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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103화 (103/250)

103

“이노옴!”

한왕은 원래 성정이 급하고 거칠었다. 지금까지 참은 것만도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강소군이 자신을 모욕하고 수하 장수까지 눈앞에서 죽이자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옆에 걸어두었던 언월도를 집자마자 강소군을 향해 몸을 솟구치려 하였다.

그러자 증화보가 온몸을 던져 막았다.

“주군, 진정하십시오.”

“비켜라! 저 방자한 놈을 죽이지 않는다면 세상이 나를 어찌 보겠느냐?”

“격장지계입니다. 잠시 고정하십시오. 여기 장수들에게 맡기셔도 됩니다.”

한왕이 언월도를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강소군은 태연하게 서 있었다.

대청의 장수들은 일제히 병장기를 들고 강소군을 노려보았다.

한왕부의 장수들은 하나하나 고수들이다. 서른 명이 넘는 고수들이 뿜는 살기가 대청을 뒤덮었다.

한왕의 명이 떨어지면 달려들어 강소군을 난도질 칠 기세다.

“다들 잠시만 기다리시오.”

증화보가 장수들도 말리고 강소군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격장지계를 펼쳐 파국으로 가려는 것이오? 이러고도 살아나가기를 바라오?”

“애초에 나를 부른 의도가 자명한데 굳이 감출 게 뭐 있나?”

강소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다만 오늘 하는 걸 보니 정말 가소로웠다. 나를 불러 놓고 출정식이라니. 내가 이따위 위세에 굴복하여 역모에 가담하기를 바란 것인가?”

증화보가 얼굴을 붉혔다.

출정식은 확실히 그의 의도였다. 강소군에게 대세를 보여 주고 회유하고자 하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강소군이 자신의 얕은꾀를 지적하자 내심 부끄럽고 한편으로 독심이 솟았다.

“과연 강부로군요. 본인의 생각이 부족하였음을 인정하오. 시류를 아는 이가 준걸이라 했는데 강 공자가 여기서 생을 마치려 하다니 안타깝구려.”

증화보가 손짓을 하였다.

“강 공자가 무림에 몸을 담았다는 소식은 들었소. 이제 야인이 된 이상 굳이 한왕부의 장수들이 나설 이유가 없지.”

대청 한쪽에서 거한이 걸어들어왔다.

일권삼각 봉무량이다.

봉무량의 싸늘한 안광이 강소군을 향했다.

“네가 혈마라는 아이냐?”

강소군은 초연에게 십대고수에 대해 들은 바 있다.

초연은 용모파기가 알려진 몇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줬는데 그중 하나가 봉무량이다.

‘일권삼각!’

한 번 권을 지를 때 세 차례 발차기를 한다는 권법의 고수다.

봉무량이 나타나자 장수들이 뒤로 물러나 대청 사방 벽에 섰다.

강소군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강소군이 대청 밖 마당에 도열한 군사들을 보았다.

장창과 도검으로 무장한 장수와 군사들이 마당에 가득했다.

강소군이 자신을 향한 봉무량의 시선을 무시하고 한왕에게 물었다.

“장 장군부의 일은 어찌 된 것이오?”

뜬금없이 장 장군부의 일을 묻자 한왕이 코웃음을 쳤다.

“곧 죽을 놈이 별걸 다 묻는군.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강소군이 한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왕은 장 장군부를 모함했다는 세간의 의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장연보가 살아 있었다 한들 나의 상대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장 장군부의 역모 사건에 대해 한왕을 의심하면서도 긴가 민가 하고 있었다.

한왕이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지금 황제가 하는 꼴을 보면 오히려 나를 도와 거병을 하였을 것이다. 그가 살았더라면 지금 세 치 혓바닥으로 먹고사는 놈들이 득실거리는 조정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야.”

강소군이 씨익, 웃었다.

“그 말이 당신 목숨을 살렸소.”

한왕이 기가 막혀 웃었다.

“하하하. 정말 미친놈이군. 강일부의 아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이 사실일 줄이야.”

한왕은 문신을 멸시하고 무신을 우대하는 자였다.

과거 강소군의 부친 강 국공은 문신으로 한왕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속이 좁은 한왕은 자신이 하는 일을 번번이 좌절시킨 강일부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다.

강소군이 문득 말했다.

“천무방이 당신의 일을 도와줄 것 같소?”

한왕은 이제 노기를 가라앉히고 여유를 찾았다.

강소군이 반드시 여기서 죽을 것이라고 자신하였으니 그럴 만했다.

“구연강이 왜 나와의 삼초지약에 당신을 불렀을 것 같소?”

“네 아버지처럼 궤변에 능한 놈이군. 시간을 번다고 오늘의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느냐?”

한왕은 강소군이 시간을 벌고자 한다고 오해하였다.

강소군이 코웃음을 쳤다.

“구연강은 천하 십대고수의 일인으로 무공도 뛰어나지만 여우 같은 머리도 지니고 있지. 나와 당신을 이렇게 맞닥뜨리게 한 걸 보면 무림은 조만간 그의 손에 떨어질 것 같군.”

한왕은 여전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증화보는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구연강이 오늘의 자리를 예측하고 삼초지약에 불렀다는 의심이 든 것이다.

강소군이 증화보가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는 말했다.

“당신의 책사가 아주 모자라지는 않은 모양이군.”

강소군이 말을 마치고 봉무량을 향했다.

“무림에 몸을 담은 자가 역모의 자리에는 왜 나타난 것인가?”

봉무량은 눈앞의 젊은이가 무얼 믿고 이리 나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천하 십대고수의 일인으로 만나는 이마다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렇게 살아온 그로서는 지금 이 자리가 마뜩잖았다.

한왕이나 휘하 장수들은 그를 십대고수라고 우대하면서도 은연중 강호의 야인 취급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바라고 온 처지이기에 그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혈마라는 놈까지 자신을 무시하니 은근 분기가 일었다.

“혈마가 광오하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선후배의 도리도 모르는 놈일 줄은 몰랐군.”

강소군이 코웃음을 쳤다.

“무림 십대고수란 자가 돈에 팔려왔다면 세상이 뭐라고 할지는 생각 안 해 봤나?”

봉무량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흥!”

봉무량이 한 걸음 내디뎠다.

“주둥아리로 싸우려는 것이냐?”

봉무량이 일권을 내질렀다.

섬전과도 같은 권이었다. 철권호의 묵직한 권과는 사뭇 달랐다.

-파파팍!

권영이 연달아 짓쳐 들었다.

강소군이 크게 발을 내디뎌 회전하면서 땅에 떨어진 칼의 자루를 발끝으로 쳤다.

강소군에게 덤벼들다 죽은 장수의 대도였다.

칼이 솟으며 강소군의 손으로 들어갔다.

-쉬쉬쉭!

도광이 번뜩이며 권영을 갈랐다.

“어림없다!”

봉무량이 순식간에 강소군의 앞으로 다가서며 권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우직한 권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방에서 살기가 몰려왔다.

강소군은 눈앞의 권은 놔두고 사방으로 도를 휘둘렀다.

-퍼퍼퍽!

허공에서 봉무량의 발과 강소군의 도가 수차례 얽혔다.

봉무량의 퇴법은 신기에 가까웠다.

강소군은 하반신을 쓸어오는 경력을 피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타앗.”

기다렸다는 듯 봉무량이 기합과 함께 몸을 솟구쳤다.

순식간에 연달아 세 번의 발차기가 이어졌다. 봉무량의 절초 붕정만리였다.

발끝에서 나오는 경기는 강기의 수준에 가까웠다.

강소군이 허공에서 몸을 뒤틀고는 비스듬히 도를 날리며 옆으로 회전하였다.

-파파팍!

다시 한 번 봉무량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쾅!

-우지끈!

봉무량의 다리에 걸린 대청 기둥 하나가 박살이 나고 천장 대들보가 부러졌다.

사방을 에워싼 장수들은 숱한 전쟁을 겪었으나 이처럼 흉험한 일대일 무공대결은 보지 못했다.

한왕조차도 내심 놀랐다.

‘십대고수들이 하나같이 인간의 한계를 넘은 자라더니 과연 그렇군.’

동시에 이와 맞서 밀리지 않는 강소군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다.

‘반드시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

한왕은 지난날 강 국공을 진작 처리하지 못해 역모에 실패하고 산동으로 쫓겨 갔던 원한을 잊지 않았다.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봉무량의 권과 발에 내공이 실리자 사방으로 비산하는 경력에 대청을 포위한 장수들이 피하기 급급하였다.

어느 순간 봉무량이 한 발 물러섰다.

“장소가 좁은 것 같군. 밖으로 나가는 게 어떤가?”

공간이 제한된 대청이 권각의 고수에게 유리할 텐데 봉무량이 오히려 넓은 곳으로 나가자고 제안하였다.

강소군이 끄덕이자 봉무량이 먼저 마당으로 내려갔다.

강소군이 뒤따라가자 대청을 포위했던 장수들이 우르르 에워싸며 마당으로 내려갔다.

봉무량이 강소군에게 포권을 하였다.

“대단하군. 나의 상대가 될 만하다.”

강소군이 마주 예를 취했다.

무슨 이유에서 왔든 봉무량의 권법만큼은 진짜였다.

강소군이 겨뤄 본 권법가 중에 기억할 만한 이는 철권호 정도였다.

소림승 정관과 제자들 또한 일류의 반열에 오른 권법가들이었으나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은 무공이었다.

소림 권법의 오묘함과 내력을 담고 있었지만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가 부족했다.

허나 철권호나 봉무량의 권은 살인을 하는 권이었다. 일권 일권이 검이나 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봉무량이 앞으로 다가와 일권을 후려치는 듯하더니 연달아 다시 삼각이 날아왔다.

강소군이 도를 세워 날아드는 봉무량의 발을 막아갔는데 어느새 다른 발차기가 날아와 도면을 쳤다.

-쾅!

-파직!

강소군의 도가 봉무량의 발에 맞아 그대로 박살이 났다.

봉무량은 철권호와 달리 승부사였다.

철권호의 권은 일격에 상대를 박살 내겠다는 정면돌파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상대가 검을 들든 창을 들든 상관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권으로 밀고 나가는 우직함을 담은 권이었다.

그러나 봉무량은 달랐다. 차근차근 상대의 손발을 묶고 자신의 권세로 끌어들여 최후를 결정짓는 자였다.

-파파팍!

강소군이 도를 잃자 봉무량의 권세가 더욱 빨라졌다.

강소군이 손을 휘저어 봉무량의 권세를 감아갔다.

“흥! 태극권? 그걸로는 부족하지!”

봉무량이 코웃음 쳤다.

그는 이미 무당을 찾아 태극권을 격파한 바 있다.

봉무량의 권각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권각은 한없이 가벼웠으나 상대에 닿는 순간 경력을 터뜨려 박살을 내는 무서움이 있었다.

부드러움으로 상대를 감싸 강함을 제압하는 태극권의 묘리와는 상극이었다.

한왕도 대청에서 나와 계단 위에 서서 싸움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싸우는 주위로 장수들과 군사들이 포진하고 있으니 강소군이 빠져나갈 걱정은 없다.

봉무량이 기세를 올리니 그로서는 다잡은 고기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강일부, 네놈의 오만방자함을 네 아들이 갚는 것이다!”

한왕이 내심 득의만면하여 싸움을 지켜봤다.

“그런가? 그럼 이건 어떤가?”

강소군의 기세가 갑자기 바뀌었다. 전신에서 강력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퍽! 퍼퍽!

강소군의 권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 속도가 봉무량에 못지않았다.

-퍼퍽!

봉무량이 잠시 당황하며 주먹을 내질러 강소군의 권세를 막았다.

그러나 강소군은 어느새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휘익!

강소군의 팔꿈치가 봉무량의 왼쪽 얼굴을 노리고 날아왔다.

봉무량이 오른손 손바닥으로 얼굴을 방어하며 늘어뜨린 왼손으로 강소군의 턱을 노렸다.

그런데 어느새 강소군의 왼손이 봉무량의 왼손을 쳐내고는 그대로 복부를 가격하였다.

-퍼엉!

워낙 빠른 움직임이라 경력이 많이 실리지 않은 게 봉무량에게는 다행이었다.

권각술의 대가인 만큼 호신강기 역시 두터운 봉무량이었다.

그는 복부에 타격을 받았으나 그대로 상체를 돌리며 뒤돌아차기를 하였다.

그런데 강소군 역시 상체를 휘돌리며 봉무량의 허리를 뒤에서 감아 들어 올렸다.

“어엇?”

봉무량의 발차기는 허공을 휘저었다. 뜻밖의 수에 봉무량이 당황하며 팔꿈치로 강소군을 내리찍으려 하였다.

그러나 강소군은 봉무량을 뒤에서 감싸앉은 채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퍽!

-빠각!

뒤로 넘어간 봉무량의 머리가 청석과 부딪히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박투술?”

누군가 중얼거렸다.

강소군이 보여 준 것은 전장의 군사들이 흔히 쓰는 박투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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