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96화 (96/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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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하고 있군.”

강소군이 윤지평을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네게 무슨 말을 들으러 온 게 아니다. 오히려 한 가지 전하러 왔을 뿐.”

“…?”

“천황성과 나는 공존할 수 없다.”

강소군의 입에서 천황성이라는 말이 나오자 윤지평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사실을 알려 주고자 온 것이다.”

강소군은 윤지평의 안색을 보고 그가 천황성의 인물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찾아온 것은 강소군의 입장에서도 도박이었다.

드러난 사실은 너무나 단편적이었다.

부모와 진운초를 죽인 누군가가 있다는 것.

수법이 전문 자객에 의한 것이며 배후가 있다는 것.

배후는 조정에서 암약하는 세력이라는 것.

그것뿐이었다.

강소군은 진운초가 뒤를 캐던 동창 신이기의 과거를 따라오다 윤지평에게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윤지평이 어떤 인물인지, 그가 몸을 담고 있는 세력이 실재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거기서 벽에 부딪혔다.

그동안 지켜본 바에 따르면 윤지평은 주위 관리가 철저했다.

그만한 인물이 고문을 한다고 순순히 털어놓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천황성의 존재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버지는 대정비각주셨다. 당연히 천황성을 추적하였을 것이고 그들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결국 강소군은 추론에 의지하여 끊어진 연결고리를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윤지평의 안색에서 자신의 추론이 맞았음을 확신하였다.

윤지평은 허를 찔린 듯 강소군을 노려만 봤다.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로서는 강소군이 어디까지 아는지 궁금할 것이다.

강소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겠다.”

강소군이 짤막하게 말하고 담담하게 걸어나갔다.

***

윤지평은 강소군이 나가고도 한참을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윤지평이 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구나. 아들아.”

윤석중이 움찔, 놀라며 아버지를 쳐다봤다.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윤석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가 천황성을 거론하는 순간 우리의 목숨이 결정됐다는 소리다.”

윤지평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의심하고 추궁을 하였다면 이 집을 폐쇄하고 잠적하면 됐을 것이다.”

윤지평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천황성을 거론하였지. 그 순간 바로 잡아떼지 못한 게 실수였구나. 이제 저자는 확신을 가지고 갔다.”

“저자를 죽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윤석중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직 어린 아들딸이 있는 윤석중이다. 일가족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윤지평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말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저자는 철권호와 맞상대한다는 고수다. 저자를 죽일 자객을 부르려면 성에 사실대로 고해야 한다.”

윤지평의 말에 윤석중이 부르르 떨었다.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늙은 내관을 처리했듯 성에서는 자신의 일가족을 죽여 꼬리를 자를 것이다.

“애초에 발을 들이지 말아야 했다. 알량한 이상에 빠져 너희까지 희생하게 되다니.”

윤지평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창밖을 내다봤다.

햇볕이 환한 여름날이었으나 그의 눈에는 침침한 죽음의 날로 보였다.

“차라리 저자가 나를 죽였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윤지평의 눈이 번뜩였다.

자신은 죽더라도 아들과 손자들을 살릴 방안이 떠오른 것이다.

***

개봉 만리표국.

연화심과 중랑이 표국을 나왔다. 복건 장원에 있는 화천대에게 보내는 서신을 맡기고 나오는 중이다.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연화심이 걱정하였다. 천무방의 이목이 감시하고 있으니 복건 장원을 포기하라는 서신이었다.

“초 대주는 지략이 뛰어난 자이니 무사할 것이다.”

천무방과 마가보의 추격은 집요하였다.

장무강 일행은 결국 북상을 택했고 개봉까지 올라왔다.

천무방의 세력은 아직 개봉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개봉에는 개방이라는, 천무방으로서도 만만치 않은 세력이 자리 잡고 있다.

두 사람이 객잔으로 돌아오자 장무강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 셈인가?”

장무강이 연화심에게 물었다. 천하는 넓은데 갈 곳이 없다.

모두 막막하기만 하였다.

“경성으로 갈 겁니다.”

연화심이 결심을 한 듯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경성? 거기는 지금 난리라던데?”

개방의 본거지답게 개봉에는 무수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경성에서 소리 없는 살육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렇게 된 이상 천무방과 결판을 낼 수밖에 없어요. 대정무각에 합류하겠어요.”

산동삼호가 곤란한 기색을 지었다.

대정무각은 황실의 비호세력이고 자신들은 역도의 무리로 쫓기고 있는 처지이다.

장 장군부를 생각할 때 잠시 의탁을 할 수는 있지만 함께 일을 도모하기는 어렵다.

연화심도 산동삼호의 처지를 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였다.

“이제까지 함께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가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은혜를 갚을 날이 올 것입니다.”

장무강이 탄식하였다.

연화심은 죽을 각오를 한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서 싸워야지.’

연화심도 이제 한 사람의 무인이다. 그녀가 복수를 하겠다니 장무강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처지가 남달라 함께할 수 없으니 안타깝군.”

“세 분은 어찌하실 셈입니까?”

중랑이 장무강에게 물었다.

“우리는 항주로 갈 생각이네. 오 년 동안 갈고 닦은 숙수의 실력을 발휘해 봐야지.”

장무강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항주에 오거든 모연객잔을 찾아 삼등(三燈)을 걸게.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걸세.”

연화심이 감격했다. 모연객잔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장무강 등은 삼도문 연씨를 잊지 않겠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헤어짐은 짧을수록 좋겠지.”

그날 저녁 다섯 사람은 마지막 술자리를 나눴다.

다음 날 새벽.

연화심은 중랑과 경성으로 떠났다.

***

경성의 하늘을 살기가 뒤덮으니 기루에 손님도 끊겼다.

강소군은 한적한 기루의 입구에 서서 삼 층 누각을 올려다보았다.

기루는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고관대작을 상대하는 곳이라더니 격이 달랐다.

차분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나오더니 강소군을 맞았다.

강소군의 차림이 명문가 귀공자이니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물었다.

“명화루 총관입니다. 예약을 하셨는지요.”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 집은 처음이신가 보군요.”

총관이 강소군의 뒤를 살피고 일행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누각과 별원이 있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차이가 있소?”

“대금이 다르지요.”

명확하고 간단한 대답이다.

“별원이 좋겠소.”

총관이 손짓을 하자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 다가왔다.

“난향정으로 모시게.”

여인이 가볍게 무릎을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말해다.

“이리 오시죠.”

강소군이 여인을 따라갔다.

잘 다듬은 정원은 기루라기보다 명문가의 정원 같았다. 곳곳에 달린 등이 은은하게 비추니 고아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오문을 천박한 패거리라고 하는데 소문이 틀린 모양이로군.’

강하는 분명 명화루의 주인이 하오문 사람이라고 말했다.

강소군은 사실 강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개방과 하오문이 여러 가지 정보를 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여인은 수란이 핀 정원이 딸린 별원으로 안내하고는 사라졌다.

별원에는 따로 담당하는 여인이 이었다.

“난향정에서 귀인을 맞아 영광입니다.”

여인이 별원 상석으로 안내하고는 물었다.

“혹시 찾으시는 기녀가 있습니까?”

“루주를 만날 수 있겠소?”

강소군의 말에 여인의 아미가 잠시 휘어졌다가 이내 풀어진다.

“귀인께서 오셨으니 루주께서도 잠시 들르실 겁니다.”

잠시 후 술상이 들어오고 기녀 하나가 칠현금을 품고 왔다.

붉은 옷을 입은 기녀는 보기 드문 미녀였다. 서늘한 눈매가 인상 깊었다.

기녀는 문가에 앉아 칠현금을 놓고 강소군을 바라봤다.

강소군이 말이 없자 기녀가 가볍게 탄주를 시작하였다.

강소군이 어둠이 내린 밤하늘을 보았다.

저 하늘 아래서 오늘 밤도 누군가 죽어갈 것이다. 황제와 한왕은 서로 상대편 인물을 죽이고 있다.

밤마다 자객이 들고 곳곳에서 칼부림이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수십 명이 난입하여 전투를 방불케 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만은 딴 세계 같군.’

강소군이 천천히 술을 마셨다.

기녀는 강소군이 말이 없자 어느 순간 연주를 멈췄다.

기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남경 강부의 공자께서 어찌 하오문을 찾으시는지요.”

강소군의 시선이 기녀를 향했다.

기녀가 칠현금을 옆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강소군의 앞에 서서 예를 표했다.

“명화루주 초연입니다. 찾으셨다기에 왔습니다.”

강소군은 내심 놀랐다.

한낱 기녀인 줄 알았는데 명화루의 루주라니.

루주는 아무리 봐도 스물이 넘지 않아 보였다.

강소군은 강하가 전한 정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의외로군. 당신이 루주라니.”

초연은 말없이 술병을 들더니 잔에 따르고는 강소군에게 건넸다.

“그저 얼굴일 따름입니다.”

실제 주인이 따로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숨김없이 말하는 초연도 그저 허수아비는 아닐 듯했다.

“하오문에는 여러 가지 정보가 있다고 들었네.”

“강부의 주인께서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은 아닙니다. 강호의 야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어찌 관심을 가지시는지요.”

“강호라… 강호가 뭔가?”

“….”

초연은 묵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강호에 대해 알고 싶네.”

강소군의 말에 초연이 시선을 들어 바라봤다.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가 하오문 사람이 맞다면 나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겠지.”

“….”

“누군가 그러더군. 강호에 발을 들이면 빼기 어렵다고.”

언젠가 노이칠과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강소군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알아볼 참이네.”

“….”

“강호라는 세상을 얘기해 주게.”

초연은 시선을 내렸다. 뇌리에서 의문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강소군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혈마가 강호를 알려 달라니. 무슨 뜻인가?’

하오문은 모든 인원을 끌어모아 경성에 풀었다.

황제가 돌연사하고 젊은 황제가 올랐다. 숙부가 조카를 치고자 경성을 에워싸고 있다.

천하의 주인이 뒤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하오문으로서도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수많은 문파에서 하오문에게 정보를 요청하고 있다.

관무불침이라지만 무림의 대문파들은 조정의 판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강소군 역시 경성에 들어서자마자 하오문 사람이 붙어 지켜보는 중이다.

그저 한 사람의 감시대상이었던 자가 하오문을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뜬금없이 강호를 이야기해 달라니.’

초연은 이런 식의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초연이 다시 강소군을 봤는데 담담한 얼굴에서 속을 읽기 어려웠다.

‘강휘. 강부의 주인. 군문에 들어갔다가 실종 삼 년 만에 돌아옴. 그 후의 행적은 알 수 없음. 지난해 가을 삼도문의 조력자로 천무방과 격전을 벌임.’

초연은 들어오기 전 훑어본 강소군의 이력을 상기하였다.

“긴 밤이 되겠군요.”

초연이 말했다.

“물으시면 아는 대로 답을 하겠습니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 문파들부터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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