의 법도는 잘 아는 남궁령이다. 하지만 내친 김이다.
“아니, 그냥… 사람을 기다리라고 하니. 그렇죠. 이분은 제 오라버니라고요.”
도사가 남궁령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래서?’
도사의 눈에 역력한 뜻을 남궁령도 읽었다.
남궁세가의 명성이 대단하지만 무당파는 소림과 함께 무림의 태산북두로 일컬어진다.
남궁우가 재빨리 나서서 수습했다.
“하하. 강 공자님과 도중에 합류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만 산에 오른다니 왠지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희가 강 공자와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도사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남궁우는 입맛이 썼다. 그리 말하면 함께 객사로 안내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일체의 양보가 없었다.
도사가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해검지 전각에 젊은 도사들만 남아 멀뚱멀뚱 일행을 쳐다보았다.
일행은 전각을 나와 해검지 연못 옆에 서성거렸다.
“현치자가 누구예요?”
남궁령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현치자는 세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남궁령 역시 알지 못했으나 강소군이 찾으니 범상치 않을 거라 생각하고 물은 것이다.
“그분이 쓰신 책을 보고 앙모하는 마음에 뵙고자 한 겁니다.”
강소군의 말에 남궁령이 눈알을 굴리다 돌연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 말아요. 오라버니는 보기보다 의뭉스럽군요.”
남궁우가 다급히 동생을 나무랐다.
“무례하구나.”
“그렇잖아요. 무슨 도를 찾으러 온 것도 아니고.”
남궁령이 눈을 반짝이더니 강소군의 코앞에 얼굴을 디밀고 말했다.
“비무를 하러 오신 거죠?”
“….”
“강호를 제패한 절대고수! 은거한 기인을 찾아 무를 논하다!”
강소군은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고 남궁우는 뒷목을 잡고 휘청거렸다.
남궁우가 무당산 푸른 하늘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아버지! 대체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또다시 남궁령을 딸려 보낸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상청궁.
무당의 무수한 도관 가운데 가장 많은 도인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상청궁 대전에 십여 명의 도사들이 모여 있었다.
상석에 앉은 무당 장문인 청무진인이 침중한 얼굴로 모인 도사들을 돌아봤다.
무당의 장로들이 모두 모였다.
이는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자리다.
“여러 장로들의 뜻이 참으로 의외이구려.”
청무진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았다.
장로들의 표정은 무심하였다.
청무진인이 탄식을 하였다.
“무당은 청산의 도를 따랐소. 어찌 세속의 명리를 바란다는 말이오?”
청무진인의 말에 장로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천하가 요동치고 많은 이들이 처참한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산중의 도만 좇으며 외면한다면 이 또한 도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한 장로가 말을 받았습니다.
“천하사패가 서로 각축을 벌이며 무림이 도탄에 빠진 것은 천하가 압니다. 무당은 충분히 세상을 구할 힘이 있습니다. 중흥조사께서도 민초의 고초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완곡하지만 강경한 말이었다.
청무진인이 탄식하였다.
“무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소. 그런데 세속의 다툼에 뛰어들면 과연 뭐라고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