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17화 (117/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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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릴 새도 없었다.

조운룡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신이 먼저 한왕군 수뇌부를 향해 달려들었다.

화룡도에서 붉은 기운이 번뜩이며 붉은 용이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뒤를 십이도객과 백대도수가 따랐다.

“막, 막아라!”

증화보가 다급하게 외쳤다.

한왕의 장수들이 창과 도, 검을 꼬나들고 달려나갔다.

“회주님의 원한을 갚자!”

도룡회 무인들도 물러설 수 없는 판임을 깨닫고 일제히 한왕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록 수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전력이었으나 모두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이었다. 초반 기세가 사나워 한왕군은 사정없이 밀렸다.

한왕군은 폭우 속에서 황군과 싸우다 쉬지도 못하고 다시 강소군과 싸워야 했다.

게다가 한왕은 피신하고 장수들의 기세는 꺾였으니 사기가 뚝 떨어졌다.

그러나 대군은 역시 대군이었다.

“후퇴하여 진을 편성하라!”

증화보가 지휘하자 차츰 진을 갖추고 도룡회 무인들을 압박하였다.

도룡회 무인들도 만만치 않았다. 문파는 서로 달랐지만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왔다.

게다가 황궁 침투를 위해 군진을 깨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한 무인들이다.

다수의 한왕군이 옥죄어 와도 밀리지 않았다.

폭우 속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한왕, 어딨느냐? 나와라!”

조운룡의 고함이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강소군이 있는 쪽은 한왕군이 오지 않았다.

강소군의 무위를 아는데 일부러 죽을 길을 택하는 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강소군은 도룡회와 한왕군의 격전을 보다 강하와 장영영을 살폈다.

모두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중상을 입었다. 장오는 생명이 위중했다.

“장 아저씨!”

강하와 강란이 장오를 부축하였다.

“이제 됐습니다. 저도 장 장군부에 한몫을 한 셈이니 저승에서 떳떳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군요.”

강하의 품에서 장오가 띄엄띄엄 말했다.

“정신 차려요!”

강하가 자꾸만 눈을 감으려는 장오를 깨우려는데 장영영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일단 요상환을 먹여요.”

장영영이 품에서 환약을 꺼내 장오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고는 강하와 강란을 비롯해 도룡회 무인들에게도 나눠 주었다.

장영영은 백련교 불모에게서 약간의 의술을 배워 요상환을 제조할 줄 알았다.

“당신도….”

장영영이 환약을 내밀자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더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오.”

강소군이 시선을 돌려 전황을 살폈다.

도룡회 무인들은 서로 뭉쳐 단단한 기세로 다수의 한왕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앞쪽에서는 조운룡을 비롯한 도룡회 장로들이 한왕군의 장수들과 상대하는 중이었다.

도룡회 무인 하나가 비칠거리며 일어나 도를 들었다.

싸움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강소군이 그를 보고 말했다.

“굳이 갈 필요 없을 것이네.”

강소군의 시선이 한왕군의 뒤쪽으로 향했다.

-둥! 둥!

“와아!”

북소리와 함께 거대한 함성이 빗속에서 울려 퍼졌다.

사방에서 황군이 함성을 지르며 한왕군을 향해 달려왔다.

한왕군에서 반 시진이 넘도록 싸움이 벌어졌는데 황군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황제는 관중으로부터 한왕군과 도룡회 사이에 내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왕군의 본진이 흔들리고 있다는 말에 기회라고 여겨 해가 저물고 비까지 오는 악천후이지만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일단 퇴각한다. 후군까지 물린다.”

한왕군이 빠르게 퇴각하였다.

황군은 패퇴하는 한왕군을 끝까지 쫓았다. 하지만 도룡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조운룡만 한왕을 찾았으나 이미 후군으로 간 지 오래였다.

***

-쾅!

심복 홍의발의 보고를 듣던 조개량이 책상을 내리쳤다.

요즘 되는 일이 없다.

“염기창이 그런 수를 쓰다니!”

홍의발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화룡문 문주 조운룡이 염기창의 유지를 받들어 도룡회를 해산해 버렸다고 합니다.”

“해산? 도룡회가 해산했다고?”

조개량의 눈빛이 번뜩였다.

“염기창이 죽기 전에 조운룡과 장로들에게 그렇게 밀명을 남겼다더군요.”

한왕군과 일전을 벌인 뒤 도룡회 각 문파는 사방으로 흩어져 독자 생존의 길로 나섰다.

그건 염기창의 뜻이었다.

화룡도 조운룡만 눈에 불을 켜고 한왕을 잡으려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되는 수도 있나?”

조개량이 허탈해하였다. 대정무각과 도룡회가 양패구상하기를 기다렸는데 무산되고 말았다.

지금 십이지대와 천황성에서 파견 나온 고수들이 대기 중이다. 그런데 허탕을 쳤다고 삼태상에게 보고해야 할 판이다.

홍의발이 주저하다 말했다.

“차라리 잘된 셈이 아닐까요? 대정무각만 쓸어버리면 천하사패는 사라지는 셈이 되는 겁니다.”

‘가만! 의발의 말이 맞구나!’

조개량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머리를 굴렸다.

도룡회는 주씨 가문에 대한 복수심으로 여러 문파가 한시적으로 모였던 곳이다.

각 파가 천하로 흩어졌으니 이제 위협이 되지 않는다.

구연강이 중상을 입고 십이지대가 빠진 천무방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다시 호북의 패자 정도로 내려앉은 것이다.

대정무각만 해치우면 천하사패의 시대가 끝나고 만다.

“그렇군. 백정무가 없으니 대정무각과 정면 승부도 가능해.”

조개량이 명을 내렸다.

“바로 대정무각을 친다!”

황군은 한왕군이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몰아치고 있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황군이 회군하기라도 하면 공염불이 되고 만다.

대정무각은 백정무의 상을 치르는 중이다.

아무리 적이라도 상중에 기습을 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하지만 다급한 조개량에게는 보이는 게 없었다.

***

기나긴 하루가 끝나고 어둠이 내릴 무렵에야 비가 그쳤다.

대정무각의 지휘소는 백정무의 빈소가 되었다.

환하게 불을 켠 빈소에 대정무각의 무인들이 줄지어 분향을 하였다.

도룡회의 해산 소식은 이미 들어와 있다. 대정무각은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였으나 일각주의 죽음에 분위기는 침통하였다.

유문광은 중랑과 연화심이 찾아오자 자신의 막사로 데려갔다.

유문광 또한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유문광이 중랑과 연화심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백 대형을 처음 만났을 때 그러더군. 백성을 위해 검을 써 보지 않겠냐고.”

유문광은 자신의 잔을 들어 훌쩍 마시고는 말했다.

“무림인이 백성을 위한다는 말이 참 희한했지. 의협은 들어 봤어도 만인을 걱정하는 군주 같은 무인은 처음 봤거든.”

“그게 대정무각의 시작이었군요.”

연화심이 위로하듯 말했다.

“진정한 협사였지.”

유문광이 눈을 감았다. 감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원래 무인답지 않게 감정이 풍부한 유문광이다.

“봉황수라는 자는 대체 어디서 뚝 떨어진 사람입니까?”

중랑이 물었다.

“천황성!”

유문광의 눈을 뜨며 말했다. 눈에서 결연한 빛이 흘러나왔다.

“천하를 농단하는 세력이지. 그들의 주구일 뿐이야. 그놈은.”

“천황성?”

중랑은 처음 듣는 방파였다.

유문광은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아는 바가 많지 않으니 말해 줄 것도 없었다.

그때, 사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성이 들렸다.

반여월이 황급히 뛰어들었다.

“적이야!”

유문광이 다급히 검을 잡으며 소리쳤다.

“도룡회?”

“아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에요.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어요.”

반여월이 외치다 말고 허리에 찬 채대를 바깥으로 날렸다.

“벌써 여기까지?”

유문광의 막사는 주둔지 중심에 있다. 여기까지 적이 왔다는 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뜻이다.

유문광이 바로 튀어나갔다. 중랑과 연화심도 검을 뽑아 나섰다.

-쨍!

-채챙!

어둠 속 여기저기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디서 이리 많은 놈들이 나타난 거야?”

유문광이 마침 달려오는 노이칠을 향해 소리쳤다.

“모르겠소. 한 놈 한 놈 무공이 고강하니 조심하시오.”

노이칠이 자신의 수하들이 있는 곳으로 신형을 솟구치며 말했다.

“이 새끼들, 지독해!”

흑의를 입은 복면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대정무각의 무인에 버금갔다.

천하사패 중 무인의 수로만 따지면 인원이 가장 적은 곳이 대정무각이었다.

백정무를 비롯한 십각주의 무공이 뛰어나고 무인들 또한 도룡회나 천무방에 비해 한 수 위였기에 다른 삼패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쳐들어온 흑의 복면인들은 하나같이 대정무각의 무인들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한 수 위였다.

게다가 그 수도 많았다.

‘대체 어떤 세력이 이 많은 고수들을 길러낸 거지?’

중랑은 의문이었으나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 앞에도 흑의 복면인들이 나타나 검을 찔러 왔던 것이다.

“오라버니, 조심해요!”

연화심이 흑의 복면인들의 검을 걷어내며 소리쳤다.

-파파팍!

중랑의 검이 직선을 그리며 흑의 복면인들을 향해 떨어졌다.

-쉬쉬쉭!

흑의 복면인 세 명이 한꺼번에 검을 내밀어 중랑의 검을 막았다.

미리 말이라도 맞춘 듯 정교하기 짝이 없었다.

‘철저히 훈련된 자들이다!’

중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은 다수의 유리함을 이용해 둘 셋씩 짝지어 대정무각의 무인들을 해치워 나갔다.

무인 간의 대결이 아니라 전쟁터에서나 쓰는 수법이었다.

“크윽!”

곳곳에서 비명성이 터졌는데 대부분 대정무각 무인들이었다.

“웬 놈들이냐!”

흑의 복면인들이 백정무의 빈소까지 쳐들어오자 관중이 대검을 들고 나왔다.

“크크크. 그걸 물어 뭐하나?”

흑의 복면인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그 역시 복면을 하였으나 다른 흑의인과 달리 기세가 여유로웠다.

“대약무검인가? 네놈은 내 차지라더군.”

흑의 복면인이 검을 쳐들었다. 검은 묵빛이 도는 검에서 흉흉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

강소군의 집에서는 약 냄새가 가득 풍겼다.

장오는 간신히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다. 하지만 운신을 할 수가 없었다.

강하와 강란이나 장영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소군이 청해온 의원과 의동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러고도 살아 있다니….”

“아니, 움직이면 안 되오!”

의원은 강소군 일행이 살아 있는 게 용하다고 연신 혀를 내둘렀다.

강소군은 묵묵히 의원의 수발을 들었다.

강소군의 뇌리에는 염기창의 마지막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빗속에서 한왕의 천막으로 향하던 염기창이 강소군을 지나칠 때 속삭이듯 한마디 하였다.

‘그녀를 부탁하오.’

염기창은 무공에 재능이 높은 편이 아니라 화룡문주의 자리를 사제 조운룡에게 내줘야 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길은 영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조운룡은 염기창의 시신을 거두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항상 조용히 뒤에서만 지켜보던 대사형이었소. 그런데 왜 오늘은 앞장서서 죽을 길로 갔다는 말이오!”

고죽문주도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진정한 무인이었소. 고죽문은 염 회주의 위패를 조사와 함께 모실 것이오.”

그의 말에 각 문파의 수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문파도 그럴 것이오!”

“혼원문은 화룡문이 청하면 언제든지 달려올 것이오.”

강소군은 그들의 마음이 들여다보였다.

멸문하다시피 한 문파들.

따지자면 강소군의 외증조 할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고 모인 문파들이다.

그들은 복수의 일념으로 농민군의 자식들을 받아들여 문파를 키웠다.

한왕은 그들을 써먹기 위해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대업이 다가와 전쟁으로 내몰렸을 때 그들은 복수보다 안위를 택했다.

비난할 것도 비난받을 것도 없었다.

이미 세월은 흘러 세상은 바뀌었고 문파의 수장들은 문도들이 살아남아 문파를 융성하는 길을 택했을 뿐이다.

그게 인심이다.

그럼에도 무인으로서 대의명분을 버리지 못해 한왕의 요구를 떨치지 못하고 전쟁에 나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염기창은 자신을 사지로 넣는 대신 도룡회를 한왕부로부터 풀었다.

염기창이 살아 있다면 강소군은 묻고 싶었다.

‘대체 왜’

과연 목숨을 버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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