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초연은 일부러 도발을 했다.
자신의 행적을 캤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이다.
강소군과 같이 입이 무거운 자들에게는 이런 식의 접근이 더 많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물론 위험도 따랐다. 상대는 고수이니 한순간에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초연은 강소군에게서 받은 느낌이 있다. 함부로 사람을 해치는 자는 아니었다.
초연은 그걸 믿고 도박을 한 것이다.
그런데 강소군의 반응은 의외였다.
“….”
말없이 그저 어둠이 내린 마당만 바라볼 뿐이다.
‘뭐가 있나?’
초연이 강소군의 시선을 따라 마당을 살폈으나 고요한 어둠만 흐를 뿐이다.
초연은 정적을 깰 수가 없었다. 숨조차 크게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제까지 쉴 새 없이 말을 했는데 갑작스레 한 마디도 하기 어려웠다.
강소군은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관조하며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초연은 그런 사실을 모르니 기나긴 침묵이 버거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감정을 가라앉힌 강소군이 초연을 바라봤다.
초연은 움찔, 하였다.
강소군의 눈은 수많은 이들을 접한 그녀도 처음 보는 아주 이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오문의 문주는 어떤 사람이지?”
절대 알려 줄 수 없는 걸 묻는다.
초연은 자신의 도박이 실패했음을 느꼈다.
자신은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초연이 잠시 망설이다 한숨을 쉬었다.
“알려드릴 수 없는 걸 묻는 건 무슨 뜻이죠?”
말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떨렸다.
“만날 수 있나?”
물론 하오문주 낙서생도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낙서생을 만난다. 다만 그가 하오문주임을 모를 뿐이다.
그 둘은 절대 조합이 되어 만날 수 없다.
“하오문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몇 안 되지요. 드러나는 순간 온 강호의 표적이 되니까요.”
완곡한 거절이었다.
차분하게 대답을 하면서도 초연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가 나를 인질로 삼아서 문주를 유인한다?’
‘아니면 나를 죽여 복수를 하게 만든다?’
온갖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녀가 살아온 무림은… 특히, 하오문은 그랬다.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파는 사람을 수없이 보았다.
목적을 위해 서슴지 않고 살인을 하고 납치를 하는 곳이다.
그런데.
강소군이 의외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초연은 강소군이 강호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희망의 빛을 보았다. 강소군은 정말 하오문주를 만나려 했던 것이다.
자신을 죽일 빌미를 삼기 위함이 아니라는 걸 알자 초연의 목소리가 좀 더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저를 만난 건 하오문주를 만난 것과 다름없답니다.”
강소군이 다시 초연을 보았다.
“하오문주를 믿나?”
너무나 순진한 질문이다.
“믿냐고요?”
초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낙서생은 고아로 기루에 팔린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다.
무공과 온갖 권모술수와 지식을 전수해 주었으니 사부나 마찬가지다.
“믿지 않고 어떻게 그를 따르겠어요.”
“하오문주도 그대를 믿나?”
이번에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적어도 낙서생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었으니까.
대체 왜 이런 것을 묻는지 의도를 알 수 없다.
“천황성에 대한 이야기를 문주에게 한 모양이로군.”
그게 뭐 어때서?
초연이 묻는 의도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강소군이 그런 그녀를 유심히 보다 말했다.
“문주가 천황성에 대해 알아보라 했으니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초연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맞아요. 문주님 지시사항이니 소홀히 할 수가 없지요.”
초연은 몰랐지만 강소군은 그 대답을 통해서 하오문이 천황성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주와 초연의 관계, 그리고 문주의 지시사항.
초연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겼기에 무심코 넘어갔지만 강소군에게는 무척 중요한 사실이었다.
천황성의 세력은 조정과 상계, 무림 등 곳곳에 퍼져 있다고 했다.
하오문주가 천황성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의 다음 행보와도 관련이 있을 테니까.
“적어도 하오문주는 천황성 사람이 아닌 모양이지? 하지만 하오문도는 중원 전역에 흩어져 있다고 들었지. 그들 가운데 천황성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
그제야 초연은 강소군의 질문이 의도한 바를 깨달았다.
동시에 마지막 질문이 그녀의 뇌리를 울렸다.
어쩌면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약한 곳이 하오문일 것이다.
어쩌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군상들.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과 혜택을 준다고 해서 목숨의 위협을 감수한 충성까지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들로부터 오는 정보도 무작정 믿지 않는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흘려 정보의 혼선을 빚게 할 우려는 늘 존재한다.
하오문은 수많은 이들로부터 들어온 낱낱의 정보를 교차하여 확인한다.
“무슨 뜻인지 알겠군요. 그렇다면 자신할 수는 없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하지만….”
초연이 강소군이 의도한 바가 천황성과 하오문의 관계를 묻는 것임을 깨닫고 말을 이었다.
“적어도 저와 문주님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는 있지요.”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의뢰를 하나 하지. 천황성에 대해 조사를 해 줘야겠어.”
“….”
“다만 지금 진행하는 천황성에 대한 조사는 형식적으로 진행하다 적당한 시점에서 멈춰. 그리고 문주와 그대 둘이서만 따로 알아봐야 할 것이야. 죽기 싫다면.”
초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강소군은 하오문에 이미 천황성의 세력이 들어와 있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초연은 강소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는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라는 뜻이군요.”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대고수 백 대협이 당했다고 본인이 말하지 않았나? 봉황수. 그자부터 추적해야 할 거야.”
***
대정무각 경성 안가.
대청에 백정무의 관이 놓여 있었다. 앞에 놓인 향로에 수북한 향이 타올랐다.
대정무각은 기습을 받아 난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백정무의 관은 사수하여 안가까지 끌고 왔다.
관 앞에는 대정무각의 수뇌부가 모두 모였다.
하나같이 성한 몰골이 아니다. 대약무검 관중은 내상까지 입었는지 안색이 창백하였다.
노이칠은 왼팔에 붕대를 두르고 어깨에 걸었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옷이 찢기고 피가 배었다.
덩치가 곰 같은 대한이 분노를 터뜨렸다.
“나는 그럴 수 없소. 대형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꼬리를 말고 숨자니! 이게 될 말이오!”
일도붕산 고대웅.
대정무각의 사각주인 그는 이각주 관중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발하였다.
그가 누구보다 존경했던 백정무다. 그 백정무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관에 누워 있다는 사실에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봉황수가 있다면 발기발기 찢어 죽였을 것이다.
“고 형님의 뜻은 압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대형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합니다.”
상관청유가 관중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적은 밝은 곳에 있고 우리는 노출됐습니다. 지난 십여 년 그들을 추적했지만 아직 꼬리조차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정확히 우리의 허점을 알고 고수를 보냈고 기습까지 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의 움직임이 적의 손바닥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이대로 잠적하는 것도 최선은 아닐 것 같소만.”
유문광이 상관청유의 말에 꼬리를 달았다.
“이번 기습에 많은 무인들이 희생당했습니다. 힘을 길러야지요.”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힘만 기른다고 되겠습니까? 대정무각을 이만큼 키우는 데도 수년이 걸렸는데 한순간에 이리되고 말았잖습니까?”
노이칠이 퉁명스레 말했다.
“다시 시작해야지. 적어도 이번에는 그들의 일원이 누군지 알지 않았나.”
상관청유가 달래듯 말했다.
“봉황수, 그리고 우리를 암습한 자들. 그들이 허깨비가 아닌 이상 분명 자취를 남겼을 거네. 그걸 추적하다 보면 결국은 몸통이 나올 걸세.”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여 몸통을 발견하였다 치세. 봉황수와 같은 고수를 부리는 조직이네. 이를 감당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어쨌든 나는 그냥 있을 수 없어. 봉황수, 그놈을 찾아갈 걸세.”
고대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경성 안가를 지키느라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했다. 그게 더 분했다.
“그래야 할 겁니다. 지금 바깥에는 적의 기습으로 대정무각이 붕괴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뭐라? 우리가 고작 그런 놈들에게 궤멸당했다고?”
고대웅이 눈알을 부라렸다.
“그렇게 소문이 났다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퍼뜨렸지요.”
“왜?”
“허허실실. 이제 대정무각은 붕괴되고 수뇌부도 간신히 살아 도주했습니다. 그중 살아남은 몇몇이 백 대형의 원수를 쫓는 건 당연한 일이죠.”
상관청유가 고대웅을 보며 말했다.
“고 형님이 봉황수를 쫓으십시오. 그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중상을 핑계로 잠적하는 겁니다. 신분을 감추고 우리 역시 암중에서 적을 쫓는 거지요.”
“제기랄! 두더지 잡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고대웅이 화를 냈으나 사실 이각주 관중이 뜻을 굳힌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관중이 말했다.
“백 대형의 장례를 치르고 각자 맡을 임무를 말해 주겠네. 오은 이만 파하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바깥에서 잠시 소란이 있었다.
“웬 놈이냐?”
“아, 이분은… 적이 아닙니다.”
신분을 묻는 무인의 소리에 연화심이 대신 나서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강 공자!”
노이칠이 강소군을 알아보았다.
강소군은 천천히 걸어왔다.
안가를 지키는 대정무각 무사들은 사각주 휘하로 강소군을 몰랐다. 그러기에 경계를 풀지 않고 따라왔다.
강소군이 마당에서 잠시 멈춰 읍을 하고는 말했다.
“백 대협의 영전에 향을 올리고자 왔습니다.”
강소군은 다시 대청으로 올라 백정무의 관 앞까지 가더니 향을 피워 향로에 꽂았다.
강소군이 망자에 대한 예를 다하고 대정무각의 각주들에게도 예를 취했다.
관중은 강소군을 처음 보았으나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강 국공의 후계자라고 들었네. 백 대형과는 안면이 있었나?”
관중은 물론이고 다른 각주들도 백정무와 강소군이 만난 사실을 몰랐다. 그건 상관청유만 알고 있었다.
“일전에 뵌 적이 있지요.”
강소군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와 줘서 고맙군.”
관중이 예를 취하고는 노이칠을 향해 말했다.
“노 각주가 친분이 있다고 했지? 자네가 주인의 도리를 해 주게.”
관중이 다른 각주들에게 말했다.
“좀 쉬게. 적이 다시 올지 모르네.”
빈소는 동약사가 지키기로 하고 각주들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노이칠이 강소군을 객청으로 안내했다.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면목이 없군.”
노이칠이 겸연쩍어하였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요.”
강소군이 말했다.
노이칠이 약간 놀란 듯 강소군을 쳐다보았다.
잠시 강소군을 살핀 노이칠이 말했다.
“위로의 말도 할 줄 알고. 사람이 바뀐 것 같군.”
노이칠은 강소군이 혈룡기에 매여 있을 때 함께했었다.
그 당시 강소군은 말이 없었다. 필요한 말도 하지 않아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강소군이 씁쓸하게 웃었다.
“찾아온 이유가 뭔가?”
노이칠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강소군이 정말 상가집 분향을 위해 온 것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봉황수가 천황성에서 온 자라는 게 확실합니까?”
천황성이라는 말에 노이칠이 흠칫하였다.
“그걸 자네가 어찌 아나?”
“백 각주님을 뵈었을 때 말씀해 주셨지요?”
“왜 그런 말을 자네에게 했지?”
노이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 국공이 대정비각주이고 천황성을 쫓는 조직을 운영했다는 건 백정무와 관중, 그리고 상관청유만 안다.
노이칠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함께하자는 뜻을 비치셨지요.”
“그렇군.”
노이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소군과 같은 절대고수의 조력을 받는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찾아온 뜻은?”
“강호라는 곳으로 나가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