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대정무각의 본진.
전령이 폭우를 가르고 달려왔다.
“강적이 나타났습니다. 검문을 하던 무사들을 쓰러뜨리고 오고 있습니다.”
전장 지도를 보고 있던 백정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 엄청난 기파가 터진 걸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이나 되던가?”
옆에 있던 대정무각 구각주 형운천이 물었다.
이번 결전을 대비해 대정무각 십각이 모두 동원되었다. 형운천도 합비지부를 버리고 합류하였다.
“그게… 한 사람입니다.”
“겨우 한 놈을 당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백정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이 침중하였다.
“나를 찾아온 게야.”
마치 예감하고 있었다는 듯 백정무가 자신의 대검을 들었다.
“대형, 제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백정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대형은 아직 완쾌되지 않으셨잖습니까?”
백정무는 도룡회주 우문극과의 결전에서 입은 내상이 아직 남아 있다.
절대고수들의 내력에는 각자 자신이 깨달은 현묘한 극의가 담겨 있어 한 번 당하면 치유가 쉽지 않다.
백정무가 지휘소를 나와 기파가 터진 곳으로 향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전신에서 강력한 기파가 형성되어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대정무각의 무사들이 뒤를 따르려 하자 백정무가 손을 들었다.
“따라오지 마라. 관 각주에게 연락해 지휘소를 맡으라고 하라.”
대정무각의 이각주 대약무검 관중은 지금 전방에 나가 있었다.
대정무각 무사들은 감히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다만 뒤에서 지켜볼 뿐이다.
기다란 길.
두 사람은 폭우 속에서도 저 멀리 다가오는 서로의 신형을 알아보았다.
“호쾌하군. 단신으로 대정무각의 본진으로 쳐들어오다니.”
백정무가 소리쳤다.
“하하하. 그리 말하니 대정무각이 대단한 곳이라도 되는 것 같군.”
말을 타고 오던 이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훌쩍 말에서 내려 걸어왔다.
삼십여 장 거리가 차츰 좁혀지더니 십여 장 남짓 되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멈췄다.
십여 장은 적지 않은 거리다.
백정무가 거한을 보다 말했다.
“천황성에서 왔군?”
“하하. 그게 중요한가? 지금 내 별호는 십대고수에 올랐네. 봉황수라 하지.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적어도 당신보다 서열이 셋이나 높으니까.”
백정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봉황수.
요천루주가 죽은 뒤 느닷없이 십대고수에 오른 인물.
그것도 서열 사 위다.
백정무가 우문극을 꺾기 전까지 서열 칠 위.
반수 차이로 우문극을 이겨 서로 서열이 바뀌었지만 그래 봐야 서열 육 위다.
“천황성에서 왜 십대고수 놀음을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군.”
두 사람의 대화는 십여 장 뒤에 진을 치고 있는 대정무각의 무사들에겐 들리지 않았다.
대정무각의 무사들은 폭우 탓이라 여겼지만 실은 두 사람 모두 상대만 겨냥해 말을 하는 중이다.
“봉황수가 남궁악과 생사결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찌 됐는지 궁금하군.”
“남궁악? 그 애송이가 과연 내 상대가 되겠나. 스스로 알고 집에 처박혀 두문불출하더군. 나는 겁을 먹고 숨어 있는 놈까지 찾아내어 싸울 만큼 한가하지가 않다.”
백정무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군. 자네 같은 고수가 고작 남의 하수인이 되어 십대고수 간의 싸움이나 일으키려 하고 다니다니.”
“봉황의 뜻을 뱁새가 어찌 안단 말인가?”
봉황수가 백정무의 말을 일축하고는 옆의 숲을 보았다.
“수하들 앞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겠나? 여긴 진창이라 옷에 흙탕물이 튈까 걱정이군.”
숲으로 가서 싸우자는 뜻이다.
백정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싸우다가 대정무각의 무사들까지 휘말리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오지 마라.”
백정무가 멀리 진을 친 대정무각 무인들에게 이르고는 숲으로 향했다.
그리 넓지 않은 숲 한가운데 공터가 있었다.
두 사람은 공터에서 삼 장 거리를 두고 마주하였다.
두 사람이 내뿜는 기파가 폭우 속에서 팽팽하게 대치하였다.
‘우문극 아래는 아니다.’
백정무는 일생일대의 적수를 만났음을 느꼈다.
서서히 검을 뽑은 뒤 검집을 버렸다.
생사결이라는 뜻이다.
“좋군!”
거한이 등에 맨 자루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양손에 찼다.
무슨 재질로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검붉은 기운 감도는 철장갑이었다. 손에서부터 팔뚝까지 철장갑을 찬 봉황수가 씨익, 웃었다.
“사실 이 장갑을 봉황수라 불러야 하지.”
***
도룡회의 본진.
염기창은 서두른다고 바삐 마차를 달려왔으나 장영영은 없었다.
“교화께서는 한왕을 만나러 본진으로 갔습니다.”
한왕의 본진은 오 리 정도 북쪽에 있다.
염기창은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고죽문주에게 일렀다.
“화룡도가 오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도룡회는 출진하지 마십시오.”
고죽문주가 난색을 표했다.
“임 장로가 부상을 입고 한왕부에서 새로운 장로가 왔습니다. 그의 무공이나 성품이 무척이나 거칠고 명분 또한 쥐고 있으니 장로들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와 교화를 유인하여 해치려 한 장본인이 임승백입니다.”
염기창의 말에 고죽문주가 크게 놀랐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장로들을 설득하겠습니다.”
고죽문주가 지휘소로 가자 염기창이 강하에게 말했다.
“한왕의 본진으로 가야 합니다.”
강하가 잠시 멈칫, 하였다.
한왕의 본진으로 갔다가 신분이 발각되면 죽는 수밖에 없다.
오면서 염기창의 기색을 살피니 장영영은 한왕을 노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애초에 도룡회에 몸을 담은 이유가 기회를 노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강하는 장영영이 도룡회에 있는 게 내심 불만이었다.
도룡회는 한왕부의 휘하 세력이고 한왕은 한때 장 대장군부를 모함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강하가 보기에는 원수의 휘하에 의탁한 셈이었다.
그래서 설득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기도 했는데 장영영은 거절하였다.
그런데 다른 뜻이 있었음을 알게 되자 지난 서운함이 씻은 듯 사라지고 장영영의 안위가 더욱 걱정됐다.
‘주군은 어디 계시지? 주군이 사실을 밝힌 게 아닌가?’
강소군은 한왕이 장 대장군가의 역모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강하도 아직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시 모든 정황이 한왕과 방연소가 누명을 씌운 것처럼 보였다.
‘아가씨가 한왕을 찾아간 이유가 증거를 잡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목숨까지 도외시하고 찾아갈 리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강하는 내심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는 장영영이 섭섭했다.
하지만 장영영이 위험하다니 멈출 수는 없었다.
“갑시다!”
강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란과 장오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각오한다는 눈빛이었다.
***
“하하. 교화가 직접 나를 찾아오다니. 이거 영광이군.”
자신의 천막에 앉아 장수들을 지휘하던 한왕은 교화 장영영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퍽이나 놀랐다.
임승백의 기습에서 탈출한 것은 들은 바 있다. 그런데 대담하게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
한왕은 본심을 감추고 장영영을 직접 나와 환대하였다.
백련교의 뿌리는 깊다.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민심을 얻어야 하는 군주의 입장에서는 불모와 교화는 쳐 죽이거나 아니면 수용하여 적절히 이용해야 했다.
한왕은 두 번째를 선택하였다. 그가 당당히 거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불모와 손을 잡음으로써 산동의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서 안으로 들지.”
한왕이 앞장서서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장영영은 천막으로 들어서자 죽립과 우의를 벗었다. 그리고 면사까지 벗었다.
왕 앞에서 면사를 쓰는 건 무례한 일이다.
장영영의 얼굴을 본 한왕이 잠시 놀란 듯했다.
“교화가 이런 미인인 줄은 몰랐군.”
장영영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왕야의 호쾌한 기풍은 익히 들었으나 이렇듯 뵈니 진정 천하의 주인을 만난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미인과 영웅이라. 왠지 얼굴에 금칠하는 기분이로군.”
한왕은 장영영을 보자 방금 전까지 지녔던 짜증이 씻은 듯 사라졌다.
은근히 하초가 뻐근함을 느끼고 남다른 생각까지 하였다.
전쟁은 피가 튄다. 죽고 죽이는 살육의 전쟁터에서는 적을 죽이고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이 지배한다.
그런 욕망은 왕왕 왕성한 색욕으로 분출된다. 그러기에 전쟁터에서 아녀자를 겁탈하는 끔찍한 짓이 벌어지곤 한다.
한왕 또한 결전을 앞에 두고 또는 결전이 끝난 뒤 여인을 품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결전을 앞두고 하실 말씀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장영영은 당돌하게도 한왕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한왕은 더욱 욕망이 일었다.
한왕 역시 수많은 전쟁을 치른 장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과 대치한 전쟁터에서 자신이 이렇듯 여인을 원하는 게 이상하다 생각지 못했다.
한왕은 이번 일전에서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 여겼다.
그는 백전백승의 용장이다.
아버지가 황휘를 찬탈할 때 선봉에 서서 싸웠다. 이후 변방에서도 용맹을 떨쳐 군문의 신임을 얻었다.
역모에 연루되어 부황의 명에 의해 산동으로 쫓겨 갔으나 조정에서 그를 무시할 자는 없었다.
황군의 규모는 자신의 군대보다 두 배가 넘었으나 한왕은 개의치 않았다.
어린 조카가 기저귀를 갈 때 전장을 누볐던 그다. 패할 거이란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다만 폭우로 인해 지체되는 게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한왕은 내일이면 황군을 격파하고 어린 황제를 잡아끌며 입궁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기에 장영영이 암향을 풍기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장영영은 한왕을 만나기 전 자신의 몸에 정욕을 일으키는 암향을 뿌렸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퍼진 암향은 한왕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장수들까지 자극하였다.
다만 한왕 앞이라 자제할 뿐이었다.
암향은 독이 아니다. 기루에서 흔히 쓰는 지분향에 약간의 흥분 효과를 일으키는 약재를 첨가한 것뿐이다.
애초에 남자의 욕망이 없으면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랬기에 한왕의 장수들도 장영영의 미색을 보고 자신의 욕망이 일어난 것이라 여겼을 뿐 암향의 작용이란 것을 꿈에도 몰랐다.
도룡회의 무인들은 자신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교화이기에 감히 그런 욕망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한왕의 천막에 들어서면서 병장기를 모두 내려놓아야 했다.
장영영은 그들을 보고 미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한왕을 죽이면 그들도 죽을 것이다.
알지도 못한 채 죽음의 동반자가 된 이들이다.
“이리 앉아서 이야기하지.”
한왕의 천막은 넓었다.
문 맞은편에 단상을 짓고 태사의를 놓았다.
그리고 왼편에는 손님을 맞을 객석을 꾸며놓았다.
오른편에 주인이 앉고 왼편에 손님이 앉는 형태다.
한왕은 장영영의 미색에 반해 자연스레 객석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술을 가져와라!”
두 사람 사이 다탁에 차 대신 술과 가벼운 안주가 놓였다.
“전쟁 중인데 술을 드셔도 괜찮겠습니까?”
“하하. 그래서 술을 마시는 거지. 한 잔 술을 들이켜고 적장의 목을 베러 가는 장수의 마음을 모르는군.”
한왕이 호기롭게 웃으며 술잔을 벌컥, 들이켰다.
“저는 아녀자인지라 그런 호기를 부릴 수가 없군요.”
장영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마치 늘어선 장수와 호위가 불편하다는 표정이었다.
한왕이 눈치채고 수하 장수들에게 일렀다.
“모두 나가라. 교화께서 긴히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수하 장수들이 도룡회 무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너희도 문 앞에서 대기하라.”
한왕은 두 명의 호위무사까지 내보냈다. 한왕은 천하가 알아주는 신력을 지닌 장수다. 그랬기에 수하 장수나 호위무사들은 별걱정 않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