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15화 (115/250)

115

염기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왕의 천막은 도룡회 무인이 찢어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 틈으로 강소군이 보였다.

출입문 바깥에는 장영영과 도룡회 무인들이 무릎 꿇려져 있었다. 입에는 천으로 재갈이 물려 있었고 군사들이 뒤에 서서 커다란 칼을 목에 대고 있었다.

명이 떨어지면 바로 목이 잘릴 것이다.

염기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어쩌다 이리됐는지 모르겠군요.”

“원칙대로 따른다면야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한왕이 두 눈에 광망을 번뜩이며 말했다.

“다만, 교화는 나를 암습하려 했으니 용서할 수 없다.”

“사부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우문극이 뭐라고 했느냐?”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아 먹지 않겠느냐고 하셨지요.”

“걱정할 것 없다. 이번에 공을 세우면 도룡회 각 문파에게 영지를 할당할 것이다.”

염기창이 담담하게 말했다.

“도룡회 산하 문파들은 모두 무림인들입니다. 봉토를 받아봐야 스스로 설 수 없으면 문파가 아니지요. 각 문파에서 원하는 건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뭐란 말이냐?”

“문파란 결국 사람입니다. 애써 키운 제자들이 이번 결전에서 희생이 될 겁니다. 심지어 다시 한 번 대가 끊어지는 문파도 나오겠지요.”

염기창이 출입문 밖 도룡회 무인들을 보며 말했다.

“저들은 반란을 했다는 이유로 몰살당할 뻔했지요. 가족과 고향을 지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 무공을 배운 이들입니다. 그런데 다시 왕부의 개가 되어 죽음으로 내몰리겠군요.”

“당초 멸문한 너희를 이만큼 키운 것은 내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은혜를 저버릴 생각이냐?”

한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윽박질렀다.

무림인들이 명분과 의리에 죽고 산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도룡회가 모인 것은 무림의 도움을 잊은 주씨 가문을 응징하고자 함이었지요. 이렇듯 주씨 가문의 내분에 말려 소모될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염기창이 담담히 말했다.

“물론 말씀하신대로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한왕부의 도움도 있었지요. 그 점은 감사드려야겠군요.”

염기창이 일어나 예를 취했다.

그러고는 담담히 말했다.

“허나 그 은혜는 갚지 못하겠군요. 제 한 몸 죽어 오욕의 구렁텅이에 구르는 한이 있어도 도룡회 각 문파의 명맥은 살려야겠습니다.”

“뭐라?”

한왕은 너무나 떳떳하게 참전을 거부하는 염기창의 말에 격분하였다.

염기창이 손을 들었다.

“컥!”

“큭!”

장영영과 도룡회 무인들의 목을 겨누고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강하와 강란, 그리고 장오가 군사들 틈에 있다가 기습을 한 것이다.

“이놈들이? 모두 죽여라!”

증화보가 소리치자 군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아가씨!”

강하가 군사들을 막고 강란과 장오가 재빨리 장영영과 도룡회 무인들의 포박을 풀었다.

“이제 당신 손에 달렸소!”

대담한 도박을 한 염기창이 찢어진 천막 쪽을 향해 소리쳤다.

강소군의 신형이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놈이, 잔꾀를 부려?”

한왕이 대노하여 염기창을 향해 대도를 휘둘렀다.

염기창이 앞으로 튕기듯 구르며 바닥에 떨어진 도를 집어 들었다.

“크윽!”

염기창은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염기창은 도주하는 대신 한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익!

염기창의 화룡도법이 펼쳐졌으나 내력이 실려 있을 턱이 없었다.

한왕이 도를 쳐내고 그 여세를 몰아 사선으로 내리 그었다.

-서걱!

살과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염기창이 멈춰 섰다. 가슴 왼편부터 하복부까지 길게 갈라졌다.

염기창이 피를 토하면서도 툴툴, 웃었다.

“후후! 이로써 도룡회와 한왕부는 서로 다른 길을 갈 것이오.”

한왕은 염기창의 의도를 깨달았다.

자신의 손에 죽음으로써 도룡회와 한왕부를 갈라놓은 것이다.

염기창이 서서히 주저앉았다. 마지막 시선은 장영영을 향해 있었다.

‘영영….’

그의 마지막 눈빛이 장영영과 마주쳤다.

“회주!”

포박이 풀린 장영영이 입에 물린 재갈을 풀고 소리치며 달려오려 했다.

그러나 강하가 이를 막았다.

증화보는 일이 뜻밖으로 돌아가자 크게 낭패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모두 죽인다! 한 사람도 놓치지 마라.”

일단 봉쇄하여 도룡회의 동요를 막을 셈이었다.

그러나 강소군은 이미 장영영 등의 옆에 서서 주위를 포위한 군사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군사에게서 뺏은 장창이 들려 있었다.

“혈마!”

누군가 소리쳤다.

혈마의 창이 사신(死神)조차 뚫는다는 소문은 군에까지 퍼져있다.

게다가 한왕부에서 가장 용맹하다는 번참이 일수에 당해 흙탕을 뒹구는 걸 방금 봤다.

감히 달려드는 이가 없었다.

한왕이 천막을 나오며 소리쳤다.

“저놈의 목을 치는 자에게 황금 일관과 장수의 직, 일천 석의 전답을 내리겠다!”

그러자 모두가 술렁거렸다.

한왕의 말대로라면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

“이익!”

군졸 둘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동시에 튀어 나왔다.

폭우를 가르고 두 자루의 창이 강소군을 찔러 왔다.

-슈슈슉!

강소군이 창을 좌우로 흔들었다.

-퍼퍽!

군졸들의 창이 양쪽으로 튕겨 나갔다. 창은 계속 나아가 두 군졸의 목을 훑었다.

“크윽!”

폭우 속으로 피가 퍼져 나갔다. 뜨거운 혈향이 퍼지자 모두가 흥분하였다.

“죽여라!”

한왕의 장수 중 하나가 대도를 내리치며 날아왔다.

뒤이어 사방에서 창과 도, 검이 날아들었다.

일대난전이 벌어졌다.

강소군의 창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창영이 스칠 때마다 어김없이 피가 터졌다.

창대는 순식간에 붉은 피로 덮였다.

대부분의 장수와 군사들이 강소군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일부는 장영영과 강하 등을 공격하였다.

강하와 강란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적을 막아냈다.

하지만 빗속에서 몰려드는 한왕의 군은 계속 늘어났다.

***

그 시각.

“백 각주가 당했다고?”

젊은 황제가 직접 대정무각의 주둔지까지 찾아왔다.

백정무의 관은 지휘소 천막에 놓여 있었다.

소식을 들은 각주들이 속속 모여드는 중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애통해하였으나 그 가운데 노이칠이 가장 비통해하였다.

황제가 분향을 하고 물었다.

“흉수가 누구란 말인가?”

“자리를 옮기시지요.”

관중이 황제를 옆에 있는 천막으로 안내하였다.

황제가 상석에 앉으며 다시 물었다.

“백 각주는 절대고수가 아닌가? 그를 해칠 자가 있었다니 믿기 어렵군.”

“봉황수라는 자로 역시 십대고수의 일인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천황성에서 왔다는 겁니다.”

“…!”

황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자들이 정체를 드러냈다는 말인가?”

“자세한 건 아직 모릅니다.”

“봉황수란 자는 어떻게 생겼다던가?”

“마흔 중반의 거구였답니다.”

황제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찾아온 천황성의 사자는 쉰 줄에 들어선 청수한 장년인이었다.

“백 각주를 해칠 수 있는 고수가 한둘이 아니라니….”

황제가 침음성을 흘렸다.

“대형께서는 도룡회주 우문극과 결전에서 입은 내상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만일 정상이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겁니다.”

관중이 분루를 흘렸다.

“이 각주가 백 각주의 뒤를 잇겠군.”

황제가 당연한 일처럼 말했는데 관중은 대답이 없었다.

“아닌가?”

황제가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묻자 관중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선황께서 대정무각 결성을 지시할 때 백 대형께 약조하신 바가 있습니다.”

“약조?”

“돌아가신 부친의 개혁을 이어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들었다.

영락제는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변방의 정세가 불안하여 전쟁을 치르느라 조정을 바꿀 틈이 없었다.

그러나 올 봄 타계한 선황은 젊은 유학자의 의견을 들어 권문세가와 토호, 군벌의 힘을 약화하고 관에서 백성을 직접 통치하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애석하게도 젊은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한왕의 반란을 겪었다. 이후 권문세가와 토호, 군벌의 지지를 끌어내 싸우는 중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그들은 각자 공을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 들 것이다.

관중은 이를 막고 개혁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황제로서는 곤란한 질문이었다. 지금 그에게 실질적인 힘을 주는 곳은 권문세가와 토호들이다.

무엇보다 황제는 자존심이 강했다. 대정무각의 이각주가 자신에게 약조를 강요하는 듯하자 반발심이 일었다.

그러나 관중은 멈추지 않았다.

“그 뜻이 없다면 대정무각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차피 천황성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황제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이각주가 군문을 떠난 지 오래되어 조정의 법도를 잊었나 보군. 감히 지금 짐에게 강요하는 것인가?”

“대정무각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 대형은 야인으로 떠돌며 노숙을 마다않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폭우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지요.”

관중은 물러나지 않았다.

“군문에서 나와 대정무각을 세우기 위해 천하를 돌며 본 것은 토호의 권력 아래 신음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을 바꿔 보자고 대정무각의 기치 아래 많은 이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황상께서 그런 뜻이 없다고 하면 백 대형은 무엇을 위해 죽었고 또 앞으로 죽어 갈 대정무각의 무인들의 목숨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관중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흘렀다.

황제는 어리석지 않았다. 오늘은 관중을 끌어들여야 할 것임을 알고 있다.

“짐이 어떤 황제가 될 것인지는 자네 같은 신하들에게 달렸네. 나는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을 이어받고자 하네. 그러나 힘이 없다면 어찌 개혁을 이룰 수 있겠는가.”

관중이 무릎을 꿇었다.

“황상의 뜻이 굳건하시다면 이룰 수 없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신 관중! 목숨을 바쳐 보좌할 것입니다.”

황제의 얼굴에도 비장함이 흘렀다.

“권문세가와 토호의 세력이 만만치 않네. 그들을 비호하는 천황성의 고수들은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자들이네.”

황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들은 언제든 내 목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지. 하지만 그리 순순히 당할 수는 없다. 내 뜻을 접지도 않을 것이다.”

황제가 관중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금이 얼마가 들어도 좋네. 대정무각을 더욱 키우게.”

그러나 관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정무각은 숨어들 것입니다.”

“뭐라?”

황제가 의혹 어린 눈빛으로 관중을 보았다.

“각주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의 대정무각은 조정 세력이란 사실이 천하에 알려졌습니다.”

황제가 황태자 신분으로 한왕에게 쫓길 때 천하사패 대정무각과 도룡회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무림은 조정 세력을 배척합니다. 이미 대정무각의 사업이 곳곳에서 위축되고 있지요. 더욱이 천황성은 어둠 속에 숨어 있고 우리는 밝은 곳에 드러나 있습니다. 대정무각은 백 대형의 변고로 해산하고 사라질 겁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힘을 키우고 고수들 위주로 천황성의 뒤를 쫓을 겁니다.”

“….”

“무림은 지금 어수선합니다. 천무방도 내분이 일어났다는 첩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도룡회 역시 회주가 암습을 받아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천하사패가 한꺼번에 몰락하는군.”

“강호란 그런 곳이죠. 새로이 부각하는 곳도 있습니다. 번천방이라는 곳이 점차 세를 넓히고 있지요.”

“번천방?”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늘을 뒤집겠다니. 이름에서부터 불순한 의도가 역력하다.

“느닷없이 나타난 방파치고 고수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운남에서부터 서서히 동진을 하고 있지요.”

“감히 변방의 세력이 중원을 넘봐?”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하의 일은 천하에 맡기고 우선은 한왕의 군부터 격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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