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20화 (120/250)

120

“강호?”

노이칠이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강소군을 보았다.

이제껏 강호에서 뒹군 사람이 강호로 나간다니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일이 있습니다.”

강소군은 당초 위지평을 자극하여 천황성의 주목을 끌 생각이었다.

그들이 찾아오면 맞상대하며 실마리를 풀어가려 했으나 뜻밖에도 위지평이 무덤으로 안고 들어가 버렸다.

더 이상 조정에서는 천황성의 꼬리를 잡아내기 어려웠다.

관직이 없는 강소군으로서는 조정에 숨어든 천황성을 찾을 방도가 없었다.

대정비각이 있다지만 이를 되찾을 단초가 그에겐 없었다.

설령 찾는다 해도 아버지가 죽은 지 십여 년이 되었는데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천황성이 상계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하나 그 세계야말로 그로서는 문외한이다.

결국 강호에 나가 천황성의 꼬리를 잡는 방법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느 길로 가든 몸통에 이르겠지.’

강소군은 위지평의 일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하오문을 찾아 강호에 대해 대충 파악해 두었다.

천하사패가 몰락하는 형세이니 강호는 요동칠 것이다. 그 와중에 천황성의 흔적이 나타날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그러나 자세한 말을 노이칠에게 할 수는 없었다.

“정말 자네는 알쏭달쏭한 사람이군.”

노이칠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강호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하러 온 건 아니겠지?”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노이칠은 어딘가 모르게 강소군이 낯설었다.

그가 아는 강소군은 이렇게 부탁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뭐, 사람은 변하는 거니까.’

노이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늘 자네 편이지 않나?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들어주지.”

특유의 친화력은 어디 가지를 않았다. 은근히 착 달라붙었다.

“대정무각 십각은 강호 전역에 연락망이 있다지요?”

“뭐, 전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개방이나 하오문에 필적할 만하지.”

“그 연락망을 이용하게 해 주었으면 합니다.”

“으음.”

노이칠은 난감했다. 아무리 그가 친근하게 여긴다 해도 강소군은 외인이다.

대정무각 십각의 연락망을 이용하게 하는 건 이제 대정무각을 책임진 관중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다.

연락망을 이용한다는 건 그 체제를 안다는 뜻이고,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당장 결정을 내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소군이 여유를 두었다.

“며칠 기다리면 알려 주겠네.”

노이칠이 강소군에게 말했다.

“나도 부탁이 있네.”

“말씀하시지요.”

“조운룡을 만나게 해 주게.”

“…?”

“한왕과 도룡회가 갈라섰다는 첩보를 받았네. 자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도 들었지.”

노이칠은 도룡회와 휴전을 할 생각이다.

도룡회가 이미 해산했다는 이야기까지는 듣지 못한 것이다.

강소군이 노이칠의 의도를 짐작하고 말했다.

“도룡회는 해산했습니다.”

노이칠이 흠칫, 놀랐다.

“조운룡은 확실히 성질이 급하더군요. 염 회주의 시신 앞에서 바로 공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도룡회 각 문파는 각자 생존을 위해 떠난 걸로 압니다.”

“도룡회의 주축은 화룡문이었네. 조운룡은 화룡문의 문주이고. 화룡문에는 십이도객과 백대도수가 있지.”

노이칠은 여전히 뜻을 버리지 않았다.

“백 대형과 우문극이 생사결을 벌여 서로 손해를 본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과거의 은원을 잊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나?”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조운룡과 저는 사실 그리 깊은 사이가 아닙니다. 제가 오란다고 올 사람이 아니지요.”

노이칠이 고개를 저었다.

“흠, 자네가 정말 사람을 모르는군. 조운룡은 자네가 부르면 사지라도 찾아올 걸세.”

그 말에 강소군이 오히려 놀랐다.

“그가 왜 그런다는 말입니까?”

“그건 자네가 좀 더 살아보면 알 수 있지.”

노이칠은 왠지 강소군에게 의문의 일격을 먹인 듯하여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서신을 써 주게. 내가 전해 주겠네.”

강소군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노이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강소군을 보다 혀를 찼다.

“흐음. 이상해.”

“무슨 말이지요?”

“자네는 무척 똑똑한데 어느 면으로는 너무 어수룩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라면 아까 말한 연락망을 이용하는 결정이 내려진 다음 서신을 쓰겠다고 했을 걸세.”

자신이라면 조건을 걸었다는 이야기다.

강소군이 피식, 웃었다.

“노 각주께서 들어주실 수 있는 거라면 바로 들어주셨겠지요. 하지만 서신 한 장 쓰는 건 바로 들어줄 수 있는 일이니 무어 그리 어렵겠습니까.”

“어쩌면 더 고단수일지도 몰라….”

강소군의 말에서 무언의 압박을 느낀 노이칠이 중얼거렸다.

***

밤길을 달리는 거대한 마차.

여덟 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십여 기의 기마무인과 날렵한 경공으로 호위하는 이백여 명의 무인들.

그럼에도 깃발도 표식도 없었다.

마차 안은 대여섯 명이 들어가 누워도 될 만큼 넓었다.

한쪽에 침상이 있고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천무방주 구연강.

천하사패의 한 축 천무방의 주인이자 천하제일인을 꿈꾸던 그가 마차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침상 옆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는 구양수였다.

-덜컹.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밤길이다.

중상을 입은 천무방주를 모시고 가는 길이다.

마부가 목숨을 걸고 몰고 있지만 어둠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편하게 마차를 몰 수 있게 놔두지 않았다.

마부의 심장이 졸아들었으나 마차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구양수는 마차가 흔들리자 잠에서 깨었다. 그러고는 구연강을 살폈다.

“괜찮으시지요?”

구연강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잠을 자지 않았다.

두 눈에서 원통한 빛이 줄줄 흘러나왔다.

구양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 화만 내지 마세요. 몸 상한다고요.”

구양수가 흘러내린 이불을 덮어 주었다.

“부모라는 게 다 자식 잘되기를 바란다지요? 그래서 저는 애를 낳지 않을 생각이에요. 자식이 부모를 잡아먹는다니까요.”

구양수가 품에서 환약을 꺼내 숟가락에 올리고 물에 개었다.

“자, 쭈욱 드세요.”

구연강이 입을 앙다물었으나 구양수가 턱을 잡아 벌리고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검은 약물이 구연강의 입으로 들어갔다.

-끄르륵.

구양수가 목젖을 어루만지자 꿀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구연강의 눈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두 눈에서 핏물이 흘렀다.

“저런, 이러다 몸 상하신다니까요?”

구양수가 하얀 천을 들어 구연강의 피눈물을 닦았다.

구연강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조개량의 독에 당하고 천살의 공격에 죽을 뻔했다.

돌연 날아온 구양수의 비도에 천살이 흔들렸고 간신히 그의 목을 칠 수 있었다.

황급히 도망친 조개량을 쫓으려 할 때 구양수가 막고 환약을 내밀었다.

“일단 해독을 하셔야죠.”

그걸 받아든 게 천추의 한을 남겼다.

약을 먹자마자 온몸이 마비되었다. 무슨 독인지 내력을 운기할 수가 없었다.

그 뒤 구양수는 시간에 맞춰 독약을 먹였다.

“이건 말이죠. 사천당가에서 특별히 구한 거랍니다. 아직 독의 이름도 정하지 않았더라고요.”

구양수는 아버지에게 독수를 쓰고도 태연하게 일러주었다.

“절대고수에게 특히 잘 듣는 독약이라고 해서 정말 거금을 들여 샀다니까요.”

구양수는 뻔뻔하게 종알종알 일러주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아버지를 어쩌려는 건 아니니까. 저를 그렇게 패륜아 취급하시면 곤란하죠. 아들 대우를 해 주신 적도 별로 없으면서 이제 와서 그런 눈으로 보시면 서운하죠.”

구양수는 독약에 마비된 그를 마차에 싣고 신무와 참룡대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천무방으로 가는 중이다.

정신을 차린 구연강은 대체 자신의 둘째 아들이 왜 이러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평소 파락호처럼 살았기에 호통을 친 적이 있지만 이런 독수를 쓸 정도로 악한 놈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 눈빛을 알아챘는지 구양수가 물었다.

“궁금하세요?”

구양수가 이불을 여며 주며 말했다.

“아버지는 너무 오래 고생하셨어요.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잖아요. 네 나이에 천무방을 맡아서 지금까지 분골쇄신하셨다고.”

구양수가 혀를 찼다.

“왜 그리 힘들 게 사셨어요? 강호일통이 뭐라고. 그러니 아들 된 도리로 이제 좀 쉬시는 게 낫겠다 싶어 그러는 거니까 이해하세요.”

구양수가 말하다 말고 구연강의 볼을 쥐어뜯었다.

“서운한 게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거 아세요? 제 생각에 어머니는 아무래도 마씨 그 여자가 수작을 부려 돌아가신 거 같아요. 아버지도 알고 있었지요?”

구양수의 독백이 나지막이 이어졌다.

며칠을 마차에 있다 보니 그도 지루해진 모양이다.

“사실 생각 같아서는 진즉 마씨하고 양운이를 어머니께 보내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어쩌겠어요? 이런, 그렇게 부릅뜨고 노려보면 제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어지간하면 눈 좀 감으시죠.”

구양수의 말에 정말 구연강이 눈을 감았다. 눈에서 흐르는 분루도 이제 그쳤다.

모든 걸 포기한 듯했다.

“모르셨다고 해도 이제 와서 달라질 건 없죠. 하지만 양운이를 후계자로 삼으려던 건 정말 옳지 않은 생각이셨어요.”

“아버지는 모르셨겠지만 그놈은 정말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그놈이 천무방주가 되면 우리 형제의 목숨은 그날로 끊어졌을 거예요. 아버지도 아셨죠? 그놈이 그럴 거라는 거.”

“저는 구씨 집안의 법도를 지키려고 이러는 거예요. 후계는 장손인 형님이 이어야죠. 그 당연한 걸 거스르려니 이런 사달이 일어나는 거죠.”

“형님은 아버지보다 훨씬 훌륭한 방주가 될 거예요. 내기해도 좋아요.”

구양수는 뭐가 좋은지 키득키득 웃었다.

“형님은 말이죠. 우리 구씨 집안에 없는 덕이 있어요. 신기하게도. 정말 별종이죠? 크크크.”

“앞으로의 일을 말씀드리죠. 형님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는 버티셔야 돼요. 형님이 천무방주가 되는 것까지는 보고 가셔야죠.”

구양수의 독백은 계속 이어졌다. 한 번 터진 둑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아, 양운이가 죽었으니 어차피 형님에게 넘길 거였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그전에 천무방 쪽박 찰 뻔했다고요.”

“조개량 그놈은 정말 음험한 놈이지요. 그놈이 양운에게 후계를 넘기라고 한 거 다 알아요. 그래놓고 제 맘대로 하려고 했겠지요. 사실 양운이 그놈이 아버지 생각만치 똑똑한 놈이 아니었어요. 조개량이 다 꾸민 거지. 그러니 아쉬워 마세요.”

구연강은 몸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구양수의 말에 지난 정황이 확연히 떠올랐다.

전처의 돌연한 죽음 그리고 조개량이 구양운의 능력을 자주 칭찬하던 것까지.

조개량은 늘 구양조가 우유부단하다고 말했다.

“…!”

구연강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왜 자신을 제압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 밤에 구양수가 하는 말을 들었다.

구양수가 회한에 잠겨 독백하듯 하는 말을 듣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강호일통을 위해 달리다 자신이 놓친 것들,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간 것들이 회한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둘째 아들 구양수가 이리 심계가 깊은 놈이라는 걸 몰랐다는 게 뼈아프게 다가왔다.

진작 알았더라면 조개량을 군사로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 밤.

한때 천하사패로 군림하던 천무방주 구연강을 태운 마차는 하남에서 호북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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