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06화 (106/250)

106

연화심이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나를 찾아온 자들이에요. 번거롭게 할 수 없어요.”

연화심은 눈짓으로 염기창과 장영영이 있는 후원을 가리켰다.

여기서 싸움이 벌어져 엉뚱한 사람이 다치기를 원치 않았다.

“연 낭자 역시 이 집의 손님입니다. 그냥 보낼 수 없지요. 정히 그렇다면 제가 동행하지요.”

마침 강란과 장오도 자신의 거처에서 나왔다.

강하가 두 사람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따라나섰다.

“젊은이가 의기가 넘치는군.”

복면인 우두머리가 감탄하였다.

복면인들이 제집인 양 대문을 열고 나갔다.

연화심과 강하가 복면인들을 따라나섰다.

전쟁을 코앞에 둔 경성은 밤거리를 지나는 이가 없었다.

순찰을 도는 군사들만 오갈 뿐이다. 그러나 무림인들이 작정하고 달리니 군사들은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

복면인들은 성을 넘어 달리다 어느 순간 멈췄다.

연화심이 주위를 둘러보다 흠칫, 놀랐다. 달빛 싸늘하게 내린 묘지였다.

커다란 구덩이가 하나 파헤쳐져 있고 그 앞에 커다란 청동관이 하나 놓여 있었다.

“흐흐흐. 드디어 네가 왔구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중년 미부가 나왔다.

구연강의 내자이자 구양운의 생모인 마씨 부인이었다.

독기를 품은 눈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이게 무슨 짓이죠? 묘를 파헤치다니?”

“흥! 누가 묘를 팠다고 그러느냐? 이제 장례를 치를 건데.”

마씨 부인이 연화심을 노려보았다.

“장례?”

“너 때문에 죽은 네 아들의 원혼이 구천을 떠도는데 어떻게 땅에 묻을 수 있다는 말이냐?”

연화심이 흠칫, 놀랐다.

“흐흐흐. 맞다. 내 아들이 저기 관에 누워 있지.”

마씨 부인의 웃음소리가 묘지의 음산한 분위기와 섞여 기괴하게 들렸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망자의 시신을 끌고 다녔다는 말이에요?”

구양운이 죽은 지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관 안에 누워 있을 부패한 시신을 생각하니 연화심은 토할 것만 같았다.

“호호호. 걱정 마라. 내 아들의 시신은 영원히 썩지 않을 테니.”

마씨 부인이 구덩이 앞에 놓인 관으로 다가갔다.

청동 관짝을 밀자 구양운의 시신이 나타났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정말 살아 있을 때 그대로였다. 달빛을 받은 얼굴이 푸르뎅뎅하다.

무더운 여름밤임에도 연화심은 으스스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잘생긴 내 아들이 죽다니!”

시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마씨 부인의 눈에 광망이 어렸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마씨 부인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연화심을 노려봤다.

“네년의 심장을 꺼내 함께 묻을 것이다.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미쳤군요.”

연화심은 마씨 부인의 광기에 떨었다.

강하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주위를 살폈다.

집으로 찾아온 복면인들 외에도 삼십여 명가량이 더 있었다.

복면인 우두머리가 강하에게 말했다.

“너와는 따로 원한이 없다. 가라!”

“흥! 그럴 수는 없어요!”

마씨 부인이 소리쳤다.

“이자와는 아무런 은원이 없다. 복수는 당사자와 직접 해결하는 게 맞다.”

복면인 우두머리가 마씨 부인에게 말했다.

“흥! 오라버니는 조카의 원수가 누군지 모르는가 보네요.”

마씨 부인이 복면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놈은 그놈의 수하다. 그놈의 수족은 모두 죽일 것이다.”

복면인 우두머리가 탄식을 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저년부터 잡아! 내가 직접 심장을 꺼낼 것이야.”

마씨 부인이 연화심 앞으로 다가왔다.

-스르릉.

연화심이 검을 뽑았다.

복면인들이 말없이 연화심을 에워쌌다.

강하도 검을 뽑아 연화심의 옆에 섰다.

우두머리가 손짓을 하자 복면인들이 몸을 날려 덮쳐 왔다. 도광이 비산하였다.

-챙!

연화심의 검이 유려하게 허공을 그었다. 달빛을 받은 검광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따다당!

연화심은 강하의 앞을 가로막고 자신을 향해 짓쳐오는 도들을 모두 쳐냈다.

“으흠!”

지켜보던 우두머리의 입에서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하는 연화심의 검법이 신묘함을 알았다. 앞을 맡기고 뒤에서 다가오는 적을 향해 검을 겨눴다.

-쉬쉬식!

복면인들의 도가 강하를 향해 떨어졌다.

강하의 검은 차분하였다. 당황하지 않고 도세를 막아 갔다.

하지만 복면인들도 만만치 않았다.

강하는 연화심의 뒤를 지킨다는 생각으로 방어에 치중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기에 형세가 불리하게 이어졌다.

“크윽!”

그때 뒤에 있던 복면인이 신음을 지르며 쓰러졌다.

“오라버니!”

날렵한 신형이 날아와 강하의 옆에 내려섰다.

강란이었다.

“집을 지키라고 했잖느냐?”

“오라버니만 보낼 수는 없잖아요.”

강란이 검을 겨누며 말했다.

연화심과 강하, 강란 남매는 자연스레 등을 지고 품자형을 이뤘다.

“호호호. 제물이 하나 더 늘었구나!”

마씨 부인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어두운 묘지에 울려 퍼졌다.

“저 여자는 미쳤어!”

강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뒤에 숨어서 모든 걸 지켜봤던 것이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저 년놈들을 죽이지 않고!”

마씨 부인의 독기 어린 고함에 나머지 복면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료가 쓰러지자 벼르고 있던 복면인들이었다.

-챙! 채챙!

난전이 벌어졌다.

세 사람이 삼재진을 이루고 막으니 수십 명에 이르는 복면인들도 일순 어쩌지를 못했다.

“진을 깨라!”

우두머리가 외쳤다.

그러자 복면인 세 명이 쇄도하였다.

-쉬익.

“크억!”

먼저 달려들던 복면인이 가슴을 베여 나뒹굴었으나 뒤이어 온 복면인이 도와 함께 다시 쏘아져 왔다.

그들은 가장 약한 강란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강란이 내려찍는 도를 비껴냈는데 다른 복면인이 쇄도하며 횡으로 도를 그었다.

“란아!”

강하가 다급한 나머지 자신의 검으로 막았다.

그 사이 강하가 상대하던 복면인이 강하의 옆구리를 내리찍으려 들었다.

강하가 빙글 돌며 검을 회전시켜 막았다.

-쨍!

검은 막았으나 세 사람의 품자형 진이 깨졌다.

“조심하시오!”

강하는 연화심의 뒤를 노리는 복면인을 향해 몸을 날리며 외쳤다.

-따당!

연화심은 뒤에 눈이 달려 있기라도 하듯 빙글 돌며 자신의 등을 노리는 도를 쳐냈다.

순간 전면을 노리고 있던 적들이 일시에 도를 쳐 왔다.

내려찍고 횡으로 쓸고 사선으로 긋는 도세에 연화심이 갇히고 말았다.

순간 연화심의 신형이 푹 꺼지는가 싶더니 일곱 개의 검광이 피어올랐다.

‘칠성회천(七星回天)!’

연화심은 이를 악물고 전신 내력을 모두 끌어 올렸다.

-따다당!

검광이 날아드는 도와 부딪치며 요란한 폭음이 일었다.

-팍!

도 한 자루가 연화심의 검과 제대로 부딪치며 부러졌다.

“검기?”

우두머리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연화심의 검에 어린 푸르스름한 기운은 분명 검기였다.

“이이익! 죽어랏!”

마씨 부인은 복면인들이 연화심을 제압하지 못하자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파라락!

마씨 부인의 손에서 마치 채찍과도 같은 하얀 빛이 펼쳐졌다. 가느다란 연검이 뱀의 혓바닥처럼 요동치며 연화심의 전신을 훑었다.

“아앗!”

연화심은 갑작스런 마씨 부인의 광기 어린 공세에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뒤에서도 복면인들이 달려들었다.

유일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은 허공뿐이었다.

“하앗!”

연화심이 한 줄기 소성을 내지르며 몸을 솟구쳤다.

허공으로 몸을 띄우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다른 수가 없었다.

강하와 강란 남매가 연화심이 내려설 자리를 선점하려 하는데 복면인들이 가로막았다.

-파파팍!

마씨 부인이 마구 휘두르는 기다란 연검이 허공에 뜬 연화심을 감아 갔다.

-따다당!

연화심이 연달아 검을 휘저으며 연검을 쳐냈으나 기묘한 변화를 모두 제압할 수가 없었다.

-쉬쉬식!

연검이 연화심의 가슴과 허벅지를 스치며 지나갔다.

‘윽!’

연화심이 신음을 삼키며 땅에 내려섰다.

연화심은 절정에 이른 고수였으나 복면인들 또한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게다가 마씨 부인의 연검은 기병이라고 할 만큼 유난히 길고 변화가 무쌍하여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착지한 연화심을 향해 대여섯 자루의 도와 마씨 부인의 연검이 쏟아졌다.

연화심은 문득 무창쌍과의 과에 찔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생사가 오가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듯 잡념이 사라지고 차분해졌다.

연화심이 회전을 하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 밤하늘을 지나는 유성처럼 검이 허공을 그었다.

-따다당!

연화심을 향해 내려찍던 도와 연검이 연화심의 검에 말렸다가 일시에 튕겨 나갔다.

“헉!”

복면인 우두머리가 숨을 들이켰다.

연화심의 검은 초식이랄 게 없었다. 그럼에도 달려드는 도를 제압하고 모두 튕겨냈다.

모두가 일시 멈췄다. 연화심이 방금 보여준 수는 거의 절대고수의 경지라고 할 수 있었다.

복면인들은 자신의 도를 쳐다봤다.

칼날은 하나같이 금이 가 있거나 큼지막하게 이가 빠져 있었다. 연화심의 검에 실린 기운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복면인들은 마가보의 고수들이다. 그럼에도 이제 갓 스물이 될까 말까 한 젊은 여인의 검 하나를 당하지 못했다.

모두가 망연자실하였다.

연화심은 자신이 진정한 절정의 경지에 올랐음을 느꼈다.

‘천성육십사식은 검로일 뿐이다. 길을 따라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네가 갈 길은 네가 열어야 한다.’

연화심은 중랑이 왜 초식을 버리라고 했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그때.

“크아아!”

마씨 부인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연검이 미친 듯이 파닥였다.

그러나 연화심은 가만 검을 겨눌 뿐이다.

“이화야!”

그때까지 지켜만 보던 우두머리가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연화심은 마씨 부인의 연검과 마주치는 순간 검을 비틀었다.

-파파팍!

전신 내력이 담긴 검이 회전하자 연검이 박살이 났다.

연화심의 검은 멈추지 않고 마씨 부인의 가슴을 향해 쇄도하였다.

“아앗.”

마씨 부인이 자신의 가슴을 찔러 오는 검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막 가슴을 파고들려는 순간 검이 멈췄다.

“….”

그대로 내밀면 마씨 부인의 심장을 관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화심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연화심은 아버지를 잃고 혈육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자식을 잃고 광기에 휩싸여 날뛰는 여인을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복면인 우두머리의 대도가 허공에서 떨어져 연화심의 검을 내리찍었다.

연화심이 손목을 감아 검을 회수하자 대도는 허공을 그었다.

복면인 우두머리가 옆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망연자실하여 서 있는 마씨 부인의 요혈을 짚었다.

마씨 부인이 축 늘어지자 복면인이 부축하였다.

우두머리가 복면을 벗었다.

머리가 희끗한 장년인이었다.

“손에 사정을 두어 고맙군.”

장년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강호의 은원은 맺기는 쉬워도 풀기는 어렵지.”

장년인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오늘 한 목숨을 받은 것으로 마가보는 손을 떼겠네.”

장년인이 말했다.

연화심은 말없이 청동관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한 처지가 떠올랐다.

‘아버지와 숙부들은 어찌 되셨을까?’

연화심이 돌연 주저앉아 오열을 터뜨렸다.

소리 없는 오열이었다.

복수에만 미쳐 유해를 돌볼 생각조차 못한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그때.

“잘 생각하셨소.”

한 떼의 사람들이 걸어왔다.

노이칠과 대정무각 사람들이었다.

대정무각은 강소군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다.

마가보의 습격은 곧바로 보고되었고 노이칠이 자신의 수하들을 끌고 쫓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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