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그날 경성의 백성들은 숨을 죽이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텅 빈 골목에 개 한 마리 다니지 않았다.
경성 성벽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대기하였다.
천하의 패권을 두고 두 마리 용이 격돌하였다.
하늘도 이를 아는지 아침부터 비를 뿌렸다. 축축한 대기가 세상을 짓눌렀다.
***
강소군은 자신의 거처에서 창문에 기대 후원을 내다보았다. 두어 평 남짓 작은 후원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시는 건 그의 많지 않은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담장 아래 작은 화단에 희고 붉은 화초들이 비를 맞고 있었다.
성 밖 들판에는 피의 수레바퀴가 굴러다니고 있으나 이 작은 공간은 고요하였다.
사람들은 말수가 적고 담담한 강소군을 두고 평정심이 강하다 여긴다.
하지만 강소군은 자신의 내면이 폭풍이 오기 전 고요함처럼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저 깊은 땅속에서 뜨거운 용암처럼 꿈틀거리는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감정이 간밤처럼 어린 소녀의 처연한 눈빛만으로도 충격을 받아 터져 나왔다.
이처럼 어느 순간 그도 제어할 수 없이 순식간에 터질 수 있다는 걸 겪고 나니 그대로 둘 수만은 없었다.
‘후우….’
강소군은 금단진공을 운용하였다. 금룡기의 정순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졌다.
그럼에도 육신은 부족함을 느끼고 뭔가를 갈구하였다.
육신과 정신의 조화가 이뤄지지 않은 절대경지는 그야말로 폭약을 지고 불구덩이 속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임계점에 다다르면 그대로 터져 버릴 터였다.
연화심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심마에 사로잡혀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적이라도 만났으면 폭주하였을 것이고 그 이후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수많은 고수들이 초절정에서 절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건 육신의 수련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강대한 육신의 능력을 심력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또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도 알고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도의 길로 접어든 경우도 있다.
그 경지는 말로써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 경지를 넘어선 이가 드물기에 알려 줄 이도 없다.
결국은 스스로 넘어야 할 벽이다.
강소군의 경우는 비정상적으로 절대의 경지에 올랐다.
무총에서의 기연으로 절대의 경지에 올랐으나 심력은 그에 못 미치니 그의 정신은 깨지기 직전이었다.
강소군은 간밤의 일로 자신의 상태를 명확히 깨달았다.
이 심마를 다스리려면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
연화심은 마씨 부인의 연검에 의해 다친 상처를 치료하였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가슴의 자상에 금창약을 바르다 복부의 상흔을 보았다.
무창쌍과의 과는 복부에 큰 흉터를 남겼다.
연화심은 과가 복부에 박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대로 죽는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강소군의 얼굴과 마주하였다. 그의 붉은 두 눈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오늘 본 강소군은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눈빛은 담담하고 맑았다.
세상일에 초연한 눈빛이었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새삼 강소군이 궁금해졌다.
그가 황족의 일원이라는 걸 안 뒤 무척 놀랐다.
다시 만났을 때도 귀공자 차림을 한 모습에 무척 낯설었다.
그녀에게 강소군은 피에 젖은 전사였다. 그런데 다시 본 강소군은 그녀가 알던 사람과 달랐다.
명문가 귀공자다운 절제된 언행에서도 거리감을 느꼈다. 차라리 말이 없을 때가 더 익숙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성 밖 강가의 정자에서 만나고서 생각이 바뀌었다.
왠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정혼자가 있어.’
사실 그것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홍옥비도의 주인이 장영영이라는 건 금세 알았다.
한창 민감한 나이의 연화심이다. 강소군과 장영영 사이에 흐르는, 어딘가 모를 부자연스러운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정혼자는 다른 사람을 돌보고 있다. 그것도 어쩌면 적일지도 모르는 도룡회주다.
‘대체 이 사람들은 어떤 사이인 거지?’
생각에 빠져 있는데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연 낭자!”
장영영의 목소리였다.
“잠시만요.”
연화심이 서둘러 옷을 입었다.
방문을 여니 장영영이 서 있었다.
연화심이 장영영을 들이고 창문을 열었다.
빗소리가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연화심이 차를 내려는데 장영영이 손을 저었다.
장영영은 다급해 보였다.
“중 소협에게 소식이 있는지요.”
산동은 머지않으니 길을 재촉했으면 오늘쯤 돌아왔어야 한다.
연화심이 고개를 저었다.
장영영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연화심도 장영영이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말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쏴아아!
빗줄기가 거세진다.
경성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것이다.
강소군의 집은 세상과 동떨어진 듯 빗소리만 들릴 뿐이다.
두 여인은 한동안 빗소리를 들었다.
연화심은 망설이다 결국은 입을 열었다.
“도룡회와 대정무각이 격전을 벌이고 있을 겁니다.”
간밤에 연화심을 구하기 위해 나타났던 노이칠이 해 준 말이다.
노이칠은 도룡회가 움직이고 있어 대비를 해야 한다며 서둘러 돌아갔다.
장영영은 말없이 창밖의 비를 보았다.
한동안 흐른 침묵을 깨고 장영영이 말했다.
“대정무각에 연락을 해 주세요.”
“…!”
“연 낭자가 대정무각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알아요.”
연화심은 부인하지 않았다.
노이칠은 강소군의 집 근처에 두 명의 대정무각 무사를 배치해 두었다.
“이미 싸움이 시작됐을 거예요.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장영영이 일어났다.
“제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할 일이 있어요. 제가 가야 해요.”
“….”
“부탁해요.”
***
박석이 깔린 마당에 거센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의 파편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민가.
백정무는 마당과 이어진 작은 객청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상관청유는 객청 한가운데 있는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보고 있었다.
전령이 오갈 때마다 표석의 위치가 바뀌었다.
상관청유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인가?”
상관청유가 백정무를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황제가 친정을 나간 사실이 누설된 것 같습니다. 경성에 들어온 도룡회는 주력이 아닙니다.”
“….”
백정무가 미간을 찌푸렸다.
상관청유의 말은 황제가 황궁에 머무는 것처럼 하여 도룡회를 끌어들이려 한 계책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황궁을 치는 것처럼 위장하고 주력은 황제를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황제는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장으로 나갔다.
“내가 직접 가야겠다.”
백정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작은 중문이 열리고 무사가 달려와 보고하였다.
“모셔 왔습니다.”
상관청유가 백정무를 향해 말했다.
“대형, 마침 도룡회 교화가 저를 보자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지 듣고 오겠습니다. 출정은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상관청유가 바삐 중문을 나가 바깥채로 갔다.
마당에 죽립을 쓰고 우의를 걸친 장영영이 서 있었다.
상관청유가 다가가니 장영영이 고개를 숙였다.
“교화께서 무슨 일이시오?”
상관청유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황이 시급하게 돌아가니 서로 예를 갖출 새가 없었다.
“저를 경성 밖으로 보내 주세요.”
“무슨 말씀이시오? 지금 밖은 전쟁터요. 경성은 철벽과도 같이 봉쇄되어 있어 아무도 드나들 수 없소.”
상관청유가 거절했다.
백련교의 교화가 도룡회에 가세한다면 사기가 한층 오를 것이다.
상관청유의 생각대로라면 도룡회주와 교화는 대정무각이 억류하고 있어야 맞았다.
강소군의 면을 보아 놔두고 있으나 철저히 감시를 하는 중이다.
그런데 찾아와서 보내달라니 들어줄 상관청유가 아니다.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어요.”
장영영이 죽립을 쳐들고 상관청유를 노려보며 말했다.
‘…!’
상관청유는 장영영의 눈에 어린 모종의 결심을 읽었다.
‘장홍 대장군가의 여식이라고 했던가?’
상관청유는 장영영의 내력에 대해서 조사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교화가 나타나면 전황에 어떤 변수가 될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그때.
“보내 주게.”
백정무가 비가리개와 우의를 쓰고 중문을 걸어 나오며 말했다. 우의를 걸치기는 했지만 빗방울은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튕겨 나갔다.
‘고수!’
장영영은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그와 같은 기세를 풍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전대 도룡회주 우문극과 비견할 만한 고수는 대정무각에서 한 사람뿐이다.
“백 대협의 선처에 감사드립니다.”
장영영이 고개를 숙였다.
백정무가 장영영을 잠시 보았다.
그 역시 장연보 노장군은 물론 장홍 대장군과도 면식이 있는 사이다.
“전황이 급하니 나가 봐야겠네.”
백정무가 다시 폭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위무사 십여 명이 뒤를 따랐다.
상관청유는 내키지 않았으나 옆에 있는 무사에게 말했다.
“이분을 성 밖으로 모시게.”
장영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무사를 따라갔다.
***
드넓은 평야에 폭우가 내렸다.
적은커녕 한 치 앞을 내다보기도 어려웠다.
“퇴각한다!”
벌써 두 차례 공방전을 벌였으나 싸움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폭우가 너무 거세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양쪽의 장수들이 서로 군을 물렸다.
물길이 되다시피 한 들판에 시신이 널렸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물길을 따라 흘렀다.
폭우 속에서 군사들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물에 흠뻑 젖은 군사들의 모습은 생기가 없었다.
그건 황군이나 한왕군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세의 광란에 하늘이 분노한 듯했다.
오후 들어서는 뇌전벽력까지 내리쳤다.
야트막한 언덕.
커다란 천막 막사 안에 한왕과 수뇌부가 모여 있었다.
한왕의 갑옷은 흠뻑 젖었다. 흙탕물과 피가 범벅된 갑옷을 입고 전장을 내려다보는 한왕의 얼굴은 초조함이 비쳤다.
옆에 서 있던 책사 증화보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래도 결전은 내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싸움이 불가능합니다.”
한왕이 증화보를 돌아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이 길일이라고 한 천문관의 목을 쳐라.”
“벌은 싸움이 끝나고 물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리고는 뭐냐?”
“비가 오고 있기에 황군이 화승총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군으로서는 다행이지요.”
한왕은 멀리 평야 끝에 진을 친 황군의 막사를 노려보았다.
“애송이 놈이 직접 나올 줄은 몰랐군.”
“달라질 건 없습니다. 더 이상의 원군도 없을 겁니다. 이 한판의 결전이 끝나면 만백성의 환호를 받으며 입궁하실 겁니다.”
증화보가 좋은 말로 한왕을 달랬다.
한왕은 말이 없었다.
그 역시 무수한 전장을 겪은 인물이다. 오늘은 더 이상 교전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
“군을 물리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여라.”
한왕의 명이 떨어졌다.
***
“그녀가 성 밖으로 갔다고?”
강하의 말에 강소군이 흠칫, 놀라 되물었다.
‘주군께서 놀라는 건 처음 보네. 역시 아직까지 아가씨를 마음속에 두고 있는 게 분명해.’
강하가 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대정무각을 찾아가신 모양입니다.”
강소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가 아직 완쾌되지 않아 걱정입니다. 저희 남매가 가 보겠습니다.”
강하와 강란이 장영영의 호위를 자처하고 나섰다.
“아니야. 내가 가겠다.”
강소군이 폭우를 퍼붓는 하늘을 보았다.
대낮이었건만 초저녁처럼 어두운 하늘에 뇌전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