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쾅!
백정무의 대검이 하늘을 가르며 땅을 뒤집었다.
대검의 기파에 휘말린 빗방울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물결을 이루다시피 하였다.
천중일검.
그의 별호 그대로 하늘을 관통하는 검다운 기세였다.
한 마리 용과 같이 맹렬하게 짓쳐 드는 대검을 향해 한 쌍의 봉황이 날아들었다.
봉황수의 거대한 오른손에는 수컷 봉의 흉흉한 기세가 실려 있고 왼손에는 암컷 황의 날카로운 예기가 흘러나왔다.
-끼이악!
봉황수가 자신의 손을 비틀자 은빛 장갑에서 봉황이 우는 듯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대검과 봉황수의 주먹이 부딪치자 허공이 잠시 출렁이는 듯했다.
뒤이어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앙!
한순간 주위의 모든 빗방울이 사라졌다. 거센 기파를 이기지 못하고 공동을 이룬 것이다.
백정우의 대검이 봉황의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듯 용틀임하였다.
-구구궁.
검과 은빛 장갑이 힘을 겨루자 기와 기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쾅!
다시 한 번 기파가 정면으로 부딪치며 두 사람의 신형이 떨어졌다.
두 사람의 싸움은 그야말로 용과 봉황의 대결이었다.
숲의 나무가 쓰러져 나가고 땅에는 기다란 고랑이 파였다.
절대지경 고수의 싸움은 치열하였다. 한 수를 놓치면 치명타를 입고 만다.
“놀랍군. 천황성에 자네 같은 고수가 몇이나 되는가?”
백정무가 대검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우문극과 겨루며 입은 내상이 서서히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하고 있다.
장강대하와 같은 그의 기운이 간간이 멈칫하였다.
“십대고수 따위는 쓸어버리고도 남지.”
봉황수도 내심 운기를 하며 말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강호가 뒤집어지겠군.”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야. 세상에는 봉황수가 잠시 나왔다가 십대고수들을 하나하나 격살하고 사라졌다는 전설만 남게 되겠지.”
“놀라운 일이군. 그런 무위를 지니고도 이름 없이 살아간다는 게.”
“흐흐. 때로는 모르는 게 좋은 일도 있지.”
봉황수가 목을 우두둑 꺾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끝내야 할 때가 됐군. 보아하니 내상이 완치되지 않은 듯한데 이번 일격도 감당할 수 있을까?”
봉황수에게는 무림의 법도 같은 것이 없었다.
그 정도 수준에 오른 고수들은 부상을 입은 적을 노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절대지경에 든 고수들은 자신의 능력을 믿을 뿐이다.
하지만 봉황수는 지금 상황의 이점을 최대한 노리며 다가왔다.
아마도 검을 속박하여 내공 대결로 갈 생각인 듯했다.
백정무는 십대고수의 일인이나 평범한 무인 정도의 체구였다. 이에 비해 봉황수는 머리 하나가 컸다.
봉황수가 거대한 팔뚝을 휘휘 저으며 다가오니 위압적으로 보였다.
백정무가 침중한 안색으로 대검을 세웠다. 하늘을 찌를 듯 선 대검 주위로 기운이 흘러나왔다.
대검이 웅웅 검명을 울렸다.
백정무는 평생을 함께한 대검에 자신의 혼을 담았다.
흔히 이기어검을 절대경지로 꼽지만 고수들은 심검(心劍)을 논한다.
허나 이기어검도 무수한 풍문으로만 떠돌 뿐인데 심검지경이 과연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이는 없었다.
백정무는 우문극과의 생사결에서 내상을 입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절대고수와의 싸움에서 생사가 오가는 순간 심검에 입문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제 발을 디뎠을 뿐 심검의 지극한 경지를 알 수는 없었다.
백정무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웅웅.
검명을 흘리던 대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스윽!
대검이 앞으로 기울더니 서서히 나아갔다. 아니, 나아간 듯 보였다.
대검은 여전히 백정무의 손아귀에 잡혀 있으나 봉황수에게는 검이 다가오는 듯 느껴졌다.
봉황수가 눈을 부릅떴다.
“그냥 두었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봉황수 역시 절대고수.
백정무가 심검이라는 전인미답의 경지에 들어섰음을 알았다.
그 역시 심검의 경지는 몰랐지만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동시에 백정무의 심검이 완전한 것이 아니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건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보고 느끼는 경지다.
“내가 심검을 보지 못했더라면!”
봉황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양팔을 휘둘러 출수하였다.
봉황의 기세를 담은 듯 날카롭고도 강력한 기운이 쭉 뻗어 나갔다.
“이번에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찔러 오는 무형의 대검과 봉황수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제대로 된 심검 말이다!”
봉황수의 한마디 말에 백정무의 평정심이 깨졌다.
제대로 된 심검?
순간 백정무의 대검이 흔들렸다.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을 중심으로 거센 기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연달아 퍼져 나갔다.
절대지경의 고수가 전력을 다해 부딪친 기운은 천지를 흔들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쿨럭!
백정무가 핏덩이를 토했다.
‘간교한 놈!’
봉황수는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간교한 술수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한마디로 백정무의 평정심을 흐트러뜨림으로써 심검을 깼다.
하지만 탓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생사결은 가진 바 모든 수를 쓰는 법이니까.
게다가 그의 말에 흔들린 것은 결국 자신의 평정심이 굳건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했으니까.
백정무가 자신의 심검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지녔다면 고작 그 한마디에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쩌저적!
백정무의 대검이 갈라지더니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툭!
검날이 모두 떨어진 검자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후우….”
봉황수가 자신의 손을 봤다. 은빛 장갑이 여기저기 갈라져 있었다. 그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은빛 장갑으로도 심검의 기운을 다 감당하지 못해 결국 손이 상한 것이다.
은빛 장갑 안의 손과 팔은 혈관이 터져 피범벅이다.
봉황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봉황수를 이렇게 만들다니. 역시 심검의 위력은 대단하군.”
백정무는 은빛 장갑의 재질을 몰랐지만 봉황수는 잘 안다.
운철을 제련한 은빛 장갑은 가벼우면서도 단단하여 보검으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게다가 지닌바 내력을 증폭시키는 기이한 효과를 담고 있다.
봉황수는 일 갑자가 넘는 내공을 지니고 있는데 은빛 장갑은 이를 두 배로 늘려 주었다.
“천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건 나였을 지도 모르겠구나.”
봉황수가 백정무를 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천주?”
“명예롭게 대결하였으니 말해 주지. 천황성의 주인께서 심검을 보여준 뒤 그러시더군.”
“심검을 이룬 자가 있다고?”
백정무가 뇌까렸다.
“그분이야말로 인간을 넘어 신의 경지에 이른 분이지. 그분께서 그러더군. 강호에서 심검을 쓰는 자를 만나면 마음부터 깨라고.”
“그랬군.”
백정무는 아쉬웠다. 심검의 경지에 발을 디디자마자 이렇게 생을 마감할 줄이야.
내력이 다한 그의 얼굴을 빗방울이 거세게 때렸다. 빗물이 그의 얼굴과 짧은 수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 미련 떨치고 가시지?”
봉황수가 백정무를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이미 내장이 박살났을 터이나 마지막을 확인해야 하는 절차가 남은 것이다.
그때.
-쉬이익.
폭우를 가르고 한 자루 검이 날아왔다.
그냥 던진 검이 아니다. 궤적을 그리고 선회하듯 날아오는 검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대형!”
동시에 허공에서 커다란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기어검?”
봉황수는 날아드는 검을 보자 한 발 물러섰다.
검은 그와 백정무의 사이에 꽂혔다.
“흐음. 당신의 육신은 곱게 남겨주라는 하늘의 뜻인 모양이군.”
봉황수는 한마디 내뱉더니 몸을 솟구쳐 폭우 속으로 사라졌다.
날아가는 그의 몸에서도 빗물이 줄줄 흘렀다.
그 역시 내상을 입었기에 더 이상 빗물을 튕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봉황수가 사라지자마자 한 사람이 허공에서 떨어졌다.
백정무가 그를 보고 클클, 웃었다.
“관중, 왔는가? 못난 꼴을 보여 미안하군.”
“대형!”
대정무각의 이각주 대약무검 관중은 전방에 나갔다가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아무도 오지 말라 했지만 백정무의 내상이 완치되지 않은 걸 아는 그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멀리서 싸움을 관전하다가 승부가 끝난 것을 알자 검을 날린 것이다.
“형님….”
관중은 진작 싸움에 개입했어야 한다는 자책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사실 백정무가 진다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다만 내상이 도질까 염려하여 달려왔는데 상대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했다.
“동약사!”
관중이 허공을 향해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내력을 담은 목소리가 폭우를 가르고 천지를 울렸다.
백정무가 손을 저었다.
“아닐세. 그가 와도 소용이 없네.”
백정무가 그 자리에 좌정을 하였다. 마지막 기운을 모아 터진 내장을 감싸며 말했다.
“그는 봉황수. 천황성에서 온 자네. 천황성에는 천주라는 자가 있는 모양이네. 그들은 십대고수 간에 생사결을 일으켜 강호 고수들을 제거할 속셈인 것 같네.”
백정무가 봉황수와의 일전을 겨루며 얻은 정보를 빠르게 일러주었다.
“자네가 일단 대정무각을 맡게. 그리고 강휘, 그 아이를 부탁하네.”
“…!”
관중은 백정무가 유언을 남기자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다.
백정무와 함께 대정무각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한 관중이다.
대정무각 열 명의 각주 가운데 두 사람만 금군 출신이다.
백정무가 대정무각을 세우라는 황명을 받은 뒤, 지기이자 아우였던 관중을 데리고 군문을 나온 지 십여 년.
그동안 두 사람은 강호의 뜻있는 인사들을 모아 지금의 대정무각을 이뤄냈다.
그들은 명예와 권력, 부는 생각지 않았다. 단순히 황제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그리한 것도 아니다.
죽은 선황은 백정무에게 개혁을 통해 백성의 삶을 돌보겠다고 했다.
권문세가와 토호의 횡포로부터 백성을 구제하고자 한 뜻에 동참하여 그들은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대형이 이렇게 이름 없는 야산 숲에서 생을 마치다니.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형님. 먼저 가 계시오. 우리의 뜻은 반드시 이뤄낼 것이니 그때 가서 봅시다.”
관중이 백정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형!”
“각주님!”
그제야 대정무각의 무인들이 달려오며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거두게. 장수가 수하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되나.”
백정무가 한마디 하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한왕은 마치 홀린 듯했다.
지금 다탁에 놓인 장영영의 손을 힐끔거리며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장영영은 일부러 한왕을 자극하기라도 하듯 한 손을 다탁에 올려놓았다.
희고 고운 손이다. 붉고 푸른 옥가락지를 낀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다.
팔목에 찬 오색 팔찌 또한 영롱하여 희고 고운 살과 잘 어울렸다.
“험, 험!”
한왕이 자제력을 발휘하여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임승백 그놈이 회주와 교화를 암습했다고?”
마치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듯 무척 놀란 듯 말했다.
“그놈이 감히 무슨 생각으로 그랬단 말인가?”
“진정 왕야께서 모르신 일이었습니까?”
장영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살짝 내리깐 눈썹에 한왕은 후끈 달아올랐다.
“당연히 모르는 일이지. 전쟁에 앞서 장수를 치는 경우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안심이군요. 사실 저는 죽을 결심을 하고 이 자리에 왔답니다. 임 장로가 왕야의 명을 받아 그리한 것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죽이실 수도 있으니까요.”
겁먹은 듯 살짝 고개를 숙이자 흑단 같은 머릿결이 출렁이며 암향이 풍겨 나왔다.
한왕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다탁에 놓인 장영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임승백, 그놈의 목을 쳐서 내가 결백한 것을 입증하겠다!”
한왕이 말하다 돌연 자신의 손을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