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긴 밤이었다.
강소군은 한왕의 연회에 초대받아 일권삼각 봉무량과 겨루었으며 마씨부인은 연화심을 유인하여 복수를 하려다 실패했다.
천무방주 구연강은 군사 조개량의 배신에 죽을 뻔했으나 아들 구양수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그 시각 마가보 마정보는 정체모를 적들에게 기습을 받았다.
어두운 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았다. 그리고 누군가는 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 긴 밤이 걷혀가는 새벽 어스름.
강소군은 회한에 사로잡혀 묵묵히 걸었다.
일권삼각 봉무량의 딸이 던진 슬픈 눈으로 인해 강소군은 지난날 벌였던 살겁의 기억이 살아났다.
한왕부의 군졸의 눈 또한 머릿속에서 생생하였다.
그건 마운산의 눈이기도 했고 지난날 군문에 투신하여 첫 출정을 하던 자신의 눈이기도 했다.
그리고 심연에서 떠오르는 눈들.
경악과 공포, 절망, 비애를 담고 죽어가던 눈들이 떠올랐다.
그건 그의 심연에 새겨진 잔상이자 심마였다.
강소군은 혈무의 독이 사라지며 냉철한 이성은 찾았으나 감정만은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죽고 죽이는 충격만 되풀이 하며 그의 감정은 대부분 죽었다. 그저 분노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건 그가 익힌 금단진공의 영향도 있었다.
금단진공은 본래 양의심공에서 나왔기에 도가의 심(心)이 담겨 있었다.
천지불인(天地不仁)
세상을 인간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으니 무수한 감정들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강소군은 사람들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어린 소녀의 슬픈 눈이 죽었던 그의 감정을 뒤흔들었고, 그로 인해 갖가지 감정이 폭발하는 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심히 걷고 있는 듯했으나 그의 내면은 폭풍과도 같은 상태였다.
“…….”
심마(心魔)의 경계선을 걷고 있던 강소군은 마가보가 습격을 받아 전멸하는 현장과 맞닥뜨렸다.
즐비한 시신과 흥건한 피.
강소군이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을 봤다.
‘저들은 이 아침을 보지 못했구나.’
생명을 잃고 대지에 나뒹구는 이들의 육신에 그의 가슴이 먹먹했다.
그는 처연한 심정에 휩싸여 눈을 감았다.
“…!”
느닷없이 나타난 강소군 때문에 흑의복면인들과 마가보의 싸움이 잠시 주춤하였다.
‘웬 미친놈이지?’
강소군을 보는 흑의복면인 중 하나가 옆에 있는 이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장내를 둘러보고는 하늘을 쳐다보다 아예 눈을 감았다.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죽여!’
복면인 중 하나가 고갯짓을 하였다.
그러자 복면인 둘이 말없이 달려들었다.
살인멸구.
죽이려는 의지가 먼저 강소군에 닿았다.
그들의 무심한 눈빛이 강소군과 마주쳤다.
순간 강소군의 뇌리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살인자의 눈이야!’
한왕부의 군졸은 자신을 향해 창을 내질렀으나 지금 이 자들과는 달랐다.
그 눈에는 공을 세워 입신양명을 하고자 하는 야망, 앞날에 대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게 강소군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디딤돌이었을 것이다. 강소군은 상부에서 규정한 적이었고, 적을 죽여야만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지난날 강소군이 군문에 투신하였을 때의 눈빛이었다.
그 또한 그때는 명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나라를 위해, 민족과 백성을 위해.
그가 전장에서 적과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웠던 이유는 그가 바라는 세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스스로 정한 게 아니라 애초에 규정되어 운명처럼 드리운 사명이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죽고 죽이다 그 사명이 결코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의심이 들었다.
죽어가는 동료도,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적도 다 같은 사람이었다. 더운 숨을 내쉬는 목을 자르며 그의 감정은 죽어갔다.
그렇게 죽이고 죽이다 문득 자신의 눈빛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든 생각이 살인자의 눈이었다.
지금 달려드는 흑의복면인들의 눈빛이 그랬다.
그저 죽이고자 하는 의지만 있을 뿐이다. 아무런 욕망도 감정도 없다.
그들에게는 이유가 필요 없었다. 눈앞에 있으니 죽이는 것뿐이다.
“…!”
그 눈은 불과 얼마 전까지 그의 눈이기도 했다.
‘살인자의 눈!’
강소군의 뇌리에서 다시 한번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강소군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분노가 터지더니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의 손이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날아드는 검을 쳐내고 곧바로 흑의복면인들을 향했다.
퍽! 퍼퍽!
달려들던 복면인들의 머리통이 박살났다.
엄청난 타격을 받은 흑의복면인들이 일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뒤집어 쓴 복면 아래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새벽에 다시 시신이 두 구 늘었다.
강소군은 멍하니 서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았으나 그의 눈에는 피범벅으로 보였다.
강소군은 석상처럼 굳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속삭였다.
나라를 위해?
민족과 백성을 위해?
아니잖아?
너는 살인자야!
‘고수다!’
복면인들은 경악하였다.
그들은 말을 극도로 자제하였다. 서로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강소군이 고수라는 걸 알자 잔뜩 경계를 하며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흑의복면인들의 관심이 강소군에게 쏠린 덕분에 마정보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살아남은 마가보의 무사는 불과 세 명.
마정보의 절망에 휩싸인 시선이 무사의 등에 업힌 마씨부인에게 향했다.
“으음.”
공교롭게도 마씨부인이 깨어났다.
마정보는 광기에 휩싸였던 누이동생의 혼혈을 짚어 놓았는데 시간이 가며 풀린 것이다.
“뭐야?”
마씨부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업고 있는 무사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윽!”
무사가 엎어지고 마씨부인이 내려섰다.
“그년 어디 갔어?”
마씨부인의 눈에 광망이 번뜩였다.
“이화야!”
마정보가 안타까이 외쳤으나 마씨부인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씨부인은 아들의 원수라고 여겼던 연화심을 눈앞에서 놓치며 정말 미쳐버린 것이다.
“내 아들 어딨어?”
마씨부인이 청동관을 찾았다.
마정보가 누이동생의 완맥을 잡아 제압했다.
“제발 정신 차려라. 양운이는 죽었잖느냐? 잘 보내주었으니 이제 잊어라.”
마정보는 묘지 구덩이에 청동관을 묻고 묘를 조성했다.
“보내다니? 왜 보내? 내 아들을 왜 보내냐고?”
마씨부인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러다 강소군을 보았다.
헌칠한 키에 하얀 얼굴. 마씨부인은 새벽 어둠 속에서 강소군을 아들로 착각했다.
“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마씨부인이 마정보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양운아!”
마씨부인이 강소군을 향해 외치며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중간에 흑의복면인들이 있었다.
“위험해!”
마정보가 소리쳤으나 이미 늦었다.
흑의복면인들은 갑자기 미친 여자가 뛰어들자 검과 도를 휘둘렀다.
퍼퍽!
푹!
마씨부인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 개자식들아!”
마정보는 누이의 죽음에 분노하여 이성을 잃었다.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며 달려갔다. 그 기세에 흑의복면인들이 주춤 거리며 물러났다.
“이화야!”
마정보가 마씨부인을 일으켰는데 그녀의 두 눈은 강소군을 향해 있었다.
“아냐, 양운이가 아니야.”
마씨부인은 죽기 직전에야 제정신을 차렸다.
강소군은 휘몰아치는 숱한 감정으로 인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웬 중년 여인이 자신을 아들이라 부르며 달려오다 죽는 걸 봤다.
마가보도 흑의복면인도 표식을 달고 있지 않아 대체 어느 세력이 충돌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소군에게는 모두 낯선 이들이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자신을 아는 듯 달려오다 죽었다.
“…….”
강소군의 눈이 마씨부인의 눈과 마주쳤다.
생기가 꺼지는 눈에 담긴 감정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알아들었다.
“아냐, 양운이가 아니야.”
그녀는 그 말 한마디를 하고 머리를 떨궜다.
천무방의 안주인이자 마가보의 직계로서는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마정보가 마씨부인을 안아 들고 도를 세웠다.
“섬서 마가보의 소보주 마정보는 이제 대정무각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그의 두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강소군은 그런 일련의 과정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와는 상관없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희극 같았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독한 현실과 충돌하며 강소군의 심마는 한층 증폭하였다.
심기쌍수(心氣雙修)
정도의 무공이 심기쌍수를 강조하는 이유가 절정 이후 다가오는 심마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대개 심마는 무공이 초절정에 든 이후 찾아온다.
초절정은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극한의 경지다. 이를 넘어서 절대의 경지로 간다는 건 인간의 한계를 넘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육신의 수련과 더불어 정신 또한 평범한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넘어설 때 가능하다.
절대경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 안에서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절대고수는 인간을 넘어선 초인(超人)이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강호에 절대고수가 여럿이라 하나 과연 진정한 의미의 절대고수가 몇이나 되는 지는 의문이다.
강소군은 독무와 금단진공의 작용에 의해 절대의 경지로 들어갔으나 심적인 면에서는 극히 불안정하였다.
그랬기에 쉽게 심마에 빠져들었다. 그건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었다.
진정한 절대경지의 존재로 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
강소군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포위한 흑의복면인들도 따라서 움직였다.
‘이놈, 이상하다.’
흑의복면인들은 강소군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육신은 있으나 영혼은 마치 이 자리에 없는 사람과도 같았다.
흑의복면인들이 눈빛을 나눴다.
‘개입하지 않으면 그냥 보낸다.’
강소군의 무위를 본 이상 굳이 화를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흑의복면인들은 슬그머니 포위를 풀었다.
강소군은 마치 물이 흘러가듯 천천히 살육의 현장을 지나갔다.
마정보 역시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강소군이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마정보는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다.
마가보 무사에게 마씨부인의 시신을 업으라고 한 후, 다른 무사들과 함께 품자형 수비진을 이뤘다.
“내가 길을 열겠다!”
마정보는 아직까지 강소군을 경계하며 주춤거리는 흑의복면인 무리 가운데 가장 포위망이 옅은 쪽으로 달려 나갔다.
“막아라!”
챙! 카강!
다시 인간의 싸움이 시작됐다.
강소군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심히 걸어 새벽 여명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두두두두.
한 떼의 군마가 달려왔다.
무수한 기치창검이 한왕부의 군임을 알렸다.
공교롭게도 경성을 향해 출정하는 한왕의 군대가 들이닥친 것이다.
흑의복면인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관도를 벗어나 사라졌다.
“앞에 누구냐?”
장수 하나가 달려왔다.
마정보가 그제야 살아났음을 실감하였다. 그러자 대정무각에 대한 원한이 솟구쳤다.
마정보의 기나긴 밤은 이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