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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따끔한 느낌이 있었다.
“뭐냐…?”
한왕이 장영영의 손을 뒤집었다.
푸른 옥가락지에 날카로운 침이 튀어나와 있다.
마주친 장영영의 눈에 독기가 솟는다.
한왕은 찔린 손가락이 은은히 저리는 걸 느꼈다.
“이, 이년이?”
한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장영영이 한왕의 손을 뿌리치며 일어섰다.
장영영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한왕이 의혹 어린 시선으로 장영영을 보았다.
“감히 도룡회가 나에게 반기를 들어?”
“흥! 이건 도룡회와 상관없다. 나는 장영영, 장 대장군부의 후손이다.”
한왕의 얼굴이 굳었다.
그 역시 세간에 도는 소문을 모르는 게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왕이 장 대장군부를 모함했다고 수군거렸다.
실제로 한왕은 본인이 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면이 있었다.
다만 그는 남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는 성격이라 부인하지 않아 왔던 것뿐이다.
“어리석은 것, 나는 장 장군부의 역모 사건과 무관하다.”
“죽음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다니.”
장영영이 품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한왕이 비웃었다.
“이까짓 독으로 나를 어찌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한왕은 황실의 고수다. 게다가 영약을 수없이 먹어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있다.
잠시 말을 나누는 사이 운기를 해 봤다. 이제 손목까지 찌르르 마비가 되는 감이 있긴 하지만 당장 어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까짓 독이라고? 몇 년을 준비했는데 간단한 독이라고 생각하느냐?”
“뭣이?”
“지금은 괜찮은 듯하지만 차츰 살이 썩어들어 갈 것이다.”
한왕이 내력을 운용하여 독기를 막고 이를 으드득 갈았다.
한왕부에는 영약과 명의가 있으니 해독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방심하다 당한 것에 분노하였다.
“감히 살아나가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흥! 너를 죽이기 전에는 갈 수가 없다!”
장영영이 비수를 앞세워 달려들었다.
한왕이 한 발 물러나며 발을 들어 비수를 든 장영영의 팔을 걷어차려 하였다.
장영영이 팔을 접었다가 펼치자 비수가 날아갔다.
-휙!
한왕이 재빨리 머리를 비꼈다. 비수는 아슬아슬하게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끝까지 발악하는구나!”
한왕이 고함을 지르며 그대로 발을 내질렀다.
장영영 또한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바깥에 있던 호위들과 도룡회 무인들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우르르 들어왔다.
“왕야!”
“자객을 잡아라!”
호위들이 대번 상황을 파악하고 장영영과 도룡회 무인들을 포위한 뒤 칼을 겨눴다.
호위들은 십여 명인데 도룡회 무인은 네 명이었다.
게다가 천막 바깥에서도 군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났다.
도룡회 무인들은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병장기를 꺼내 들어 장영영을 호위하였다.
“이놈들을 모두 생포하라! 내가 직접 죽이겠다!”
곧바로 난전이 벌어졌다.
“왕야, 일단 피신하십시오.”
호위들이 한왕을 에워싸며 말했다.
“호들갑 떨 것 없다!”
한왕은 싸움을 지켜보며 품에서 비수를 꺼내 독침에 찔린 부위를 베고 독혈을 짜냈다.
그리고는 평소 가지고 다니던 해약을 복용하였다.
“투항하겠다!”
상황은 장영영에게 전혀 이롭게 돌아가지 않았다. 모종의 결심을 한 듯, 장영영이 앞으로 나서 한왕을 향해 말했다.
“이 일은 도룡회와 무관하니 이들은 보내라.”
장영영은 자신의 복수 때문에 무고한 도룡회 무인들이 죽는 걸 원치 않았다.
도룡회 무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교화는 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였다.
“교화님! 저희 걱정은 말고 어서 피하십시오!”
도룡회 무인들이 다시 장영영의 앞을 막았다.
“도룡회 네놈들이 감히 배반을 해?”
소식을 들은 증화보가 나타나 소리쳤다.
-촤악!
도룡회 무인 하나가 도를 그어 천막을 갈랐다.
“교화님을 모셔라!”
무인이 튀어 나가며 소리쳤다.
바깥은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느새 군사들이 몰려와 장창을 겨누고 있었다.
무인을 보자 서너 개의 장창이 찔러 왔다.
-챙!
무인이 도를 휘둘러 창을 쳐 냈다.
“어서 가시죠!”
천막 안에서 세 사람의 무인이 품자형으로 장영영을 에워싸며 외쳤다.
“어림없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한왕의 오른팔 격인 장수 번참이 대도를 휘둘렀다.
도룡회 무인이 서둘러 막았으나 도에 실린 경력은 무지막지하였다.
“크윽!”
번참의 대도는 도룡회 무인의 도를 튕겨내고 그대로 그었다. 도룡회 무인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어깨를 베이고 말았다.
튕겨 나온 도룡회 무인의 도는 마침 장영영 앞으로 날아왔다.
장영영이 도를 잡더니 앞으로 튀어 나갔다.
“죽어라!”
그러나 호위들이 겹겹이 두르고 있어 한왕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막혔다.
“크윽!”
그 사이 바깥으로 나간 무인은 물론이고 나머지 도룡회 무인들은 모두 제압당했다.
“가소로운 것!”
한왕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린 장영영과 도룡회 무인들을 보고 비웃었다.
번참이 한왕에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도룡회로 군사를 보내겠습니다.”
증화보가 반대하고 나섰다.
“어찌 된 일인지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왕군은 수적으로 열세다.
황제를 잡으려면 도룡회 무인들이 필요했다.
원래 계획은 도룡회와 천무방을 앞세워 대정무각을 치고 황제를 생포하는 것이었다.
조카를 죽이고 황제에 올랐다는 것보다 양위를 받는 게 여러모로 좋은 모양새였다.
증화보는 일단 장영영 등을 제압했으니 다음 일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한왕도 이를 알았다.
성정이 거칠고 난폭하지만 영악한 면도 갖춘 한왕이다.
천무방이 무슨 이유에선지 빠졌으니 도룡회가 아쉽다.
한왕이 손을 저었다.
“별것 아니다. 이 계집이 나를 자신의 집안을 몰살시킨 원수로 오해하여 벌어진 일이다.”
한왕이 장영영을 보며 말했다.
“네 입으로 말했지. 이 일은 도룡회와 무관하다고. 도룡회와 연결 짓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를 해하려 했으니 그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다.”
한왕이 옆에 있는 호위의 칼을 받았다.
“교화님을 해치면 도룡회는 반드시 보복할 것이요!”
도룡회 무인이 외쳤다.
한왕은 개의치 않았다. 장영영을 보며 말했다.
“네 원수는 남경부 대학사 방연소와 영국공 장보다. 그 둘이 음모를 꾸몄지. 원수가 누군지 알고 가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한왕이 호위의 칼을 받아 목을 치려다 흠칫, 뒤로 물러났다.
비도 하나가 날아와 두 사람 사이에 꽂혔다.
자루에 홍옥이 박힌 비도다.
“자객이 또 있다!”
호위들이 고함을 지르며 몇몇이 튀어 나갔다.
군사들이 장창을 겨누는데 한 사람이 폭우 속을 걸어왔다.
강소군이었다.
한왕의 군사들은 강소군을 알아보았다.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창을 겨누기만 할 뿐이다.
강소군은 천천히 군사들을 가르며 걸어왔다.
강소군의 얼굴은 비가리개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비가리개를 타고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네놈이 간이 부었구나!”
번참이 강소군을 막아섰다.
“홀로 수만 군을 상대하려는 것이냐?”
강소군이 비가리개 앞을 들었다. 시선은 번참이 아니라 뒤에 있는 한왕에게 향했다.
“정혼녀를 구하러 왔느냐?”
한왕이 대도를 장영영의 목에 대고 말했다.
“이미 늦었다.”
칼을 긋기만 하면 장영영의 목은 떨어진다.
“목숨과 목숨을 바꾸는 게 어떻습니까?”
강소군이 말했다.
“목숨? 네 목을 말하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의 목숨으로 하지요.”
강소군이 자신의 앞을 막고 선 번참을 가리켰다.
번참이 대노하였다. 그간 한왕의 오른팔 격인 장수로 무수한 전장을 누벼 왔으나 오늘같이 치욕스러운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자신의 목숨을 주머니 속 물건 취급하지 않는가.
“네 이놈!”
번참이 몸을 날리며 대도를 휘둘렀다.
증화보가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격장지계요!”
이미 늦었다.
강소군은 예상을 하고 있었던 듯 도를 피하는 동시에 번참의 곡지혈을 쳤다.
“윽!”
번참은 보호구를 차고 있었으나 충격을 받는 순간 팔에 힘이 쭉 빠졌다.
순간 강소군이 도를 낚아채서 번참의 목에 갖다 대었다.
“이러면 공평하겠지요?”
모두 경악하였다.
한왕부의 내로라하는 고수가 단 일수에 목을 내주는 신세가 됐다.
사실 이렇게 간단히 제압당할 실력은 아니었다.
번참은 모욕을 듣고 너무나 흥분했으며 강소군이 그의 도세를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죽여라! 장수가 패했으면 죽는 게 당연하다!”
번참이 대도를 당겨 자신의 목에 대고 그으려 했으나 강소군이 도신을 뒤집었다.
동시에 경력을 쏟아 번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크윽!”
번참 또한 남다른 신력을 지녔기에 용을 써 버티려 하였다.
그러나 강소군의 경력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끝내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전쟁이 한창인데 이리 용맹한 장수를 잃으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강소군이 한왕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왕야! 저는 죽을 것입니다. 그년을 죽이고 이놈도 죽여 제 뒤를 따르게 해 주십시오!”
치욕을 이기지 못한 번참이 비수를 뽑아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 하자 강소군이 뒤통수를 가격하여 기절시켰다.
-철퍼덕!
번참이 흙탕물 위로 엎어졌다.
그때 한 대의 마차가 달려왔다.
“멈추시오! 도룡회주가 직접 왔소!”
강하가 소리쳤다.
마차가 멈추고 염기창이 나왔다.
뒤따라온 도룡회 무인 하나가 우산을 펴 비를 막아 주었다.
염기창은 천천히 걸어 강소군 앞에 섰다.
“도룡회의 일입니다. 잠시 맡겨 주시겠습니까?”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기창은 한왕의 천막으로 들어가더니 예를 취하며 말했다.
“얼마 전 수하 장수를 시켜 저를 암습하더니 오늘은 도룡회의 교화를 죽이려 하시는군요. 이러고도 도룡회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왕이 눈살을 찌푸리고 증화보를 보았다.
임승백은 염기창이 치명상을 입어 죽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다른 장수를 보내 도룡회를 장악하였다.
그런데 염기창이 살아 돌아왔으니 상황이 달라졌다.
젊기는 하지만 염기창은 도룡회주다. 게다가 도룡회의 주축은 화룡문이다.
염기창이 돌아서면 도룡회도 돌아설 것이다.
‘귀찮은 것들 아예 다 죽여 버려?’
한왕은 장영영과 염기창, 강소군까지 모두 죽여 버리고 싶었다.
강소군이 절대고수로 뛰어난 무위를 지녔으나 이 많은 장수와 군사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왕의 눈빛을 본 증화보가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
“도룡회주가 오해를 하고 있군. 임승백이 독자적으로 일을 벌여 한왕께서 크게 야단을 치고 유폐하였소.”
증화보가 장영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교화는 왕야를 시해하려고 독을 썼소. 문책은 한왕부에서 도룡회에 물어야 할 것이오.”
염기창이 장영영에게 다가갔다. 창백한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걸음이 중상을 입은 사람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나는 도룡회주로 교화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겠소.”
“어떻게 책임을 진다는 말인가?”
한왕이 물었다.
“단둘이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그건 곤란하오. 호위를 물릴 수는 없소.”
“호위 몇 사람이 있는 건 괜찮습니다.”
“좋다! 일단 모두 나가 있어라. 교화와 저놈들의 목에서 칼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모두 한왕의 천막을 나왔다.
“몸이 좋지 않으니 앉아서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염기창이 천천히 장영영과 한왕이 앉았던 곳으로 갔다.
“어서 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