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05화 (105/250)

105

천무방주 구연강의 이맛살이 잔뜩 구겨졌다.

“그놈이 걸어 나왔다고?”

“일권삼각을 해치운 뒤 그냥 걸어 나왔습니다.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한왕부의 군졸로 잠입했던 천무방의 간세가 부복하고 당시 정황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물러가라.”

간세를 보내고 구연강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직접 겨뤄 본 강소군의 무공이라면 제아무리 많은 군졸들이 있더라도 한왕의 머리를 취했을 것이라 예측했다.

그런데 강소군이 그냥 나왔다고 하니 내심 아쉽기 짝이 없었다.

옆에 서 있는 신기수사 조개량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마리 용이 부딪쳤는데 아무 일도 없이 끝났다니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구연강의 한 수는 조개량이 보기에도 무척 훌륭했다.

한왕의 성품을 꿰뚫어 본 수였다. 구연강은 삼초지약의 공증인으로 한왕을 초청하여 강소군의 무공을 보여 주었다.

그의 예측대로 강부에 대해 사감이 깊었던 한왕은 고수를 섭외하여 강소군을 제거하려 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죽거나 적어도 동귀어진해야 했다.

그런데 일이 엉뚱하게 흘러갔다.

‘골치 아프군.’

조개량에게 다른 속셈이 있기는 하나 지금은 구연강과 한배를 타고 있다.

강소군은 조개량에게도 반드시 제거해야 할 존재였다.

조개량이 구연강을 보았다.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구연강의 옆머리가 희끗희끗하다.

어찌 됐든 지난 수년 동안 동고동락을 했던 구연강이다.

자기 손으로 구연강을 제거하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조개량은 구연강과 강소군이 양패구상하는 경우의 수를 헤아렸다. 그 통에 구연강이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다.

“개량!”

조개량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구연강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아,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게 중요한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할 게 아닌가? 한왕의 출병이 내일이네.”

한왕이 출정하여 황군과 대치하는 데 하루가 걸린다.

그 직후 도룡회가 경성으로 난입하면 대정무각이 나설 것이다.

그 사이 천무방이 황성을 노린다는 게 한왕과의 밀약이다.

구연강이 조개량을 노려봤다.

답을 내놓으라는 뜻이다.

조개량은 왠지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구연강이 이제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였다.

‘아무래도 조만간 이 짓도 끝내야 할 것 같구나.’

내심 속으로 생각하면서 조개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한왕은 백전백승의 용장입니다. 게다가 도룡회를 장악했지요. 하지만 황군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차라리 뒤로 빠져 있는 게 좋겠습니다.”

구연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심한 눈이 조개량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뒤로 물러나 있으라. 한왕과의 약조를 저버리라는 것인가? 그러다 한왕이 황위를 차지하면?”

조개량이 원하는 반응이었다.

“차선책은 신무와 참룡만 참전시키는 것입니다.”

“십이지대는 감춰 둔다?”

천무방의 진정한 힘은 십이지대다.

조개량이 담담히 말했다.

“어차피 한왕군과 황군의 결전이 성패를 좌우할 것입니다. 신무와 참룡이 황성 공략에 성공하면 다행이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최선을 다한 것이니 한왕도 뭐라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황군이 승리하면?”

“물론 신무와 참룡은 천무방이 아닌 도룡회의 복장으로 참전해야지요.”

구연강이 곰곰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섣불리 결정할 일이 아니다. 아직 하루의 여유가 있으니 그때까지 전황을 살펴 시시각각으로 보고하라.”

조개량이 물러났다.

구연강이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무림이 그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이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대정무각과 도룡회는 부딪칠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쪽이 승리를 하더라도 곧바로 천무방 십이지대가 나서면 끝장을 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천하사패는 사라지고 오로지 천무방만 홀로 남는다.

이미 진마대와 천무방 무인들이 장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을 것이다.

장강과 황하.

그리고 대운하.

천하상권의 대동맥이다.

세 강의 줄기만 장악하면 그다음 행보는 한결 가볍다.

그런데도 구연강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방금 집무실을 떠난 조개량의 얼굴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개량은 침상 머리 위에 매달린 비수와 같은 놈이다.

‘그놈을 너무 믿었다. 아니, 과소평가한 거야.’

구연강도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십이지대가 조개량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조개량이 비밀리에 무력을 키워야 한다고 하였을 때 좋은 생각이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강호의 이목을 속이고자 방내에도 알리지 않고 키웠다.

그런데 그게 지금 와서 과연 자신의 무력인지 의문이 갔다.

구연강은 결단을 내려야 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후….”

구연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밤인데 돌연 책상 위의 촛불이 흔들리더니 꺼졌다.

구연강이 화섭자에 불을 붙여 초를 다시 켜고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얼굴 좀 보세.”

촛불이 잠시 흔들리더니 그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주름진 얼굴.

허름한 마의를 걸친 노인이 그의 앞에 내려섰다.

천살이었다.

“그 사이 더 주름이 많아졌군.”

“이 밤에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는지요?”

천살의 눈은 아무런 빛이 없었다. 전형적인 자객의 눈이다.

구연강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노사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었소.”

구연강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천살의 늘어진 눈꺼풀이 잠시 흔들렸다.

구연강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그 의미를 천살도 알아다.

“이제 우리의 계약을 끝내고 싶소. 가시오.”

“….”

천살은 움직이지 않았다.

구연강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꽤 되지 않았소?”

“….”

“나름 우의를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만의 생각이었나 보구려.”

구연강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조개량은 천무방의 직계를 호위하기 위해 천지풍운을 데려왔다.

구연강은 그들의 진심을 헤아리기 위해 수없이 시험하였다.

수차례 검증을 한 끝에 믿었고 그랬기에 자신과 아들들의 목숨을 맡겼다.

그런데 그 신뢰가 깨지는 날이 왔다.

천살이 담담히 말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군.”

구연강이 큭큭, 웃었다.

천살의 말투가 바뀐 것에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그랬군. 과연 그랬어.”

구연강이 자조적인 웃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조개량, 그놈의 배포로는 감히 이런 짓을 꾸미지 못하겠지. 뒤에 누가 있는 것이오?”

천살은 가만 구연강을 보았다.

“굳이 알 필요가 있겠는가?”

구연강의 미간이 꿈틀하였다.

“노사,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구려. 그 말은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란 소리처럼 들리는데, 맞소?”

천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출수하면 구연강의 목숨을 끊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수년간 구연강을 호위하며 그의 무공은 물론 남들이 모르는 버릇까지 익히 알고 있다.

구연강이 십대고수라지만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천살에게는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소?”

구연강이 의자 깊숙이 기대며 말했다.

“삼도문 세 사람과 싸울 때였소. 연성결의 마지막 도는 제대로 길을 잡아 왔소.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했겠지.”

“….”

“그 후 그런 생각이 들더군. 내가 당신의 위치에 있었다면 과연 그 도를 막아 낼 수 있었을까? 당신의 무위가 나를 능가하는 게 아닐까? 그런 고수가 왜 호위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고작 그런 의심만으로?”

천살이 어이없다는 듯 표정으로 구연강을 보았다.

“물론 그 이전에 운살이 셋째 놈의 죽음을 방관할 때부터 미심쩍긴 했소. 그자가 과연 셋째의 안위에 신경을 쓰기나 했을까?”

“…?”

“천지풍운, 당신들 네 사람은 조개량이 데려왔지. 조개량을 의심하니 당신들도 믿을 수 없게 되더군.”

구연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그림자처럼 지켜 주는 호위가 자객이 될 경우를 생각해 봤소.”

천살이 주름진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확실히 자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로군. 사실 흥미로웠지.”

“….”

이번에는 구연강이 침묵하였다.

“방심이란 게 없더군.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도 칼을 품고 자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자네를 보고 알았지.”

“….”

“눈을 뜨고 자는 사람도 처음 봤다네. 그래서 흥미가 생겼어. 어떻게 하면 자네를 암습할 수 있을까?”

“방법을 알아냈소?”

천살이 고개를 저었다.

“어설프게 암습을 시도하느니 차라리 정면대결을 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네. 게다가….”

천살이 가볍게 한 발 내디뎠다.

“자네는 십대고수 아닌가. 충분히 나와 맞상대할 자격이 있지.”

구연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신과 맞상대할 생각이 없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천살이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주름진 그의 눈꺼풀이 흔들렸다.

천살이 멍한 얼굴로 구연강을 바라봤다.

“노사가 아무리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 해도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 수는 없지 않소?”

구연강이 촛불을 바라보았다.

“홍화훈(紅花薰)이라고 하오. 약간의 냄새가 있긴 하지만 대개 초의 향이라고 여기지.”

“독…?”

천살이 촛불을 봤다.

바람도 없는데 촛불이 꺼졌을 때 의심했어야 했다.

“독이라면 당신 같은 고수를 제압하기 힘들지. 이건 잠시 폐부를 마비시키는 효과만 있을 뿐이오. 그리되면 내공을 운용하기가 힘들지. 그렇지 않소?”

천살이 비틀거렸다.

“우리 인연의 결말이 좋지 않아 유감이오.”

구연강이 손을 들었다.

그때.

창밖에서 누군가 말했다.

“방주님, 손에 사정을 두시지요.”

구연강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비도 하나가 날아와 촛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신기수사 조개량이다.

“마지막 제의를 드려야 할 때가 온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일러서 좀 당황스럽기는 하군요.”

구연강의 표정이 석상처럼 굳었다.

***

어둠 속에서 담을 넘는 자들이 있었다.

“누구냐?”

문이 열리며 강하가 걸어 나왔다.

강하와 강란은 서로 교대를 하며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십여 명의 복면인이 마당에 도열하였다. 정체가 발각된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듯했다.

복면인 중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찾을 사람이 있어 왔다.”

“좋은 뜻은 아니로군.”

“한 사람만 내주면 된다.”

“…?”

“삼도문의 여식이 여기에 있는 걸 알고 왔다.”

“누구를 찾든 대낮에 떳떳한 얼굴로 다시 와라.”

강하가 딱 잘라 말했다.

“흐흐흐. 그럴 생각이었으면 이 밤중에 왜 찾아왔겠느냐?”

복면인이 손을 들었다.

늘어선 복면인들이 도를 세웠다.

은은한 달빛이 도면을 타고 흘렀다.

그때 뒤채에서 연화심이 걸어 나왔다. 절정에 이른 연화심이다. 이목 또한 밝아져 복면인들이 담을 넘는 순간 알아채고 나온 것이다.

“알아서 나오는군.”

복면인 우두머리가 연화심을 보고 흡족해하였다.

“순순히 따라올 테냐. 아니면 여기서 칼을 맞을 테냐?”

연화심이 복면인을 둘러봤다.

“대체 누가 나를 찾는 거냐?”

“가 보면 안다.”

연화심은 대충 짐작이 갔다. 도를 쥔 형태를 보아 마가보 사람들이 분명했다.

“좋다. 앞장서라.”

연화심이 고갯짓을 하자 복면인들이 대문을 열었다.

“연 낭자. 안 됩니다.”

강하가 가로막았다.

강소군이 없는데 연화심을 수상한 자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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