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조개량은 마루에 머리를 처박고 감히 들지 못했다.
안에는 천황성 삼태상이 모두 모여 있었다.
경성에서의 일전은 천황성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삼태상이 모두 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수년간 공들여왔던 일을 망치고 말았다. 과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천려일실.
구양수라는 놈이 꺼림칙했을 때 방비를 해야 했다. 파락호에다 무공조차 변변치 않다고 여겼던 놈이다.
‘음흉한 놈!’
구양수는 일찌감치 눈치를 채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풍살을 제거하고 자신을 감시해왔으니 그 순간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구연강을 제거하려다 하마터면 자신이 죽을 뻔했다.
천살이 아니었다면 천무방주 구연강의 손아귀에서 살아나오지도 못했다.
구연강은 독에 당하고도 엄청난 무위를 쏟아냈다. 하지만 천살 또한 홍화훈에 의한 마비가 반 이상 풀렸기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
변수는 구양수의 비도였다.
구연강의 검을 맞받아치던 천살의 등판에 구양수가 비도를 날렸다. 그 비도가 운명을 갈랐다.
그 순간 조개량은 곧바로 도주하였다.
조개량의 귓전에 구양수의 조롱 섞인 마지막 한 마디가 맴돌았다.
“잘 가라고. 다시는 오지 마.”
조개량은 바닥을 짚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놈만은 반드시 죽여버린다.’
조개량은 느물느물한 구양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기다란 내전 끝에 붉은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반쯤 비치는 천 너머로 탁자와 네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사람이 정중앙에 앉아 있었고 세 사람이 오른쪽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조개량은 들어와 상황을 보고하라.”
조개량이 무릎걸음으로 마루를 지나 붉은 천 앞까지 갔다.
“속하, 입이 있어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조개량이 머리를 처박았다. 그러고는 자초지종을 보고하였다.
붉은 천 너머 중앙에 앉아 있는 이가 말했다.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실수도 하는 법이지. 그간 잘해오지 않았는가. 한번 실수는 병가에서 흔히 있는 일이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것이네. 어떻게 끝을 맺을 셈인가?”
“일이 이리된 이상 천무방까지 한꺼번에 쓸어버리겠습니다.”
“오호? 천무방까지?”
“구연강은 여우같은 자입니다. 이번 싸움을 지켜보다 떨어진 과실이나 주우려는 속셈이겠지요. 그러나 그로 인해 자신이 죽을지는 몰랐을 겁니다.”
“구연강을 잡겠다고?”
“천살 어르신이 자신을 희생하며 펼친 수에 구연강 역시 당했습니다. 부상이 작지 않으니 반드시 제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되면 천무방이 적으로 돌아설 텐데.”
“천무방을 끌어들이려는 건 포기하겠습니다. 대신 강호 대문파와 세가들이 발호하는 난세를 만들겠습니다.”
“…….”
조개량의 말에 모두가 침묵하였다.
천하를 관장한다고 자처하는 천황성이다.
천무방으로 강호를 일통한 후 이를 이용해 강호세력을 통제하는 게 당초 목표였다.
그런데 그 일을 꾸며왔던 조개량이 강호일통 세력을 포기하고 패자가 없는 무림을 형성하겠다고 했다.
붉은 천 안의 네 사람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되새기는 중이다.
“그리되면 무림을 어떻게 관리한다는 말인가?”
“차선책으로 이미 각 대파와 세가에 우리 사람을 심어 놓았습니다. 강호일통을 하여 견제를 받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습니다.”
조개량의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더운 여름날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의 비위가 상하는 순간 자신의 목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가?”
되물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다.
“그렇다면 이번 일전의 결과를 놓고 다시 한번 이야기하기로 하지. 그만 가보게.”
조개량이 무릎걸음으로 내전을 나왔다.
조개량이 나가자 붉은 천이 걷혔다.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는 이는 조왕 주고수였다.
“개량을 많이 믿었는데 중요한 순간에 일을 그르쳤군.”
주고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일이 망친 걸 탓하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주고수 옆으로 줄지어 앉아 있는 세 사람은 두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중년인이었다.
“등 노사는 어떻게 보십니까?”
주고수가 가장 앞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물었다.
등 노사라 불린 노인은 산골 촌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소박한 차림이었다.
“조개량에게는 십이지대가 있습니다. 천하삼패가 각기 결전을 벌이고 있으니 기다렸다가 쓸어버리는 건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위 태사께서도 같은 생각이신지요.”
주고수는 세 사람을 무척 존중하였다.
위 태사라 불린 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곱게 늙은 학자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경성 일전의 결과를 조율하는 게 급선무 같군요.”
주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 일전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중년인만은 표정이 냉랭한 것이 생각이 다른 듯했다.
“종 선생은 다른 의견이 있으신 것 같군요.”
중년인 종 선생이 입을 열었다.
“무림은 딴 세상이 아닙니다. 무림이 안정되지 않으면 상계 또한 어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그래서 강호일통을 추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종 선생은 상계를 대표하여 이 자리에 있다. 조개량의 강호일통지계를 가장 크게 기대한 이가 종 선생이다.
조정이든 무림이든 안정이 되어야 상계가 번창할 수 있다.
등 노사는 무림을 대표하니 오히려 소극적이었고, 위 태사는 조정의 일을 관장하니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애석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 않은가. 위 태사의 말씀처럼 지금은 경성 일전에 전력을 쏟아야 하네.”
“경성 일전의 결과는 이미 나와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종 선생의 말에 등 노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 가볍게 생각할 게 아니네. 천무방이 저리 됐으니 한왕의 전력이 약화된 게 아닌가. 십이지대 중 일부를 동원해서 지원을 해야 한다고 보네.”
종 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나 한왕이나 누가 되든 오래가지 못합니다. 결국은 여기 계신 조왕께서 보위에 오르실 게 아닙니까? 십이지대는 차라리 강호로 보내 천무방을 대신한 강호일통 세력으로 키워야 한다고 봅니다.”
삼태상 간에 의견이 갈렸다.
주고수가 화제를 돌렸다.
“오늘 낼 결전이 벌어집니다. 이제 와서 전략을 바꿀 수는 없지요. 이번에 반드시 대정무각을 깨야 합니다.”
등 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정무각은 백정무만 잡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봉황수가 제대로 해낼지 염려가 되는군요. 어젯밤 일권삼각 봉무량이 강부의 공자에게 패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십대고수에 대한 평가를 잘못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종 선생이 토를 달았다.
등 노사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봉무량이 십대고수로 부족했던 게 아니라 강부의 공자가 의외로 무공이 뛰어난 것이라고 봐야 하네.”
주고수가 등 노사를 거들었다.
“솔직히 나도 그 녀석이 그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 줄은 몰랐소. 등 노사가 무림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아시지만 황실에서 그런 고수가 나올 줄 어찌 알았겠소.”
“어찌됐든 십대고수도 변동이 있겠군요. 십대고수 간의 비무는 추진이 되고 있는 건지요?”
이제까지 듣고만 있던 위 태사가 분위기를 무마하고자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 그 또한 왠지 자신을 타박하는 듯 들렸는지 등 노사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염려 마시오.”
종 선생이 또 끼어들었다.
“봉황수와 남궁악의 비무가 성사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십대고수들을 끌어들이실 생각이신지요?”
등 노사는 남궁악이 봉황수에게 도전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그 통에 강호에서는 두 사람의 대결이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남궁악은 강호의 소문에 연연하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있다.
“봉황수가 백정무를 깨뜨리면 자연 십대고수 간의 호승심이 일어날 것이오. 무림인들의 습성은 노부가 잘 아니 걱정 마시오.”
등 노사가 딱 잘라 말했다. 더 이상 말 섞기 싫다는 뜻이다.
분위기가 다시 어색해지자 주고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사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이만 파하고 경성 일전의 결과를 보고 다시 회합을 갖도록 하지요. 오늘 내용은 내가 직접 황성에 정리하여 전달하겠습니다.”
***
후두둑!
흐린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강소군은 작은 강 앞에서 멈췄다.
강물에서 떨어지는 비를 보다 천천히 위쪽으로 걸어갔다. 야트막한 절벽 위에 정자가 놓여 있었다.
“…….”
정자로 다가간 강소군은 낯익은 얼굴을 보고 잠시 멈췄다.
연화심이 앉아서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화심은 마가보와의 싸움 끝에 아버지를 생각하며 오열을 하였다. 이후 대정무각이 나타났고 함께 돌아가자고 했으나 거절하였다.
홀로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강을 만났고 비가 오기에 정자에 앉았다.
연화심이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다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강소군을 만날 줄은 몰랐다.
연화심의 눈은 아직도 축축이 젖어 있었다.
“…!”
강소군은 마치 정수리에 일침을 맞은 듯 크게 흔들렸다.
기이한 일이다.
언젠가 동정호에서처럼 두 사람의 눈이 얽혔다.
그때도 비가 왔고 오늘도 비가 왔다. 그때는 호수였지만 오늘은 강이다.
그래도 축축한 습기와 흐린 하늘, 수면에 떨어지는 빗방울.
자욱한 흙냄새.
그리고.
그때처럼 맑고 큰 눈.
회오리치던 강소군의 감정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강 협?”
연화심은 강소군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이상해서 불렀다.
“…!”
강소군은 그제야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자각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비를 맞고 계세요. 올라오세요.”
강소군이 말없이 정자에 올라 석탁을 사이에 두고 연화심과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강물을 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문득 연화심이 입을 열었다.
“일 년이 다 되어 가네요.”
지난 초가을 강소군을 만나러 가던 날이 떠올랐다.
연화심은 지난 일 년이 꿈만 같았다.
“…….”
강소군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대화를 거의 해본 적이 없네요.”
연화심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눌 말도 없었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소군이 문득 입을 열었다.
“고마웠소.”
“네?”
“그때나 지금이나.”
뜬금없는 강소군의 말에 연화심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어떤 사람은 존재 자체로 도움을 주기도 하는 모양이오.”
이번에는 연화심이 듣기만 했다.
강소군이 무슨 말을 하는지 맥락을 모르니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타고난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도움을 준 분은 강 협이세요.”
몇 차례나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주고 대연의결까지 전수해줬다.
“그런 건 별 게 아니오. 할 수 있으니 했을 뿐이오. 하지만…….”
강소군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두두두두.
빗소리에 섞여 말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화심도 듣고 벌떡, 일어났다.
“한왕의 군사예요.”
강소군은 간밤에 한왕부의 출정식을 봤으니 놀라지 않았다.
“가봐야 하지 않아요?”
연화심이 물었다.
강소군이 멀리 행군하는 한왕의 군사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나는 저들의 싸움에 간여하고 싶지 않소.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따로 있소.”
강소군은 연화심 덕분에 심마에서 벗어나며 이성을 찾았다.
동시에 비로소 그가 해야 할 것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지켜야 할 것이라뇨?”
“…….”
연화심이 물었으나 강소군은 말없이 연화심의 눈을 주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