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16화 (116/250)

116

연화심은 초조했다.

거센 빗줄기를 바라보며 거실을 오락가락하였다.

장영영이 가더니 강소군과 염기창, 그리고 강씨 남매와 장오까지 모두 나갔다.

연화심은 중랑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남아야 했다.

“올 때가 됐는데.”

연화심이 대문을 쳐다보자 거짓말처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연화심이 달려 나가니 중랑이 서 있었다.

-푸드드.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말의 입에 하얀 거품이 물려 있다. 집에 돌아왔다는 걸 알기라도 한 듯 투레질을 하였다.

“무사히 다녀왔군요. 조 협은 만나셨나요?”

중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다가 한왕군의 진영으로 갔다. 아마 큰 싸움이 벌어질 게다.”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와는 상관없는 싸움이다. 그보다 대정무각에 큰 변고가 생겼다.”

“대정무각에 변고라니요?”

“일각주 백정무 대협이 세상을 떠났다.”

연화심이 크게 놀랐다. 십대고수 백정무가 세상을 떠나다니.

“봉황수란 자가 나타나 생사결을 벌였다더구나.”

“봉황수?”

연화심이 탄식하였다.

“세상에 고수는 정말 많군요. 한 번도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 사부님들이 백 각주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지요. 인간의 한계를 넘은 절대고수라 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화심과 중랑은 유문광과 반여월을 사부라고 불렀다. 정식 사제지간은 아니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부님들이 한왕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이런 변고가 생겼으니 크게 위축되었을 것이야. 가 봐야겠다.”

“어서 가요.”

그렇지 않아도 온종일 바깥소식을 궁금해하던 연화심이다.

바로 길을 나섰다.

***

쉬이익!

“크윽!”

창이 폭우를 가르고 번뜩일 때마다 붉은 피가 뿌려졌다. 핏물이 빗물과 섞여 땅바닥이 피범벅이다.

반 시진이 넘는 동안 백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다. 그러나 한왕군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앞줄의 군사들이 쓰러지면 그다음 줄의 군사들이 밀려나와 앞에 섰다.

자신들이 원하지 않았으나 뒤에서부터 밀어내니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서서 창과 도를 휘둘러야 했다.

한왕은 사라진 지 오래다. 팔목까지 침투한 독기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증화보가 대신 장수들을 지휘하였다.

강소군 일행은 수많은 군사들 사이에 섬처럼 자그마한 영역만 확보하고 있을 뿐이다.

“헉! 헉!”

장오는 힘에 부치는지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은 이가 빠지고 끝이 나갔다.

강하와 강란은 좀 나았으나 역시 여기저기 작은 부상을 입었다. 도룡회 무인들도 분전하였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나마 쓰러진 적이 일백이 넘도록 이쪽에서 사상자가 없는 건 강소군 덕이다.

강소군은 눈앞의 적을 상대하면서도 이쪽 편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벼락처럼 창을 내밀어 구하곤 하였다.

마치 뒤통수에 눈이 달린 듯했다. 그러다보니 강소군 앞의 적들은 잠시 목숨을 부지할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

증화보가 싸움을 지켜보며 이를 갈았다.

“궁수대가 왔습니다.”

장수 하나가 와서 보고하였다.

수백 명의 궁수대가 군사들 뒤편에 밀집대형으로 도열하였다.

“물러나라!”

한 장수가 외치자 한왕군이 썰물 빠지듯 뒤로 물러났다.

강소군 일행을 중심으로 십여 장 물러나는 순간.

-쉬쉬식.

수백 발의 화살이 폭우를 가르며 날아왔다.

거리가 멀지 않은 만큼 화살은 빠르고 강력했다.

강소군은 지체 없이 창을 크게 휘두르며 내력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파파팍!

수많은 화살들이 튕겨 나갔으나 모두 막을 수 없었다.

-텅! 터텅!

강하 등도 병장기를 들어 화살을 쳐냈지만 오랜 싸움으로 힘이 부쳐 동작이 빠르지 못했다.

“크윽!”

도룡회 무인 둘이 가슴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장오도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주저앉았다.

궁수대는 멈추지 않았다. 연달아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은 무자비하였다. 강소군이 걷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큭!”

이번에는 강하와 강란 남매도 무사하지 못했다. 강하는 왼쪽 어깨에, 강란은 옆구리에 화살을 맞았다.

장영영 역시 서너 발의 화살이 스치고 팔다리에 하나씩 화살이 꽂혀 피범벅이 됐다.

장오는 날아오는 화살을 손바닥으로 막았는데 얼마나 강력한지 관통하고 말았다.

전쟁에서 쓰는 대궁은 무림에서 쓰는 활과 비교할 바가 못 됐다.

지척거리에서 쏘아대니 맞기만 하면 관통하거나 깊숙이 박혔다.

화살을 막지 못한 도룡회 무인 하나가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강소군이 화살을 쳐내며 궁수대를 향하여 달려가자 한왕군들이 막아섰다.

한왕군들은 강소군과 나머지 일행 사이로 파고들어 분리하려고 하였다.

대부분이 화살을 맞은 지금 강소군마저 없으면 나머지 일행은 반각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강소군이 다시 몸을 빼내어 일행 앞으로 날아 떨어졌다.

“가세요. 당신이라도 살아야….”

장영영이 말하다 말고 주저앉았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적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주군께서만이라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강하도 자신의 어깨에 박힌 화살을 부러뜨리며 말했다.

말을 하는 와중에 강하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내상도 입은 모양이다.

강소군은 묵묵히 서서 한왕군의 궁수대를 보더니 창을 들었다.

-고오오!

갑자기 주위의 기운이 바뀌었다. 강소군을 중심으로 거대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형성됐다.

내리는 빗방울이 갑자기 느려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물러나라!”

한왕군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다시 물러나 궁수대들의 사로(射路)를 열어 주었다.

강소군이 손에 들린 창을 던졌다.

-쉭!

“미친놈! 창 한 자루로 뭘 하겠다고.”

멀찌감치 떨어져 보던 한왕의 장수들이 비웃었다.

놀랍게도 창은 서서히 날아갔다. 마치 사람이 손으로 잡고 달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떨어지지 않고 궁수대 앞까지 날아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쳐내라!”

느릿느릿 날아오는 창을 보자 궁수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크헉!”

앞에 있던 궁수 하나가 활대로 창을 쳐내려다 튕겨 나가고 말았다.

창에 실린 기운의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뒹군 것이다.

그제야 창에 담긴 내력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궁수대장의 안색이 변했다.

그 순간 창이 궁수대 한복판에 꽂혔다.

-쿠웅!

창대가 터져 나가며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렸다. 마치 만근의 화약이 터진 듯 땅바닥이 뒤집어지고 기파가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크억!”

“윽!”

창이 꽂힌 주위에 있던 궁수들이 삽시간에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저, 저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증화보가 보고도 믿기 힘든 상황에 눈을 부릅떴다. 눈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한왕의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자루 창에 기운을 담아 보낼 수는 있다. 그런데 그 기운이 화약처럼 터져 수십 명을 살상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장내는 전대미문의 기사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쏴아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건만 빗소리만 가득할 뿐이다.

그때.

“큭!”

강소군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실 창에는 강소군의 내공이 실린 게 아니었다.

강소군과 보이지 않는 내력의 힘으로 연결되어 날아간 것이다.

이기어검과 같은 수법이었으나 기다란 창을 그렇게 날리는 건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어마어마한 내력이 필요한 일이다. 마지막에 내력을 모두 폭사한 강소군도 힘에 부쳐 잠시 흔들린 것이다.

“저놈도 힘이 빠졌다!”

증화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와아아!”

“혈마가 쓰러졌다!”

한왕군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려다 주춤하였다.

강소군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이번에는 바닥에 나뒹구는 도를 집어 들었다.

마치 도를 집어 들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강소군은 아직까지 비가리개를 눌러쓰고 있었기에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군사들도 겁을 먹고 더 나아가지 못했다.

가면 반드시 죽는다!

어느새 공포가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뭣들 하느냐? 적들은 모두 부상당했다! 마무리를 하는 자에게 큰 상이 돌아갈 것이다!”

“궁수대! 어서 진형을 갖춰라!”

장수들이 나서서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그때.

“대사형!”

“회주, 우리가 왔소!”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궁수대 뒤쪽이 무너져 내렸다.

“적이다!”

한왕군이 물살이 갈리듯 쫘악 갈라졌다.

그 사이로 이천여 명의 도룡회 무인들이 짓쳐들어왔다.

가장 앞에 선 이는 화룡도 조운룡이다.

조운룡의 양옆에 화룡문 십이도객이 포진하고 그 뒤로는 백대도수가 뒤따랐다. 화룡문의 주력이 모두 나온 것이다.

그 뒤로도 고죽문을 비롯한 도룡회 각 문파들이 병장기를 들고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달려왔다.

“도룡회가 기어이 배반을 하는구나!”

증화보가 개탄을 하였다.

“하늘이 한왕을 저버리는구나!”

한왕은 장영영의 독에 중독되고 강소군과 싸우며 적잖은 장수와 군사들을 잃었다.

게다가 도룡회까지 반기를 들었다.

한왕군은 오만이 넘는다. 이천 명의 반란을 대단치 않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군의 사기에는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전쟁을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내분을 겪었으니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셈이다.

“대사형!”

광폭한 기운을 흘리며 달려온 조운룡이 염기창을 찾았다.

염기창은 도룡회가 한왕군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조운룡은 한왕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 여겨 십이도객과 백대도수를 모두 끌고 왔다.

고죽문주는 염기창의 명에 따라 도룡회 무인들을 대기시키고 조운룡을 기다렸다.

때마침 조운룡이 나타나자 고죽문주는 장영영과 염기창이 임승백에 의해 암습을 받은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한왕을 만나러 갔다고 일렀다. 그건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사지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도룡회 무인들을 모두 끌고 달려온 것이다.

조운룡이 염기창을 찾자 살아남은 도룡회 무인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천막을 가리켰다.

“회주님께서….”

조운룡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천막으로 달려가니 염기창이 쓰러져 있었다.

“대사형!”

조운룡의 눈에서 불길이 솟는듯했다.

재빨리 염기창의 시신을 확인한 조운룡이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누가 이랬단 말이냐?”

“한왕이 직접 손을 썼습니다.”

“한왕!”

조운룡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회주님께서 이로써 도룡회와 한왕부의 은원은 해결됐다고 하셨습니다.”

“뭐? 은원이 해결돼? 원한만 남았을 뿐이다! 내 손으로 직접 한왕을 잡을 것이다!”

조운룡의 고함이 빗속을 뚫고 울려 퍼졌다. 마치 한 마리 화룡이 포요하는 듯했다.

광폭한 기운을 담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멀리까지 퍼졌다. 그 기세에 한왕군은 오금이 저렸다.

조운룡이 염기창의 시신을 안고 천막을 나오며 외쳤다.

“십이도객! 백대도수!”

“예! 문주님!”

“오늘 우리는 여기서 죽는다! 최후의 일인이 한왕의 목을 치면 된다!”

“존명!”

십이도객과 백대도수가 칼을 들어 우렁차게 외쳤다.

한왕군에 비해 그 수는 턱없이 적었으나 결사항전의 의지만은 차고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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