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염기창이 깨어났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비로소 사람을 알아보았다. 침상에 누워 있는 염기창은 안색이 파리하였다.
“고맙소.”
염기창이 강소군에게 말했다.
“일어나서 예를 다하지 못함을 용서해 주시오.”
강소군이 침상 옆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인연에 따라 이리된 것이니 마음에 둘 것 없습니다.”
강소군은 연화심과 중랑이 염기창과 장영영을 구한 것이 새삼 놀라웠다.
지난겨울 화룡도 조운룡이 단신으로 합비 청하무관에 뛰어들어 귀영대로부터 연화심과 중랑을 구하지 않았다면 오늘 염기창이 어떻게 살아 있었을까.
“나는 그저 뒤치다꺼리를 한 셈이입니다.”
강소군의 말을 염기창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강소군이 미소를 지었다.
“회주의 사제 조운룡과 안면이 있습니다.”
“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도룡회 내부의 부끄러운 일입니다. 말씀드리지 못함을 양해하여 주십시오.”
염기창은 젊은 나이지만 도룡회의 회주였다.
외인에게 내분을 알리는 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해합니다. 깨어나셨다기에 와 봤습니다. 정양하시지요.”
강소군이 말을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염기창이 잡았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염기창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사제에게 서신을 보내고 싶은데 전해 주실 수 있는지요.”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기창이 자신의 침상 머리맡에 있는 장영영을 보며 말했다.
“잠시 둘만 있었으면 합니다.”
강소군이 장영영을 보았다. 이 집에 온 뒤 장영영은 한 번도 강소군을 찾아오지 않았다.
장영영은 강소군의 시선을 피했다.
강소군은 말없이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장영영이 나와 서신을 건네주었다.
“화룡도는 산동 용연곡에 있습니다. 그에게 직접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회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서신을 건넨 장영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강소군은 조용히 서신을 받아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강소군이 중랑을 찾아갔다.
중랑은 뒷마당을 연무장으로 삼아 검을 수련하고 있었다. 오늘은 연화심도 함께하는 중이다.
두 사람의 합격술은 갈수록 완벽해지고 있었다.
강소군이 나타나자 두 사람은 검을 멈추고 다가왔다.
“부탁이 있어 왔소.”
강소군이 염기창의 서신을 꺼냈다.
“염 회주가 사제 화룡도에게 전하고자 하는 서신이오. 그는 지금 산동 용연곡에 있다고 하오.”
두 사람은 조운룡과 인연이 있고 무엇보다 강소군이 믿을 수 있었다.
“조 협에게 신세를 진 일이 있으니 당연히 가야지요.”
연화심이 서신을 받으려 하는데 중랑이 가로챘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같이 가요.”
“아니. 천무방의 추격이 코앞까지 왔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두렵지 않아요.”
중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두려운 게 아니다. 이 서신은 아마도 염 회주나 조운룡에게 중요한 내용일 것이다. 행여 실수라도 하면 맡지 않은 것만 못하다.”
연화심이 생각하니 맞는 말이었다.
천무방이 자신을 쫓고 있으니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오라버니만 가는 것도 불안해요. 천무방은 오라버니도 노리고 있을 거예요.”
연화심이 걱정했다.
“서둘러 달리면 사나흘이면 돌아오는데 무슨 걱정이냐.”
“그래도….”
연화심은 오랫동안 같이했던 중랑과 떨어지려니 마음이 불안했다.
강소군이 두 사람을 보다 말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소. 말은 장숙이 준비해 줄 것이오.”
***
“그냥 가셔도 되겠습니까?”
강소군이 맨손으로 한왕이 초대한 연회에 가려 하자 장오가 말렸다.
강하와 강란 남매도 완전무장하고 따라나서려 했다.
“한왕이 무슨 짓을 꾸몄을지 모릅니다. 같이 가겠습니다.”
강소군이 손을 저었다.
“아니, 이곳도 누군가는 남아 있어야 한다.”
강하가 생각하니 그도 그랬다.
도룡회주가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연화심 또한 천무방의 표적이다.
“그렇다면 무기라도 가져가시지요.”
“연회라고 하는데 병장기를 가져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강소군이 담담하게 말하고 말 위에 올랐다.
한왕은 도성에서 백 리 정도 떨어진 장원에 머물고 있었다.
한왕부의 군사들이 주위에 포진하고 있었다.
“누구냐?”
강소군이 나타나자 길을 막고 검문을 하던 장수가 물었다.
“강부에서 왔다고 전해라.”
장수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정중히 모시란 명을 받았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장수가 직접 강소군을 장원까지 안내하였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장원 곳곳에 화려한 등이 걸렸다.
너른 마당에 창을 든 군사들이 도열하였다.
한왕은 대청 태사의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양옆으로 한왕부의 장수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강소군이 대청에 오르자 한왕이 거만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왔느냐?”
강소군이 말없이 예를 취했다.
“이리 오시지요.”
시비가 종종걸음으로 나와 강소군을 자리로 안내하였다.
한왕의 오른편 첫째 자리였다.
강소군이 앉자 한왕이 입을 열었다. 두 눈에서 광망이 번뜩였다.
“오늘 연회를 마련한 이유를 아느냐?”
강소군이 한왕을 쳐다보았다. 말하라는 뜻이다.
한왕이 옆에 선 증화보에게 손짓을 하였다.
증화보가 나서더니 두루마리를 펼쳐 읽었다.
“선황이 유약하고 새 황제가 아직 경륜이 부족하니 조정에 간신모리배들이 판을 치고 있다. 종묘사직이 흔들리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구구절절이 거병을 하여 나라를 구한다는 충정이 담겨 있는 글이었다.
“…이에 나 한왕이 하늘의 명을 받들어 떨치고 일어났으니 뜻있는 우국지사와 대소신료들은 함께하기를 바란다.”
증화보가 다 읽고 나자 앉아 있던 장수들이 일제히 일어나더니 반걸음 앞에 나와 한쪽 무릎을 꿇고 가슴에 손을 대었다.
“충심으로 따르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대청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바깥에 도열하였던 군사들이 일제히 외쳤다.
“충심으로 따르겠습니다.”
이어 장원 밖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들도 뒤따라 외쳤다.
한왕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짓을 하자 장수들이 제자리에 앉았다.
“출정에 앞서 술과 안주를 내릴 것이다. 마음껏 마시고 용맹하게 싸우기를 바란다.”
이어 술과 음식이 나왔다.
강소군의 앞에도 술과 안주가 놓였다.
모두의 잔에 술이 채워졌을 때 장수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오늘같이 기쁜 자리에 한 사람이 없습니다.”
장수가 강소군을 노려보았다.
“왕충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생사고락을 같이해 왔던 소장으로서는 참으로 통한스러운 일입니다.”
지난번 강소군이 목을 쳤던 장수의 이름이 왕충이었나 보다.
“출정에 앞서 그의 목숨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고자 합니다. 허락하여주십시오.”
한왕이 손을 저었다.
“그는 내 조카이자 오늘은 손님으로 왔다. 숙부의 연회에 왔다가 고초를 당하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느냐?”
그러나 장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비무라도 청하게 해 주십시오. 소장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한왕이 짐짓 노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감히 내 말을 거역할 셈이냐?”
그러자 다른 장수들도 일제히 일어났다.
“저희도 같은 뜻입니다.”
한왕이 강소군과 장수들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왕충의 일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휘야, 그가 너를 공격한 건 다른 뜻이 아니었다. 네가 내 말을 무시하는 걸 보고 충정이 끓어 나선 것뿐이다. 그런데 네가 독수를 펼쳐 단숨에 그의 목숨을 끊어 버렸으니 어찌하겠느냐.”
자기로서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투였다.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하였다.
강소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강소군이 선동했던 장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칼을 겨누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겁니다. 그게 누구든 어느 자리든 같습니다.”
강소군의 말에 장수들이 분노하였다. 이 자리에 모인 수십 명의 장수들을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말이었다.
강소군은 한왕을 보며 말했다.
“왕야께서도 알아두어야 할 게 있습니다. 거병을 하든 말든 나는 상관치 않습니다.”
한왕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강소군의 말이 마치 훈계처럼 들렸던 것이다.
“다만 강부와 나의 지인들에게 벌어졌던 일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입니다. 그게 누구든 어느 자리든 역시 같습니다.”
“감히! 네가 지금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한왕이 격노하여 옆의 탁자를 내리쳤다.
강소군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능멸?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내 뜻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한왕이 벌떡 일어났다.
“뭐라? 네가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고 함부로 구는 것이냐?”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기세였다.
그러자 증화보가 한 발 앞으로 나가 말했다.
“왕야, 제가 강 공자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증화보는 이 자리가 바로 난장판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
한왕은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깨달았다.
“말하라!”
증화보가 강소군을 향해 읍을 하고 말했다.
“결기가 대단하십니다. 그 모습에 감동하여 문득 한 가지 충언을 드리고자 이리 나섰습니다.”
강소군이 말이 없자 증화보가 말을 이었다.
“돌아가신 강 국공은 만인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말로만 듣던 강직한 성품을 오늘 그분의 아들을 통해 직접 보게 되니 참으로 만감이 교차합니다.”
증화보의 말솜씨는 매끄러웠다.
“허나, 하늘의 추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대세를 따르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군자는 위험에 거하지 않는다는 옛말을 되새겨 남경으로 돌아가심이 어떻습니까?”
증화보는 어떻게든 한왕과 강소군이 대립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강 국공이 죽은 지 십여 년이 되었지만 조정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왕이 그 아들을 죽이면 분명 반발을 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증화보는 오늘 강소군이 딱 죽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게 마지막 살길을 열어 주고자 했다.
그런데 강소군은 피식, 웃고 말 따름이다.
‘이놈이 살 방도를 일러줘도 모르니 오늘 딱 죽겠구나.’
증화보가 내심 빈정이 상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강 공자께서는 오늘 새로운 천명이 이 땅에 내린 것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신 모양입니다.”
강소군이 크게 웃고 말았다.
“새로운 천명? 참으로 가소롭구나.”
모두의 안색이 홱, 변했다. 강소군이 이렇게 대담하게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강소군이 한왕을 향해 말했다.
“이 책사는 어리석기 짝이 없군요. 왕야의 부족한 머리를 채울 자가 못됩니다.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지금이라도 회군하는 게 좋겠군요.”
“뭐라?”
“이놈이?”
강소군의 말에 연달아 호통이 터졌다.
한마디로 한왕과 증화보 두 사람을 싸잡아 모욕한 셈이다.
-챙!
장수 하나가 칼을 뽑았다.
“저놈을 내 손으로 죽이고 말겠다!”
장수가 강소군을 향해 달려드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심지어 강소군조차 달려드는 장수를 가만 바라볼 뿐이다.
장수의 보폭이 점차 좁아지더니 강소군 앞에 이르러 칼을 사선으로 내리찍었다.
-쉭!
“헉!”
강소군은 왼손을 들어 장수의 칼을 쳐냈다.
칼이 옆으로 튕기는 찰나, 강소군의 왼손은 그대로 장수의 목을 쳤다.
-우두둑!
뼈가 박살이 나는 소리가 대청에 울려 퍼졌다.
“끄르륵.”
장수가 피거품을 뿜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모두가 석상이라도 된 듯 굳었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강소군이 대청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새 잊었나 보군.”
강소군이 한왕을 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두 눈에서 싸늘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내게 칼을 겨누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