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형님은 왜 군에 오신 거요?”
피칠을 한 마운산이 뜬금없이 물었다.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황량한 들판에 누워 숨을 돌릴 때였다.
“그딴 건 왜 물어?”
“나는 벼 두 섬을 준다고 해서 왔지. 그거면 우리 가족이 봄은 나니까.”
“….”
“근데 형님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왜 군에 와서 이런 지경에 이른 건가 궁금해서.”
어둠 속에서 마운산의 하얀 이가 보였던 것 같다.
“….”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인 황제는 자신의 휘하로 오라고 했는데 동북변방군으로 자원하였다.
동북변방군은 열악했다. 편제도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창 한 자루 들고 홑옷을 겹겹이 껴입고 전장으로 나갔다.
당시 주 전선은 서북변방이었고 조정에서도 그쪽에만 관심을 두었다.
“모르겠다.”
솔직히 그때는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변방 이민족은 강했고 제대로 지원받지 않은 군은 목숨으로 대신 막아야 했다.
벼 두 섬에 팔려온 농민의 자식들은 가을 논에 묶어 놓은 볏더미가 바람에 쓰러지듯 무더기로 쓰러져 갔다.
전쟁이 끝나면 돌아가서 전답을 일구리라던 그들은 메마른 대지에 묻혔다.
그들의 무덤에 한 송이 꽃도 피어나지 않았다.
-쪼르륵.
강소군이 술을 따랐다. 주향이 습기찬 여름밤 속으로 퍼져 나갔다.
벌써 두 병이 넘었다. 이제는 술이 넘어가는 느낌이 밋밋하다.
객청 앞마당은 종일 내린 비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깊은 밤이다.
벌레 울음소리조차 끊어져 이상스레 고요하였다.
강소군은 오늘 죽은 한왕군들을 생각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산동 출신들이었다.
도룡회 무인들도 산동이니 따지고 보면 동향이다. 이웃마을 사람끼리 죽이고 죽였던 것이다.
염기창의 죽음은 강소군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안겨 주었다.
그건 그가 최근 들어 심마에 접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뭔가를 놓친 찜찜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권문세가에서 자랐다. 모르는 사람들은 권력과 부를 부러워했지만 권문세가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제가 바뀌는 정변까지 치렀다.
권력과 부를 놓고 서로 물고 뜯기 바빴다. 먼저 치지 않으면 일가족이 몰살당하기 일쑤였다.
어제 웃으며 술 마신 자를 오늘 모른 척해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강소군은 태후전에서, 그리고 집안에서 오가는 은밀한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자라며 자연 삶은 치열하게 싸워 적의 시신을 밟고 살아가는 것이란 생각을 해 왔다.
그렇지 못한 자는 죽었으니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결국은 당했으니까.
그런 그의 생각이 흔들리고 있다.
아니,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강소군이 다시 술을 따른 뒤 잔을 드는데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이 집안에 성한 사람은 그뿐이다.
강소군이 나가서 문을 열자 사인교가 서 있다.
“…?”
휘장이 걷히고 한 여인이 내렸다.
초연이었다.
“어쩌다 보니 한밤중에 찾아왔네요.”
“무슨 일이지?”
“사람을 세워둘 건가요?”
초연이 웃으며 말했다. 하얀 얼굴이 어둠 속에서 유난히 빛을 발했다.
강소군이 초연을 안으로 들였다.
객청에는 방금 전까지 그가 마시던 술이 놓여 있었다.
“적적하시면 명화루로 오시지 그러셨어요.”
초연이 술병을 보고 말했다.
“아, 하긴. 요즘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긴 하죠.”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초연이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대정무각이 당했다더군요.”
“대정무각이?”
강소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대정무각으로 간다고 남겨 놓은 연화심의 서찰이 떠올랐다.
“백정무 일각주가 오늘 낮에 봉황수에게 당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초저녁에 알 수 없는 세력이 주둔지를 기습했지요.”
강소군이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백 각주가? 봉황수?”
강소군은 일전에 만났던 백정무가 떠올랐다. 세상에 그를 쓰러뜨릴 사람이 있을까 싶은 무인이었다.
“봉황수….”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이지요.”
초연이 말을 이었다.
“대정무각을 기습한 이들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의 복면인들이었습니다. 그 수가 무려 천여 명이 넘었는데 무척 잘 훈련된 무인들이었다더군요.”
들을수록 놀라운 이야기다.
강소군은 노이칠과 중랑, 연화심에 생각이 미쳤다.
“피해가 컸나?”
“거의 궤멸 수준이라고 알려지긴 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닐 겁니다. 수뇌부 대부분은 빠져나왔다더군요. 관중 이각주가 부상을 좀 입었다고만 알려졌지요.”
초연이 말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강소군이 차분함을 되찾았다.
이미 상황은 끝이 났다. 어떤 일이 벌어졌든 그로서는 받아들이는 것만 남았다.
강소군은 천황성이 떠올랐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초연이 말했다.
“천황성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으셨죠?”
“그걸 기억하고 있었군.”
“강호를 모르는 분이 유독 그 문파를 물어보니 특이했지요.”
“대정무각을 습격한 이들이 천황성인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정보로는 당금 강호에 대정무각과 전면전을 벌일 세력을 찾기가 어렵더군요. 문득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천황성이 생각나 여쭤본 겁니다.”
초연은 낙서생의 명을 받고 천황성에 대해 알아봤으나 진척이 없었다.
과연 실재하는지조차 의심이 가던 차에 대정무각이 당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당금 강호에 대정무각을 칠 만한 세력이 얼마나 될까요?”
초연이 자문자답하였다.
“강호 대파 가운데 억지로 끌어다 맞추자면 소림? 무당? 화산 정도나 가능할까요?”
“….”
“오대세가 중에서는 남궁세가와 사천당가 가주가 미쳤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초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러겠어요. 산속에서 선도를 닦는 이들이 세속 문파와 결전을 벌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죠. 남궁세가나 사천당가 가주도 멀쩡한 사람들이고요.”
초연이 강소군을 보며 말했다.
“그러다 보니 공자님 말씀이 자연스레 떠오르더군요.”
“고작 한마디 물어본 걸로?”
“혈마께서 물어보신 문파니까요.”
강소군은 하오문에게 사실을 일러줄 생각이 없었다.
황제가 협박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천하에 있는 패자들이 딴생각을 품을 수 있다.
“문파 명칭이 이상해서 물어본 것일 뿐이야.”
초연이 내심 웃었다.
‘참, 어수룩한 분이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강소군은 방금 들은 소식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니 건성으로 대답했다.
초연 같은 여우가 넘어갈 리가 없었다. 어찌됐든 상대가 알려 주지 않는 이상 억지로 입을 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비장의 수가 있었다.
“얼마 전 퇴직한 늙은 내관의 집이 폭발한 적이 있었지요.”
“…?”
“자식도 없어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를 사람이 없었는데 윤지평이라는 퇴직관리가 나서더군요. 한때 가까이 지냈다나.”
경성의 민가에서 화약이 터졌으니 관에서도 조사를 한 사건이다.
유야무야 끝난 사건인데 하오문도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원래 조정의 일에는 간여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안마당에서 벌어진 일을 지나칠 수는 없었지요. 사실 기루를 찾는 관리들 중에는 이런저런 소문 듣기를 좋아하는 분들도 꽤 되거든요. 그래서 윤지평이란 관리에게 이목을 붙여 두었지요.”
“호기심이 많군.”
“그러니까 이 일을 하는 거죠.”
“근데 별게 없더라는 말이죠. 그냥 그렇게 끝나고 만 사건이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야 윤지평의 집에 강 공자께서 다녀가신 걸 알았지 뭐예요.”
초연은 강소군이 명화루를 다녀간 뒤 그에 관한 정보를 모두 수집했다. 그러던 차에 하오문이 감시하고 있던 윤지평 집을 강소군이 다녀갔다는 보고를 찾아냈다.
“내 뒤를 캤나?”
“아니죠. 정확히는 우리가 감시하고 있는 집에 강 공자께서 다녀가신 거죠. 마차까지 끌고 당당히 오가셨는데 모르면 곤란하지요.”
초연이 정정하였다. 하오문의 얼굴 노릇을 한다더니 정말 대담한 여자였다.
“중요한 사실은 그 윤지평이란 자가 죽었다는 거예요.”
강소군의 눈썹이 자기도 모르게 꿈틀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강하를 시켜 윤지평의 동태를 수시로 살피던 차였다.
그런데 소리 소문도 없이 죽다니.
“죽었다고?”
“그게….”
초연이 말을 끊고는 술을 따르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면서 슬쩍 강소군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뭔가 있었군.’
초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람 죽고 사는 거 정말 별것 아니더라고요. 홀로 산책 나갔다가 독사에 물려 죽었다더군요.”
“독사?”
강소군은 뜻밖의 말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올 때가 지나서 하인들이 찾아 나섰는데 대나무 숲에 쓰러져 있었답니다. 발목과 손에는 청죽사(靑竹蛇)에게 물린 자국이 있었고요.”
“그렇다고 그리 죽나?”
“청죽사 독이 독하긴 하지요. 아마 발목을 물린 뒤 잡으려다 손도 물린 거겠지요. 그래서 순식간에 독이 퍼져서….”
초연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강소군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참 이상하지요?”
“…?”
“제가 그 사람 죽은 경위와 뱀에 물린 부위까지 어찌 이리 소상히 알고 있을까요?”
듣기에 따라 정말 바보같은 질문이다. 그러나 초연이 그렇게 묻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고사라는 걸 알리려는 의지가 담겼다?’
초연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사고사로 위장하려는 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 죽였거나, 아니면 스스로 죽었거나?
강소군이 시선을 돌려 마당을 보았다.
‘자살?’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천황성이 손을 썼다면 아들까지 죽였을 것이다.
황궁 내관과 늙은 내관까지 철저히 지워 버림으로써 꼬리를 확실히 잘라냈다.
그런 천황성이다. 강소군이 꼬리 잡은 걸 알았다면 같은 수법으로 윤지평의 온 가족을 지워 버렸을 것이다.
“윤가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지요. 며칠 뒤에 그 아들이 아버지 묘자리를 알아본다고 산으로 올라갔다가 절벽에서 실족사했더라고요.”
강소군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찾아갔을 때 만났던 부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두 사람이 강소군을 만났다는 사실을 묻어 두고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두 부자가 사고사로 위장하여 죽었다.’
모르는 남이다. 아니, 천황성이 조정에 심은 첩자이니 그가 잡아야 할 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그렇게 죽었다는 말에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고 있던 강소군의 마음 깊은 구석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졌다.
열여섯에 군문에 든 이후 강소군에게 감정이란 사치였다. 그렇게 십여 년을 살아왔다.
그 대부분을 핏빛 독기에 의한 분노가 지배했다. 이를 극복한 뒤 텅 빈 그의 가슴에 다시금 감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변화였으나 강소군에게는 극히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마음이 가는 곳에 기가 간다.
그렇기에 고수가 될수록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련을 한다.
태산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는 굳건한 평정심이 있을 때 비로소 막강한 기운 또한 제대로 쓸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오히려 스스로를 해치는 독이 된다. 단지 정신만이 아니라 육체 또한 망가질 수 있다.
분노라는 감정이 나간 뒤 텅 비었던 그의 마음에 어린 소녀의 처연한 눈빛이 흔들어 놓았다.
연화심에 의해 잠시 가라앉았으나 계속된 죽음과 그들의 감정을 느끼면서 점차 강소군은 그도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와 함께 그의 금룡기도 영향을 받았으나 그런 사실을 자신조차 몰랐다.
초연 역시 강소군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추적을 해 봤지요. 그랬더니 퇴직한 내관에 이어 황궁의 현직 내관이 죽은 일까지 연결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