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조개량은 담담한 시선으로 구연강을 주시하였다. 십대고수를 앞에 두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구연강이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군. 개량, 대체 뭘 원하는 것이냐?”
구연강의 목소리는 극히 차가웠다. 조개량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그저 천무방주로 강호의 패자가 되는 것뿐입니다.”
너무나 어이없는 말에 구연강이 실소를 흘렸다.
“그런가? 그래서 자네가 얻는 것은 뭔가?”
“그것까지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조개량이 탄식을 하였다.
“때로는 모르고 지나는 게 오히려 좋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딱 들어맞는 말이지요.”
“….”
“모른 척하시지 그랬습니까. 그랬다면 황제와 한왕은 양패구상할 것이고 천무방은 강호를 일통할 수 있었을 텐데.”
구연강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조개량이 무얼 믿고 이리 대담하게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살은 아직 홍화훈의 마비가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 접하게 되면 적어도 한 식경은 마비 효과가 지속된다.
조개량 역시 무공을 익혔지만 구연강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지금 구연강이 손을 쓰면 두 사람은 죽은 목숨이다.
그러나 조개량과 같은 영리한 자가 대책도 없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연강은 당대에 천무방을 천하사패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심계로만 따지면 조개량 못지않다. 상대의 수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그 역시 탐색만 할 뿐이다.
구연강이 조개량을 노려봤다. 조개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신무와 참룡을 대기시키겠습니다. 한왕을 도와주는 겁니다. 딱 양패구상할 만큼만.”
“네가 신무와 참룡대마저 녹여 버릴 생각이냐?”
“그들은 어차피 버릴 패입니다. 방주께는 십이지대가 있지 않습니까?”
“십이지대가 과연 나의 수족인지가 궁금하군.”
“당연히 천무방의 무력이지요. 그렇게 키웠잖습니까?”
조개량의 말이 묘했다. 구연강이 아니라 천무방의 무력이라고 했다.
“그런가? 한데 말이지 정말 궁금하군. 네가 내 앞에서 이렇게 빳빳하게 머리를 쳐들고 혓바닥을 굴릴 수 있다는 게 말이야.”
구연강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렸다.
“그리 말씀하시니 약간 두렵기는 하군요.”
조개량이 짐짓, 정색을 하고 말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조롱하는 듯 보였다.
‘이 자식이?’
구연강은 당장이라도 살수를 쏟아내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눌렀다.
조개량이 원하는 건 황제와 한왕의 양패구상이다. 어느 쪽이 보좌를 차지하던 큰 피해를 입기 바라는 것이다.
그건 구연강의 관심 밖의 일이다. 누가 황제가 되든 그와는 큰 상관이 없다. 그보다 지금 조개량이 무슨 패를 쥐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조개량은 구연강의 그런 속을 들여다본 듯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렇게 주제넘게 구는 이유가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제 손에 몇 사람의 생사가 달려 있다면 이해하시겠습니까?”
“…?”
“방주님의 홍화훈은 확실히 놀라운 한 수 였습니다. 여기 천살 어르신께서 꼼짝없이 당할 뻔했지요.”
조개량의 말에 천살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두 공자님들도 그런 묘수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군요.”
구연강의 안색이 굳었다.
구양조와 구양수에게는 각각 지살과 풍살이 붙어 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공자께서 제 뒤를 캐느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던데 헛수고는 그만하고 어서 돌아오셨으면 좋겠군요.”
“만약 내 아들들을 건드리면 너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구연강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저도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공자는 좀 귀찮더군요. 방주님께서는 잘 모르시나 본데, 이공자야말로 방주님을 가장 빼닮았습니다. 확실히 음험한 구석이 있지요.”
“흥!”
구연강이 코웃음을 쳤다.
‘이놈이 시간을 끌고 있구나!’
구연강은 조개량이 중언부언 늘어놓자 시간을 벌고자 하는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역시 만만치 않군.’
조개량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운명이 이 며칠에 달려 있다. 그러니 자신을 의심하더라도 일이 일단락되고 나서 행동에 나설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구연강은 한왕이 거병하기로 한 새벽에 갑작스레 천살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다음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조개량이 모를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진면목의 일부를 드러내며 천살을 살리고 시간을 끄는 중이다.
‘아깝지만 할 수 없지.’
원래 패도적인 구연강은 천하일통까지 쓰는 패였다. 조개량은 이른 감이 있지만 구연강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구연강이 자신을 의심하기 이전부터 천무방의 앞날을 준비해 왔다.
큰 골자는 천무방으로 강호를 일통하고 구양조를 차기 방주로 옹립하는 것이다.
조개량에게는 사사건건 자신을 시험하는 구연강보다 구양조가 편했다.
그래서 구양조가 직접 낙양으로 가서 자신의 뒷조사를 하는 것도 방관하였다.
물론 자신의 출신은 완벽하게 맞춰져 있다. 구양조가 직접 두 눈과 귀로 확인을 하면 더 이상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장원 주위에 십이지대 무력이 넷이나 있지요.”
“그들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물론 아니지요. 그들은 신무와 참룡이 다가오는 걸 막을 겁니다.”
조개량이 손을 저어 부인하고 말을 이었다.
“방주님께 그간 천살이 있었으나 제게도 암중 호위가 한 분 계시지요.”
구연강의 미간이 좁혀졌다.
조개량에게 암중 호위가 있었다는 건 생각지 못했다. 이는 그가 눈치채지 못할 고수라는 뜻이다.
“그분이라면 여기 천살 어르신과 함께 방주님을 저세상으로 모실 수 있을 겁니다.”
“…!”
“그 다음이 중요하지요. 모든 일은 뒤처리가 깔끔해야 합니다.”
조개량이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마씨부인께서 마가보의 고수들을 이끌고 연 낭자를 잡으러 갔더군요.”
“….”
“그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대정무각을 만날 거니까요. 그들이 몰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급보를 전해 들은 방주님은 이 새벽에 단신으로 달려가시는 겁니다.”
조개량이 씨익, 웃었다.
“거기서 대정무각의 암수에 걸려 돌아가시겠지요. 어떻습니까? 제 계획이.”
“흐흐흐. 그렇게 해서 천무방과 대정무각을 충돌시키겠다?”
“물론 대정무각이 일방적으로 당하겠지요. 도룡회와 결판이 날 무렵 가서 다 쓸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방주님께서 원하는 무림일통이 이뤄지는 거지요.”
“내가 없는 무림일통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이냐?”
구연강이 실소를 흘렸다.
“대공자께서 방주님의 뒤를 이어 무림을 이끌 겁니다. 저세상에서 편히 쉬며 지켜보시죠.”
“궁금하군. 이런 계획까지 세세하게 설명하며 시간을 끄는 이유가 무엇인지.”
구연강이 물었다.
이제 조개량의 패가 나왔다. 정면으로 돌파할 시간이다.
구연강은 자신의 무공을 믿었다.
“조개량, 너는 역시 한낱 책사에 불과하구나.”
구연강의 전신에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가 손을 뻗자 벽에 걸려 있는 검이 날아와 잡혔다.
“결국은 힘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걸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라는 경지에 이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을 테니.”
-스르릉.
구연강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하하하!”
조개량이 들고 있던 섭선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결국은 검을 뽑으셨군요.”
구연강이 의아해하다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이상한 향이 풍기는 듯했다.
조개량이 웃으며 말했다.
“그 검은 제가 구해 드린 것이지요.”
구연강이 안색이 돌변하였다.
“방금 제가 날린 비도가 어디로 갔던가요?”
구연강이 벽을 바라봤다.
조개량이 날린 비도는 홍화훈을 뿜는 초를 끄고 벽으로 날아가 구연강의 검에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제가 무공은 방주님에게 뒤질지 몰라도 비도술 하나만큼은 열심히 연마했습니다.”
조개량이 검집을 가리켰다.
“비도가 맞은 부분을 살펴보시죠?”
구연강이 검집을 보았다. 검집에는 용이 그려져 있었는데 눈 부분이 찍혀 있다.
“용의 눈에 충격을 주면 독기가 퍼지죠. 화룡점정이라고나 할까요?지금쯤 눈이 따가우실 텐데요?”
“이, 비겁한 놈….”
“홍화훈을 쓰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곤란하지요.”
구연강이 어금니를 깨물고 검을 겨눴다.
“이까짓 독이 네놈 목을 지켜 주지는 못할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방주님의 목보다는 나중에 떨어질 테니까요.”
조개량이 크게 웃었으나 내심 초조했다.
지금쯤 들어왔어야 할 암중 호위가 소식이 없다.
-홍화훈 마비는 풀리셨소?
조개량이 전음으로 천살에게 물었다.
-아직 완전치는 않다만 구 방주 역시 독에 당했으니 버틸 만할 것 같다.
조개량이 따져 봤는데 아무래도 암중 호위가 나타나야 확실하게 구연강을 잡을 것 같았다.
“네놈의 암중 호위도 불러라!”
“이미 와 있을 겁니다. 방주께서 손을 쓰시면….”
그때 열린 창문으로 뭔가 날아들어왔다.
조개량 등이 본능적으로 피했다.
-쿵!
“…!”
“…!”
바닥에 떨어진 것은 놀랍게도 사람 머리였다.
조개량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자신이 기다리던 암중 호위의 머리다.
“이, 이런….”
조개량이 자기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 사람은 이렇게 죽어 있을 사람이 아니다.
“에이, 씨팔. 아까워라.”
밖에서 누군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양수?”
조개량은 그게 누구 목소리인지 바로 알아챘다.
창문으로 구양수의 얼굴이 나타났다.
“저놈이 내 탈혼백통을 쓰게 만들었지 뭐야?”
구양수가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독 천지이니 무서워서 들어갈 수가 없군.”
구연강이 자신의 둘째 아들을 봤다. 장강 유역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왔는지 궁금했으나 일단 반가웠다.
“신무와 참룡을 불러라.”
“그보다 저놈부터 죽여주시죠.”
구양수가 조개량을 가리켰다.
조개량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구양수가 어찌 나타난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풍살은 왜 아무런 말이 없었단 말인가.
풍살은 구양수의 호위이자 조개량의 이목이다. 며칠 전 보고도 정상적이었다. 그런데 어찌 구양수가 제멋대로 굴 수 있는 걸까?
“네가 어찌… 풍살은?”
“풍살? 그 음침한 늙은이? 죽었지. 밀지 보내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좀 닦달했더니 맥없이 죽더라고.”
구양수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조개량을 보고 웃었다.
***
“크윽!”
또 한 명의 마가보 무사가 쓰러졌다.
“대정무각! 이 비겁한 놈들!”
마정보가 고함을 지르며 앞에 있는 복면인을 향해 도를 그었다.
“컥!”
복면인은 죽어 가면서도 그를 향해 검을 찔렀다.
대정무각과 잠시 대치하다 헤어진 마가보는 구연강이 있는 장원으로 오다가 기습을 당했다.
복면인들은 나타나자마자 말없이 살수를 펼쳤다.
마정보는 그들을 대정무각으로 오인하였다.
묘지에서 일단 안심시켜 놓고 매복했다가 기습을 가한 것이라 여겼다.
마가보 무사들은 대부분 죽고 뒤를 따르는 이는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그중 하나는 마씨부인을 업고 있으니 전력이라고 할 수 없었다.
복면인들은 마치 사냥을 하듯 마가보 무사들을 포위하고 도륙하였다.
마정보가 발이 빠른 무사를 불렀다.
“엄호할 테니 포위망을 탈출하여 천무방에 알려라.”
마정보가 돌진하여 포위망을 흔들었다. 그 사이 무사가 탈출하였다.
“진작 좀 보내지.”
복면인 하나가 탈출하는 마가보 무사의 뒷모습을 보며 투덜거렸다.
마정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함정?’
그러나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전령을 보내자마자 복면인들의 공격이 바뀌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살초가 이어졌다.
“큭!”
마가보 무사가 또 쓰러졌다.
“이, 천인공노할 놈들!”
마정보가 으르렁대며 도를 세워 달려드려다 멈췄다.
관도 저편에서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강소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